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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명의 죽음, 미운 놈은 미워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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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명의 죽음, 미운 놈은 미워하며 살자" [기고] 공지영 작가의 쌍용차 진단에 대한 아쉬움
공지영 작가가 쌍용자동차 문제를 다룬 보고서 <대체 그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가제)>를 내기로 한 후 쌍용차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오랫동안 고립된 싸움을 해온 노동자들에게 무척 반가운 소식이다. 공동집필자 중 한 사람인 이창근 쌍용자동차노조 기획실장은 "노동자들에게 공지영 작가의 참여는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뀐 것만큼 설레면서도 든든한 느낌을 준다"고 기대를 표현하기도 했다.

유명 작가가 우리 시대 가장 큰 아픔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싸워준다는 것은 당사자들뿐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큰 힘이 된다. 이렇게 많이 죽기 전에 이런 움직임들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다행인 마음이 먼저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죽음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사회적 노력이 시작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일이다.

3년 동안 22명이 죽고 그 중 11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한 비극. 쌍용자동차의 해고는 이렇게 '죽음'이란 단어로 집약된다. 사회적 관심이 모아진 것도 바로 이 죽음 때문이다. 아마 이만큼 죽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살의 형태를 띤 죽음이 포함되어 있지만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회적 타살'이란 말을 많이 쓴다. 그러나 사회적이란 단어는 개인적인 문제로 인한 죽음이 아니란 면에선 정확한 표현이지만, 이 죽음의 가해자를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쉬운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죽음을 '기업의 노동자 살인'이라고 부른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절규가 옳았다는 사실이 입증된 마당에, 해고의 당사자인 기업의 행위를 명백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은 이 죽음을 해결할 열쇠를 쥐고도 자물쇠에 꽂지 않는 것과 같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알수록 적의 실체가 없는 유령과의 싸움"이라는 공지영 작가의 말에 우려가 드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쌍용자동차 문제야말로 너무나 많은 실체를 가진 적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 지난달 19일 서울 대한문 쌍용자동차 노동자 분향소 앞.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각계인사가 꾸린 '함께 살자 100인 희망지킴이'를 발족하는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공지영 작가. ⓒ뉴시스

쌍용차 사태를 만든 주범, 그 적나라한 '실체'들

2004년 상하이차는 거저먹다시피 쌍용차를 인수했다. 기술유출과 졸속매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부는 이를 방치한 수준을 넘어 적극 비호했다. 도리어 당시 참여정부는 매각에 반대하던 노조를 비난했다. 졸속 매각보다는 국민경제를 먼저 생각하는 방향에서 공기업화 등 대안을 모색하자는 논의를 묵살했고, 오히려 '대중국 수출의 통로 역할을 할 것'이라며 매각을 밀어 붙였다. 당시 상하이차 매각을 추진한 정부기관의 책임자는 산업자원부 장관이었던 이희범, 외교통상부 장관이었던 반기문 등이다. 상하이차가 인수한 뒤 손을 떼기까지 기간에 산업자원부 장관이었던 정세균 현 민주통합당 의원도 기업의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를 최대한 개선하겠다며 상하이차의 기술유출보다 노동조합에 대한 비난에 무게를 실었다.

정부와 자본은 한통속이 되어 쌍용차의 기술유출을 방치했고, 상하이차 자본은 인수할 때 약속했던 대규모 투자, 신차개발, 완전한 고용승계 어느 것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여러 부침을 겪으며 겨우겨우 살아나던 쌍용차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는 졸속매각을 추진하던 때부터 이미 제기되던 문제였다. 상하이차가 인수한 이후 쌍용차는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희망퇴직을 강제했고, 비정규직은 소리 소문 없이 천여 명 넘게 잘려나갔다.

상하이차는 결국 기술만 먹고 튀었다. 적자가 된 쌍용차는 2009년 법정관리 상태로 내몰렸고, 다시 매각을 위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파국은 2009년 2646명이라는 대규모 정리해고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상하이차 매각 당시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던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기술유출을 막을 수 있도록 강제했던 특약을 해지해주며 상하이차의 기술유출과 먹튀를 도왔다. 국정감사에까지 오른 사건이지만 여전히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민유성 산업은행장은 매각은 채권단과 인수자의 문제라며 산업은행의 책임을 모르쇠한다. 쌍용차가 회생불능하다는 근거를 제출해 노동자들을 대량해고하고 헐값매각에 이르게 한 삼정KPMG와 삼일회계법인도 회계조작, 기획파산의 의혹을 받고 있으나 이 또한 제대로 조사되지 않고 있다. 핵심기술의 유출혐의자들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하고 2년여를 끌어오던 재판에서 1심 판사는 혐의자들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법정관리인인 박영태와 이유일은 강제로 희망퇴직 당한 노동자들의 체불임금과 위로금도 못 주던 어려운 상황에서도 수천 만 원의 임금을 챙겨 비난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이미 몇 개월째 임금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뿐인가. 당시 쌍용차의 노동조합은 기술유출의 책임을 엄중히 묻지 않았고 노동자들을 희생하는 방식에 동의해주면서 노조의 임무를 버렸다. 비정규직의 불신은 극에 달했고, 정규직의 불안은 그 이상이었다.

결국,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이미 잘려 나갈 만큼 잘린 후에도 쌍용자동차 경영진은 노동자의 절반가량을 해고하겠다고 발표했다. 동료와 나, 둘 중 하나는 해고인 상황, 노동자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77일 동안 공장에 갇힌 채 벌인 처절했던 파업, 그리고 잔인했던 진압. 짐승에게도 하지 못할 것 같은 끔찍한 살인진압을 진두지휘한 조현오 당시 경찰청장은 이를 자신의 업적으로 자랑하고 있고, 경찰청은 베스트 진압사례로 선정했다. 최근에는 이 진압을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승인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10년 가까이 진행되어 온 쌍용자동차의 경영악화와 부침의 역사에 등장하는 실체들은 이처럼 분명하게 존재한다. 더 분명한 것은 이 고통의 역사가 온전히 노동자들만의 것이었다는 사실과, 노동자들은 경영의 실패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사실이다.

적의 실체가 없는 유령과의 싸움?

공지영 작가는 쌍용차 사태를 알아갈수록 두렵다고 말한다. 악의 심연을 들여다 본 자는 심연도 그를 들여다본다는 말에서 보듯 이 사태를 방조하고 방관한 우리 모두의 책임을 무겁게 통감하고 있는 듯하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쌍용차 사태는 모던한 측면이 있다. 적의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진은 조남호라는 명백한 상대가 있는데, 쌍용차는 자본의 복잡한 국제적 흐름,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과 분열 속에서 벌어진 상황이라 적이 누군지가 불분명해졌다. 희생자들은 처음엔 구사대를 적으로 간주했다가 투쟁전선에서 이탈하거나 경찰에 밀고한 동료 노동자들로 적의가 옮겨가고, 마지막엔 적의를 자신에게 돌린 결과 자살을 택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고 충분히 그런 진단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판단이 부분적인 사례를 일반화하는 위험과 함께, 쌍용차 죽음을 분석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 될까 우려스럽다.

그녀가 말하는 모던이란 '적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전제가 옳아야 들어맞는 진단이다. 한진의 조남호, 현대차의 정몽구처럼 분명한 재벌총수가 있는 기업의 정리해고 사태는 적으로 상정할 타깃이 분명한 게 사실이다. 그들의 말 한마디로 기업의 모든 판단이 좌우되는 상황에서 어찌 보면 투쟁의 전선이 분명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쌍용차에 재벌 총수가 없다고 해서 적의 실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조남호가 있는 한진중공업이 3년 넘게 복직약속을 어기고 노동자들을 버려둔다면 쌍용차와 같은 죽음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현대자동차는 정몽구란 뚜렷한 실체가 있어도 노동자들이 분신하고 목을 맨다.

특히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과 분열 속에서 벌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적이 누군지 불분명해졌다는 말은 어떤 상황을 두고 한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동자들은 투쟁 초기부터 명확하게 책임자를 상정해두고 싸웠다. 쌍용차 사태의 5적을 규정했고, 어용노조 대신 민주노조 집행부를 세웠으며 77일 동안의 옥쇄파업을 함께 견뎌냈다. 투쟁 과정에서 갈등과 분열은 어느 집단에나 있는 것이고, 이것이 특별히 쌍용차 사태에서 더 심각하게 불거져 적의 실체까지 가릴 정도였는지는 모르겠다.

또한 노동자들이 적의를 자신에게 돌린 결과 자살을 택했다는 진단에도 온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스물두 명의 죽음에는 스물두 개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완전한 고립과 절망에 이르러 삶의 끈을 놓은 사람도 있고,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한 사람도 있다. 자살은 아니더라도 해고로 인한 정신적인 어려움과 질병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경우도 있다. 죽음의 형태와 사연은 달라도 스물두 명을 보내며 우리가 겨우겨우 합의에 이른 단 하나의 진실은 "해고는 살인"이란 명제다.

내가 만났던 노동자는 자기를 해고명단에 올린 관리자를 죽여버리고 싶다 했다. 그 적의가 자기 자신에게 옮겨가진 않았다. 오히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열심히 일한 내가 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몰라 정신적인 공황상태가 왔다. 이 모든 죽음이 적의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린 결과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단선적인 판단이 아닐까?

근대의 가치마저 부정당한 쌍용차 사태

나는 쌍용차사태가 근대의 가치마저 부정당한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상황의 총체라고 생각한다. 근대는 봉건사회를 극복하고 이뤄낸 시대다. 개인의 합리성을 존중하고 시민권이 인정되는 민주주의가 근대의 핵심이며 자본주의를 합리적인 경제체제로 받아들인 것도 근대이다. 그러나 쌍용차는 노동자들의 시민권을 해고라는 칼로 유린했으며 이들의 합리적인 판단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회계조작, 정부와 자본의 유착, 먹튀자본 등 시장경제마저 위협하는 반시장적인 행위들은 자본주의에도 반하는 것들이다. 이는 모던이 아니라 퇴행이며 새로운 질서가 아닌 변형된 악습에 불과하다.

경찰의 진압은 어땠나? 쌍용차사태의 진압장면에는 근대는커녕 봉건도 어울리지 않을 만큼 인간 대 인간이 연출할 수 있는 장면이라곤 없다. 인간이 아니므로 그 앞에서 태연하게 배설하고 성교도 했다는 중세시대의 노예처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근대국가의 시민성마저도 철저하게 부정당한 채 잔인하게 진압의 대상이 되었다. 모던이란 말은 그래서 문학적 감수성의 표현으론 적당할지언정 이 사태를 표현하는 단어로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자칫 적과 아가 분명했던 그간의 노동운동을 구태의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적의 실체가 불분명한 싸움을 새로운 노동운동이라고 각성하는 현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이 위험한 까닭은 고통의 원인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할 때, 고통의 현상에만 천착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다시 실체를 호명해야 하는 싸움

쌍용자동차의 해고자들은 지금도 싸우고 있다. 새로운 인수자 마힌드라자동차, 산업은행, 경찰청, 평택의 본사 앞, 대한문, 국회, 청와대 등….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실체들이 있는 곳이 곧 이들의 싸움터다. 이들은 외부의 적뿐 아니라 스스로와도 힘겹게 싸우고 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도망치고 싶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만 죽어간 동료가 하늘의 별이 되어 지켜보고 있어 숨을 곳이 없는 현실"과, "노동자들이 죽음 직전까지 내몰리면 자본과 정권이 아니라 늘 우리 몫으로 남겨지는 죄책감"과도 싸운다.

희망퇴직자들과 무급휴직자들, 비정규직들은 너무나 많은 적의 실체들에 압도되어 싸울 기력조차 없다. 스물 두 번 째 노동자가 죽었는데 정부, 쌍용차 자본 누구도 사과 한 마디 없고, 회계조작과 기술유출, 정리해고에 대해 반성조차 없는 적들에 대해 분노와 무기력, 체념을 반복하고 있다.

해고자들이 이유일 쌍용자동차 사장의 이름을 부르며 이 사태를 책임지라며 싸워 온 것은, 매각 당시 법정관리인이었고 지금은 쌍용차의 대표로 합의를 이행해야 할 당사자인 그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량이 늘고 경영상태가 나아진 지금 이유일은 "신규인력이 필요할 경우 무급휴직과 영업직 전직, 희망퇴직자를 공평하게 복귀시켜 우선채용"하기로 한 노사합의를 어기고 신입사원 공채를 냈다.

77일 만에 이룬 사회적 대타협이라 불렸던 2009년의 노사합의를 파렴치하게 어기고 있는 이유일의 이름을 더 또박또박 불러내야할 할 이 때, 실체가 보이지 않는 유령과의 싸움이란 진단은 조합원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쌍용차 노동자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많은 적들, 수년 동안 사안 사안마다 드러난 추악한 실체들, 이 모든 적들을 불러내기엔 버겁고, 맞서 싸울 힘은 미약한 자신들의 처지 때문에 체념과 무기력에 빠져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실체가 없는 유령과의 싸움이라 규정되면 이런 무기력과 체념을 더 강화하게 될 것 같아 우려스럽다. 그것이 막연한 우려라면 다행이지만 실제 이유일의 이름을 계속 부르며 싸우던 해고자들이 공지영 작가의 발언 이후 쌍용차의 싸움을 유령과의 싸움이라 말하며 더 이상 이유일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인식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된다면 이 싸움은 출구 없는 미로에 빠질 수 있기에 이 우려를 드러내는 것이다.

▲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으로 행진하는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조합원과 시민. ⓒ연합뉴스

끝까지, 함께, 또박또박

노사합의를 헌신짝만큼도 취급하지 않는 이유일과 쌍용차의 경영진, 이에 대해 어떤 규제도 없는 정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기술유출 책임자에 대한 재판, 그리고 구속되어 있는 한상균 전 지부장. 쌍용차 투쟁의 앞날은 멀고 험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스물두 번째 죽음 이후 차려진 대한문 옆 분향소에 시민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시민상주단이 꾸려졌고, 문화예술인들은 공동행동에 나섰다. 유명 인사들은 '쌍용차 희망지킴이'를 만들어 추모분위기를 확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날마다 분향소를 방문하고 쌍용차 사태를 담은 책과 다큐를 제작해서 널리 알리겠다고 한다.

해고자들은 지금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 사실 당사자들에겐 어떤 도움이든 고맙고 절실한 일이다. 설령 보수정당의 정치인이 와서 돕는다 해도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는, 이 싸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게 그들의 심정일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알기에 유명인들이 이들의 희망을 지키겠다고 나선 일이 반갑고 고마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민에서 시작한 도움이 연대로 향하지 못하고 당사자들의 자학과 무기력을 강화하게 될까 두렵다. 제 3자가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 혹은 한계에 대한 경계가 자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이 왜 아픈지 찾아주고, 그들을 아프게 한 적들의 실체를 또박또박, 끝까지, 함께 불러내 '네 잘못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이라는 걸' 단호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식민지 조선을 가능하게 했던 건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거대하고 뚜렷한 친일파뿐 아니라 촘촘하게 부역한 새끼 친일파들이 있어 가능했다. 우리 모두 가해자이며 어쩔 수 없는 피해자라는 식의 논리로 이들의 책임을 비껴가며 치환하는 것은 역사의 오류이며, 지배 권력의 논리다.

마찬가지로 쌍용자동차 사태가 너무나 복잡하고 많은 적들이 있고, 그로 인해 노동자들이 혼란스러워 할수록 우리는 더 단단하고 명료해져야 한다. 잘못의 실체를 없애려하는 정부, 자본, 금융모피아들, 관료, 사법부, 경찰, 검찰까지, 어렵고 힘들고 지난한 싸움이 되겠지만, 그래서 우리 모두가 외면하지 말고 함께 해야 이길 수 있는 싸움이기도 하다.

"해고는 살인이다"와 "함께 살자"라는 가슴 아픈 유행어를 만든 쌍용자동차의 싸움은 이제 사회적 해결을 위해 겨우 첫 걸음을 뗀 셈이다. 공지영 작가의 참여가 더 많은 사람들이 평범한 내 이웃들의 고통스런 이야기를 함께 들어주고 싸워주는 연대의 움직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그래서 나의 이러한 우려가 과도한 것이었다고 입증되었으면 좋겠다. 공지영 작가의 보고서가 잘 출간되어 쌍용차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위무하고, 서로를 추슬러 다시 잘 싸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독하고, 단호하게 큰 책임부터 작은 책임까지 그 실체들의 이름을 불러내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끝까지, 함께, 또박또박, 말이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괴물이었어"라는 자학의 성찰보다, "미운 놈 미워할 줄 아는" 결기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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