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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덮친 크레인…"내가 보이면 플래시 불빛을 비춰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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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덮친 크레인…"내가 보이면 플래시 불빛을 비춰 봐" [4차 희망버스, 다시 시작·②] 해고자 아내가 크레인에 올라간 남편에게
영제 씨, 나 왔어, 여기 진보부동산 앞 늘 그 자리. 어둠이 크레인을 먹어 버려 아무것도 안 보이네. 내가 보이면 플래시 불빛을 비춰 봐. 응 거기 거기 있네. 저번 1차 희망버스 다녀가고 나서 담장에는 칼날 철조망에 세 겹 그물망에 전조등에 겹겹이 둘러쳐지고, CCTV로도 모자라 담 아래 용역들이 노란 철모를 쓰고 왔다갔다 하네. 참 을씨년스럽다. '봉래동 잔혹사'를 보는 듯하다. 예전에는 붉디붉은 줄장미들이 회사 담벼락을 빙 둘러 있었지. 1994년 파업 때이던가, 학교 마치고 두 살배기 큰애를 업고 회사 정문 앞에서 목이 아프게 가족들이 모여서 시위를 했었지. 그때 담장의 붉은 장미를 보면서 정말 아이러니하다는 느낌이었지. 회사 안은 나무 한 그루 없이 쇳덩이 뿐이잖아. 1차 희망버스가 오던 날, 젊은 애기 엄마들이 두어살 먹은 아이들을 업고 안고 '당신이 우리의 희망입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정문 앞에 앉아 있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어. 옛날 생각이 나면서. 그동안 노동자가 일할 맛 나는 세상을 만들자고 그렇게 열심히 투쟁했는데 아직도 십 수 년 전의 나처럼 저러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쓰렸어. 선배가 되어서 좋은 세상 만들어 주지 못하고 고통을 물려준 것 같아서. 저 어린 것들에게 어른들이 몹쓸 짓을 하는구나.

뭐라구? 하나도 안 들려. 이승과 저승만큼의 거리도 아닌데. 바쁜데 뭐하러 오냐구? 그래도 여기 매일 와야 마음이 편해. 부산역에서 101번이나 88번을 환승하고 여기 오면 그래도 답답한 마음에 구멍이 나면서 숨쉬기가 편해져. 생명평화를 위한 백배서원하시는 분들은 하루도 안 빼고 늘 오셔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절을 해 주시는데. 정말 나는 뭐 할 수 있는 게 없네. 가족대책위 동생들은 매 끼니 밥을 해서 크레인에 올리는 일부터 해서 정리해고 당한 아빠들을 도와서 어린 애들 데리고 다니면서 안간힘을 쓰는데. 지난 달 생일 때 영제 씨 생일밥도 차려서 올렸다면서. 크레인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연명해가는 사람들에게 생일상이 뭔 호사냐고 퉁을 주긴 했지만 너무 고마웠어. 그 밥심으로 열심히 살아야 해. 그게 보통 생일밥이 아니잖아. 그치.

참, 가족끼리 밥 한 끼 같이 먹는 즐거움이 요즘처럼 간절한 적이 없어. 남들은 평범한 일상으로 누리는 걸 우리는 왜 못 누리지? 2011년 벽두부터 시작된 파업으로 조합원들이 생활관에서 지내면서 다들 가정을 돌보지 못했잖아. 우리집만 해도 큰딸이 졸업을 하고 작은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도 설날이 돌아와도 제사 때도 자기 자리는 항상 빈 자리였지. 생각나? 2006년에 20년 만에 복직했을 때 애들이 너무 좋아했지. 왜, 학년 초가 되면 늘 써가야 하는 가정환경조사서 있지? 거기 아빠 직업란에 '한진중공업'이라고 쓰면서. 어린 마음에도 아빠가 직장이 있다는 게 좋았나봐. 근데 그거 얼마 못 갔네. 그래도 애들이 아빠 없는 생활을 의젓하게 잘 견디네. 사실 이렇게까지 오래 갈 줄 생각하지 않았지. 겨울이 가고 벌써 여름도 막바지잖아. 올 여름 참, 길다.

1월 6일 새벽에 진숙씨가 85크레인에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이 철렁했어. 2003년이었지. 추석 뒤에 85호 크레인에서 명을 달리한 김주익의 그 깊이 모를 외로움이 또 한 번 왈칵한 거야. 정말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했지. 살아서 내려와야 한다고. 6월 27일 행정대집행 때 크레인에 밧줄로 몸을 묶고 버틴 조합원들 심정도 그랬을 거야.

동생처럼 아꼈던 주익이 죽고, 재규형님이 죽고, 그 두 사람의 목숨값으로 2006년에 영제 씨랑 정식 씨만 복직했을 때, 남겨진 김진숙 때문에 마음이 많이 괴로워했지. 영제 씨에게 진숙 씨는 입사 동기이고 1986년 같이 해고된 후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함께 해온 동지이기 때문에. 그 부채감이 아마 영제 씨를 지금 크레인에서 견디게 하는 힘인 거 알아. 하지만 사수대라는 명칭은 왠지 거부감이 들어. 크레인에 처음 올라갔을 때 마음은 김진숙을 살려서 같이 내려오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지금은 해고자들을 위한 희망의 불빛이어야 해. 정리해고를 철회하고 다 같이 공장으로 돌아가는 날, 박수 받으면서 내려와야 해.

올 여름 유난히 폭우가 많았지. 비 오면 귀청을 때리는 빗소리에, 햇볕 내리쬐는 날에는 철판의 온도가 40도를 넘는다면서, 지난번 천둥번개 칠 때는 내게도 잠 한숨 못자는 불면의 시간이었지. 거기가 무슨 감옥도 아니고 제 발로 올라갔으니 죽든말든 상관 않는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회사 측을 보면서 심한 분노를 느낀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면 전기를 넣어준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는 회사측. 지난번엔가 열흘 만에 물 한 동이 올라와서 다 같이 머리 감았단 말을 듣곤 치를 떨었어. 세상에 악명 높은 관타나모도 아니고. 포로수용소에 갇힌 적군도 그런 대우는 않지 않나? 여름에 몸을 씻지 못하는 고통, 옷을 제대 갈아입지 못하는 고통보다 더 한 게 어디 있을까? 내 가족에게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용서하고 싶지 않다. 크레인 위의 사람들도 언연히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누릴 권리가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겨 주고 싶다.

크레인에서는 안 보이겠지만 회사 건물 정면에 커다랗게 현수막이 걸려 있네. '우리 회사는 우리가 살리고 우리가 지킨다'라고 임직원 명의로. 그렇지, '그들만'의 회사지. 본심을 바로 보여주네. 수주를 못 받아서 1년 동안 1100여명을 희망퇴직 시키고 100여명을 정리해고한 한진, 회사경영상의 이유로 적법하다고 법원이 손들어준 한진, 그런데 임직원들이 작년 연말에 주식배당으로 174억, 현금배당으로 59억을 챙겼다고 그러네. 그들에게는 '우리' 회사 맞겠다.

오늘은, 66주년 광복절 기념일이야. 이명박 대통령이 축사에서 '공존발전'을 말했네. 일자리를 늘리고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그런데, 그 다 같이 잘 사는 사회에 노동자들은 없나봐. 기본적인 생활도 꾸릴 수 없는 저임금의 수많은 비정규직들도 없고, 대학 등록금 때문에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대학생들도,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 대열에 줄서는 젊은 청년들도 없나봐.

하지만, 여기 크레인 아래에서 '공존'의 힘을 느껴. 많은 사람들이 손에 힘을 주고 서로 잡고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준비해. 크레인이 바로 희망의 불빛이라고 하네.

김진숙, 그가 희망의 씨를 뿌리고 희망버스가 꽃을 피우고 한진의 조합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직장으로 돌아가는 날, 그날 '아리~'하면서 다 같이 신명풀이라도 하고 싶어.

옆에서 딸들이 그런다. 진숙 이모 빨리 내려와서 세뱃돈 달래. 왜, 설날에 창원에 차례 지내고 곧장 한진으로 왔잖아. 우리 딸 둘이 자리깔고 크레인 위에 있는 진숙씨에게 세배했잖아.

그리고, 영제 씨, 크레인에 오래 있더니 시인이 다 되었데. <한겨레21>에 쓴 글을 보았어. 마음이 넉넉해지고 커지네.

85호 크레인은 차별 철폐와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는 모두의 희망이다
85호 크레인은 희망의 연대를 안내하는 길잡이자 나팔수다
85호 크레인은 서로 도와주고 지켜주며 함께하는 인간다운 세상을 바라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다.


이제, 집으로 간다. 캄캄한 밤이지만 그래도 보름달이 덩실하네. 아무리 캄캄하게 크레인을 어둠이 묻어버리려 해도 달빛까지 삼키지는 못하지. 우리도 그럴 거야.

잘 자구. 내일은 밀양으로 출장간다. 모레나 올게.

2011년 8월 저녁에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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