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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 댄서들"이 돈벼락 내린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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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 댄서들"이 돈벼락 내린다는데… [밥&돈·17] '한국경제론'이 필요하다
'한국경제론'은 어디 있는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이번 대선은 유독 "경제"가 쟁점이다. 맨 오른쪽에서 맨 왼쪽에 걸친 모든 후보들이 저마다 스스로를 "경제 대통령"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미 OECD에 가입한 완숙한(mature) 경제가 되어버린 한국경제로서는 대단히 부담스러울 7%니 8%니 하는 경제성장률을 이루겠다는 어음과 수표가 전국을 허옇게 뒤덮고 있다.

대책들도 다양하다. 국토 한가운데를 쭉 째서 물을 흘려보내겠다고 하는 이도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푹 쉬게 한 뒤 공부를 한 자라도 더 시키겠다는 이도 있고, 다짜고짜 노동자의 주머니에 그냥 돈을 넣어주겠다는 이도 있다. 잘 모르기는 해도 다른 후보들의 경우도 기상천외의 묘책이 없을 리 없다.

2007년 대선 이후의 대한민국에 복이 있나니. 대선 후보 모두가 경제 대통령이요, 그들이 약속하는 경제성장률도 상상을 뛰어넘는다. 누가 당선이 되던 한반도 남단은 돈벼락을 맞게 될 것으로 기대해도 될 것 같다.
▲ 2007년 대선 주자들. 이들은 정확한 현실 진단을 근거로 경제처방을 내놓고 있는가. ⓒ뉴시스

물론 방금 쓴 문장에는 냉소적인 감정이 듬뿍 들어가 있다. 필자도 불필요하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가급적이면 밝고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이런 식의 냉소를 적어놓는 것이 싫다. 그런데도 대선을 계기로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비전"과 "정책"을 들을 때마다 허파에 찬바람 든 사람마냥 냉소가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오는 이유가 있다.

도대체 2007년 한국경제의 현 주소와 상황에 대한 진단은 어디에 있는가. 환자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묻지도 설명하지도 않은 채 그저 요란하게 북과 꽹과리를 울리며 자신이 가져온 약이야말로 만병통치이니 '일단 한 번 먹어봐'라고 소리치는 이들. "돌팔이 약장수" 말고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11월 5일)은 공교롭게도 IMF 위기를 맞은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10년간 한국 경제는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그 구조와 작동 방식과 사회적 체제 등 모든 면에 있어서 환골탈태에 가까운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우연적인 것이었기는커녕 김대중 노무현 양 정권이 "세계화 시대의 선진 경제" 운운의 깃발 아래 적극적으로 주도한 것이기도 하다.

10년이 지난 지금 누구나 "경제가 문제"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고, 따라서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든 경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지난 10년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추진한 소위 "시장 개혁"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이는 아무도 없는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개혁" 속에서 한국 경제가 도대체 어떻게 변하여 어디가 어떻게 망가지고 병들었기에 10년이 지난 지금 경제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는 비명이 터져 나오는가에 대해 속 시원한 설명을 주는 이는 왜 아무도 없는가.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한국경제가 걸어온 역사에 대한 진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불현듯 이런 저런 정책을 "묘안"으로 들고 나오는 이들을 우리가 어째서 신뢰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요약하자. "한국경제론"은 어디 있는가.

모든 이들이 일자리가 없다고, 양극화가 문제라고, 집값이 비싸고 교육비가 비싸고, 노후가 불안하고 매일 매일이 불안하다고 외치고 있다. 지금 한국경제가 어떻게 되어 있기에 이러한 고통이 나오게 된 것인가.

그 근원적인 원인에서 우리 눈앞의 현상으로 이르는 길고 긴 인과관계의 연쇄는 어떻게 된 것인가. 그 연쇄의 어디를 어떻게 손대야 이 고통스런 현상들이 고쳐질 수 있다고 설명해주는 이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경제론의 비극

사실 "한국경제론"의 부재는 우연이 아니며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며, 한국 지식계의 고질적 문제이다.

주류학계의 경제학은 -케인즈 경제학이건 신고전파이건- 기본적으로 경제를 하나의 독자적 시스템, 즉 무수한 방정식으로 연결된 내생변수와 외생변수의 함수 관계로 파악하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사회의 특수성 따위에 관심을 가질 수도, 충분히 다룰 수도 없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치는 기간에는 이 경제라는 "기계" 또는 "엔진"을 성장 혹은 안정, 어느 쪽의 기조로 운전할 것인가라는 무자비한 논쟁만 계속 되었을 뿐, "한국경제"의 특성이 무엇인가라는 논쟁은 하지도 않았고 할 만한 이론틀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경제학계 전반이 신고전파 쪽으로 확연하게 기운 1990년대에 들어 더욱 악화되었다. 신고전파 패러다임에서는 어느 사회의 사회적 특성이 경제 모델의 파라미터(parameter, 매개변수)로만 드러낼 뿐 아예 관심거리가 아니게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애초부터 어떤 사회의 정치경제적 특성을 총체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파악할 수 없는 주류 경제학의 한계는 여러 대학의 경제학과마다 어쩔 수 없이 개설되어 있는 소위 "한국 경제론"과 같은 강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했다.

필자가 다니던 대학 경제학과의 한 교수는 세계적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 "他"가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한국경제론"의 태두라는 이였다. 그가 교과서로 저술한 책에서 한국경제 성공의 원인으로서 "과학적"으로 제시한 것은 "근면하고 검소하고 슬기로운 한국인의 민족성"이었다. 그러면 똑같은 민족으로 구성된 북한경제는 어째서 저러한가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보다 더 큰 규모로 공식적으로 벌어진 해프닝도 있다. 바로 IMF 위기를 전후로 해서 180도로 바뀌어버린 "한국경제론"이다.

1990년대 초 세계은행(World Bank)의 보고서를 필두로, 서구 학계에서는 아시아의 "4마리 용"들의 기적적인 경제 성장은 '시장과 국가의 균형'에 힘입은 것이었다는 주장이 유행이었다. 수입대체전략 등 폐쇄적인 발전 전략을 취한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과 다르게, 이들 국가들은 애초부터 개방과 수출을 통한 외화 획득과 같은 시장 지향적 발전 전략을 취했고, 여기서 국가는 사회적 평형을 유지하고 시장의 균형을 잡는 중요한 기능을 했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 대학원을 다녔던 필자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경제학과 뿐 아니라 정치학과 사회학과의 교수들까지 한국의 경제 체제가 얼마나 시장 지향적이며, 소위 "국가와 시장의 균형"이 어떻게 유지되어온 독특한 체제였는가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외국 논문을 읽히고 토론의 형식으로 신앙 고백을 (사실은 자백을) 강요했었는지….

사태는 1997년 후반 몇 개월을 지나며 일변했다. 똑같은 교수들이 정반대의 "한국경제론"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한국 자본주의야말로 시장의 자유로운 기능을 방해하는 온갖 규제와 낙후된 사회 제도 및 관습 등으로 가득 찬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이며, 그 원흉은 바로 국가 기구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국가의 규제와 온갖 "아시아적 발전 모델"-바로 몇 달 전까지 경제성장의 비밀무기였다고 그토록 찬양하던-의 특징들을 걷어치우는 과감한 개혁만이 살길이라고 모두들 한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한다.

1945년을 기억하는 독일인들은 한목소리로 히틀러 만세를 외치던 시민들이 순식간에 반(反)히틀러주의자로 돌변했던 진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1987년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올림픽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6월의 "폭도"들을 매도하던 시민들이 순식간에 민주주의의 승리를 노래하게 됐던 진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1997년을 전후한 한국의 주류 사회과학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의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 그랬던 이데올로기의 문제였다면 후자는 총부리 들이대는 자 없는데도 스스로 눈치를 보고 움직인 "과학자들"이 빚어낸 소극(farce)이었다는 점 뿐.

물론 비주류 진보학계도 이 "한국경제론"에 관한 한 주류학계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별다른 실증적 근거나 자료는 제시하지 않은 채, 학파마다 정파마다 자신들의 신념과 취향에 따라 각자 일본책, 북한책, 소련책, 프랑스책, 독일책, 스페인어책 등을 색색으로 번역해 거기에 나온 이야기들을 어거지로 한국 상황에 뜯어 맞추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1980년대의 한국경제 체제는, 논자의 취향과 정치적 신념에 따라, 1930년대 중국과 비슷한 "식민지 반봉건사회"에서 1960년대 남미와 닮은 "주변부 자본주의"를 거쳐 식민지 초과이윤 '알파'가 마구 빠져나가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사회"까지 여러 가지 조리돌림을 당하게 된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아무 개념 정의도 실증적 근거도 없이 다짜고짜 한국경제의 "생산력이 낮은가 높은가"를 놓고 "부르주아 혁명파"와 "민중민주주의혁명파"가 격돌하는 저 끔찍한 "ND-PD논쟁"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한없이 반복되는 "이윤율 저하" 이야기 이외에 딱히 한국 자본주의의 분석이라 할 만한 것이 나오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

이 맥락에서 중요한 예외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박현채 선생이 펼쳤던 "민족경제론"이 그것이다.
▲ 故 박현채 선생의 생전 모습. ⓒ한길사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박현채 선생의 지론은 방법론, 실증자료, 사상적·이론적 지향 모두에서 대단히 많은 논쟁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선생의 민족경제론을 21세기의 한국 상황에 즉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는 것이 필자의 사견이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남한 지성사에서 한국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추상적인 이론이나 모델의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파악과 실천 속에서 이론화하려고 했던 선생의 지적 태도에 대해서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에 대해 아무리 많은 반론과 반대를 가진 독자라고 해도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역사적·구조적으로 해명하려고 집요하게 달려들었던, 선생의 경제 과학자로서의 태도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경제론은 결코 학문적 성실성의 차원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 정책의 타당성과 설득력에도 깊은 파장을 가진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주지의 사실이 되었지만, 김대중 씨가 1970년대부터 자신의 경제정책의 브랜드로 내걸었던 "대중경제론"은 바로 박현채 선생의 작품이었다.

대중경제론이라는 정책적 대안이 "민족경제론"이라는 현실의 이론적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중소자본, 노동자, 서민, 농민 등이 독재정권에 결탁한 대재벌에 맞서 동일한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는 주장이 현실의 경제정책으로서나 정치적 강령과 연합 전략으로서나 수미일관한 구조를 가지고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현채 선생이 김대중 씨와 결정적으로 결별하는 1992년 이전의 한국 정치경제 구조를 볼 때 "민족경제론"이라는 이론적 파악 그리고 그에 근거한 "대중경제론"이라는 정책적 대안에 대해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학자나 정치 세력은 있을 수 없었다.

어둠 속의 댄서들 혹은 복서들: "한국경제론"을 재건하자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 이후 이렇다할만한 "한국경제론"은 진보 쪽에서나 보수 쪽에서나 아직 체계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한 부재의 결과는 바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대선 후보들의 온갖 "만병통치약"의 범람이다.

앞서 말했듯 1997년 이후 10년 동안 한국의 정치경제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 왔으며 지금 어디메쯤 와있는지에 대한 진단은 하지 않은 채, 나라 한가운데를 쭉 째자고 하기도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공부시키자고 하기도 하고, 노동자들의 주머니에 불문곡직 돈을 넣어주겠다고 하기도 하고, 경제성장률 7%니 8%니 온갖 숫자들을 내밀기도 한다.

예전의 그 아리송한 한국경제론 논지, 즉 "한국인의 민족성" 이론도 그대로 살아 있다. 한미 FTA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논리에 맞서 울려 퍼지는 "우리는 장보고, 광개토대왕의 자손이므로 할 수 있습니다"는 선전문구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가 훌륭한 "시장 개방적 경제"임을 강조하는 이들은 그러므로 이 장점을 살려 "금융 허브"를 건설하자고 하고, 아직도 시장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또 그러니까 "금융 허브"를 건설하자는 똑같은 주장을 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어떤 주장도 좋다. 그러나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이론적으로 차근차근 해명하는 "한국경제론"을 먼저 내걸지 않은 한, 그 어떤 주장도 "어둠 속의 댄서"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댄서 본인은 자신의 눈에 무엇이 보이든 안 보이든 행복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옆에 서있지는 말자. 공연히 그의 춤사위에 턱이건 뺨이건 얻어맞을 수 있기에. 그래서 사실 "어둠 속의 댄서"는 "어둠 속의 복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대통령 선거라는 장은 이런 저런 이들이 자기 주먹을 자랑하는 복싱의 장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쉬이 현혹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급하다고 바늘허리 실 매어 못쓴다. 사실 당장 누구를 뽑으면 몇 퍼센트 성장이 되고 무슨 원더랜드가 온다는 소리에 속을 만큼 한국인들이 어리석지도 않다.

우리가 처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경제의 현 상황에 천착해 원인에서 결과까지의 구불구불한 인과 관계의 연쇄를 천천히 해명해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이 복잡한 고리를 먼저 푸는 쪽이 한국의 미래를 잡아나갈 자격이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한국경제론"이다. 그러한 과학적·이론적 천착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대선 후보들이 그 모든 정책을 늘어놓는 대통령 선거는 "한국경제"의 오늘과는 별 상관이 없는 알량한 아이디어 경연대회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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