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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싸움은 못해도 불의는 못 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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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지가 싸움은 못해도 불의는 못 참거든요" [자동차로 흘러들어온 사람들]<1> 현대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김상원 씨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가 송전탑 고공농성에 들어간 지 200일 넘었다.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도 노숙농성이 진행 중이다. 그 또한 한 달 째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화'. 길게는 이 문제로 10여 년을 싸워왔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그들의 요구가 현실적인지 아닌지, 그들이 이기적인 집단인지 아닌지를 떠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해온 개개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들이 왜 싸우는지, 대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인지, 아니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들이기에 이러는지.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제각기 걸어온 길을 따라가는 이 글은, 총 6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필자 주

▲고공농성은 200여일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오직 하나의 이유, 비정규직 철폐 때문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나는 애가 없었으면 안 싸웠을 거예요. 내가 처음에 싸웠던 게 '안 잘리고 싶다'. 그렇게 시작한 게 여기까지 온 거니까."

안 잘리고 싶어 쥐죽은 듯 일했다. 눈치를 봤다. 반장에게 화도 내봤다. 안 되겠다 싶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라인을 세우고 회사 용역들과 몸싸움도 하고, 그러다보니 이곳까지 왔다. 정신을 차려니 지상 30미터 위 송전탑이고, 서울 도심 높다란 건물들 사이 종이박스 하나 깔고 누운 몸이다.

머리에 고압전류를 이고 발아래 허공을 둔 지가 200여일, 그것으로 부족해 현대자동차 본사 앞으로 찾아올라온 지가 30여일. 그들이 어디든 오르는 이유는, 현대자동차가 이미 법으로 증명된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십여 년 동안 불법적으로 사용해온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회사는 절대 해줄 것 같지 않은 정규직 전환. 정규직이 그리 되고 싶을까? 한 노동자는 너무 당연해서 의아하다는 듯 답했다.

"그렇죠. 고용불안이 너무 크니까."

하청노동자 치고 업체 폐업이나 전환 한번 겪어보지 않은 이가 없다. 3년 꼴로 공정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진 공정에 딸린 노동자도 함께 사라졌다. 하루를 일해도 10년을 일해도 하루아침에 쫓겨나는 게 사내하청 노동자 신세였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 쫓겨난 이들은 또 다른 사내하청 업체를 찾는다. 그곳에서 다시 1년차 노동자가 된다. 이게 뭔가. 안 잘리고 싶다. 자식이 있는데 돈 들어갈 일투성이인데, 안 잘리고 싶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이다.

현대자동차 본사에 와서, 찬 기운 올라오는 맨바닥에서 침낭에 몸을 파묻고 잔 첫날의 기억이 생생한데 어느새 뜨거운 볕이 내리쬔다. 농성장을 둘러싼 경찰버스가 내뿜는 매연에 목이 잠긴다. 좀 선선해졌구나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비가 쏟아진다. 작은 텐트 하나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이들은 비닐 한 장 몸에 감고 견딘다. 그런 모습을 수십 개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 오른쪽은 용역경비가, 왼쪽은 경찰이 지키고 섰다.

오른쪽 바퀴는 정규직이, 왼쪽 바퀴는 하청노동자가 달았다. 같은 일을 했으나 처지는 달랐다. 한 지붕을 이고 같은 차를 만드는데, 정규직 비정규직 뭐가 다르냐고 물어도 답이 없었다. 15년 전만해도 현대자동차 생산직은 물론 청소노동자부터 식당 요리사까지 모두 정규직이었던 시절은 까맣게 잊고, 너희 몸에는 원래 하청노동자 피가 흐른다는 듯 구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억울하다. 서럽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높다란 건물 꼭대기 현대 로고를 보고 있자면 만감이 교차했다.

"여기 그냥 앉아 있으면, 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대우까지 받을까 싶어요. 미쳐버리겠는 거죠."

누군가는 자신을 미치지 않게 해주는 것이 아들이라고 했다. 울산에 두고 온 제 가족, 그곳에 있을 평범한 일상이 그를 붙잡는다.

누군가는 예뻐 죽겠다는 아이가 있고, 누군가는 죽고 못 사는 애인이 있다. 누군가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고, 누군가는 자동차를 좋아했다. 누군가는 공부가 싫었고, 누군가는 공부를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냥저냥 평범하게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살아왔는데, 어느 새 정신을 차려보니 길바닥 위다. 그러면서도 "여기까지 와보니 서러워, 못 끝내겠다"며 여전히 그 비를 다 맞고 섰다.

그제야 나는 그들을 붙잡아주는 아이들이 궁금해졌다. 마음 아픈 부모가, 버리고 가지 못하겠다는 동료가, 이미 버려진 지난 꿈이 궁금했다. 그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그 모습이 나와 어떤 교집합을 만들고 있을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듣기로 했다.

첫 번째 이야기
- 김상원(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해고자. 35세)


어릴 적, 배를 타는 아버지는 집을 자주 비웠다. 어머니는 원래부터 없는 사람이었다. 새어머니는 그를 자주 때렸다. 그 탓에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한겨울 옥상에서 잠들기도 했다. 따뜻한 저녁 밥상 같은 것은 그저 꿈이었다. 그래서인가, 요리가 꿈이 되었다.

졸업하고 중국집에서 주방보조를 하며 일을 배웠다. 일을 배우다 보면 경력이 쌓이고, 나중에 내 가게도 열 수 있겠지 생각했다. 배달 일을 하다 사고가 났다.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하겠다던 사장이 말을 바꿨다. 벌금도 수리비도 그가 내야 했다. 배신감이 들어 더는 그곳에서 일할 수가 없었다. 마침 현대자동차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현대자동차 협력업체였다.

"2001년 10월 27일."

상원(가명) 씨는 입사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다. 왜 그런 것까지 기억해요? 라고 하니, 그냥 제가 기억을 잘 합니다, 란다. 그러나 기억할 만한 날이다. 그날을 기점으로 인생이 달라졌다.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바깥에서 20년, 30년 동안 겪을 일"을 공장 안에서 10년 동안 겪었다. 식당을 차리겠다는 꿈은 멀어졌다.

대신 그는 농성장 주방장이 되어 버렸다. 송전탑 위 사람들이 200일을 보냈듯, 그 아래 사람들도 200일이다. 해고노동자들이 송전탑 아래를 지킨다. 상원 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방으로 쓰는 농성장 천막에서 머문다. 재료를 다듬고, 국을 끓이고, 주방을 닦고 쓴다. 매 끼니를 대부분 그가 책임진다. 음식을 잘 하고 싶단다. 술을 끊겠다는 이유도 입맛이 둔해지는 것 같아서다.

한 번은 내놓은 음식을 칭찬하니, 이리 진지하게 말한다.

"요리는 남이 아니라 내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하는 마음으로…. 그게 최고죠."

옆에서 요리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저 말이 진심이구나 하게 된다. 늘 먹는 시간보다 몇 배나 공을 들여 음식을 내보낸다.

서울구치소 앞 내장탕

그런 그가 못 먹은 음식이 하나 있다. 음식이라면 남기는 법이 없는 그가 차마 먹지 못한 것은 구치소 출소 날 먹었던 내장탕이다.

"저는 그때 처음 집행유예 받을 때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집행유예 1년 6개월인가 받았을 거예요. 모르니까 까짓것 살지 그랬는데, 인제 문으로 나가잖아요. 나오는데 그러데요. 몇 년 받았나. 그대로 얘기해줬죠. 그랬더니 수갑 풀어주더라고요. 구치소 들어가 옷 챙기고 나왔죠. 구치소에서 나와 가지고, 내려오면 입구에 내장탕 집 있거든요. 양이 진짜 많더라고요. 그런데 국물 딱 두 숟가락 먹고 못 먹었어요."

구치소 밥에 혀가 익숙해진 게였다. 사재 음식이라 불리는 바깥 음식을 몸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거 못 먹은 게 진짜 한이 되요. 그래서 서울 가면 묵어야지, 묵어야지 했는데… 딱 10년 됐네."

10년 전 일이다. 스물다섯 살, 그 한창 젊은 나이에 구치소 경험을 했다. 잡혀가기 한 달 전, 상원 씨는 사람 죽는 것을 봤다. 눈앞에서 사람이 불타 죽었다. 그해 노동조합(정확히는 노동조합 준비모임 격인 비정규직투쟁위원회)에 가입한 그는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가게 됐다. 대체 왜 서울까지 와서 이래야 하는 건가? 그는 잘 이해되지 않았으나 조합원이니 묵묵히 따라왔다. 그런데 집회 도중 비명이 들렸다. 불길이 보였고, 사람들은 울었고, 물을 찾는 외침이 들려왔다.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고 했다. 그 사람은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 고작 서른 한 살이었다. 그가 불을 붙이기 전 외친 말은 "비정규직 철폐"였다.

비정규직인지도 모르고 비정규직 자리에 들어갔다. 내가 계약직이었어? 파견이었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외환위기로 인해 현저하게 취업률이 줄었다. 사람들은 빈자리가 보이면 들어가기 바빴다. 2001년 현대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외환위기 당시 공장 밖으로 밀려난 1만 2000명의 정규직 자리에 협력업체 직원들이 들어왔다. 사내하청, 그게 뭔지 몰랐다. 정규직이랑 비슷한 거 아니야? 협력업체인데 왜 현대자동차 안에서 근무한데? 그냥 잡부 일 시키는 거 아니야? 오래 의문을 갖기에는, 다들 일자리에 굶주렸다.

들어가 보니 이건 심했다.

"진짜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일이 많이 벌어지더라고요.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조반장들이 자기들은 놀면서 안 보내주고. 꼴리면 느그들이 알아서 가라고. (일을) 땡겨놓고 가라고. 라인이 그렇게 빠른데도 그러는 일이 많았어요."

다 큰 성인들이 화장실 가는 문제로 실랑이를 해야 했다. 반장은 마구잡이로 일을 시켰다. 연차를 쓴다고 하면 너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 했다. 맞은편 정규직도 아랫사람 부리듯 하긴 마찬가지였다.

"비정규직은 전부 다 호스(에 달린 공구)를 썼거든요. 에어(줄)요. 에어가 저쪽에 달려 있잖아요. 그라면 요 정도 밖에 못 와요. 근데 정규직이 쓰는 건 에어가 안 달렸거든요. 충전해서 쓰기 때문에 더 편한 거죠. 차가 이렇게 오잖아요. 에어가 요기 있잖아요. 정규직이 그 사이에 있으면 에어가 정규직 옷에 닿을 수도 있어요. 그럼 옷 버린다고 막 욕을 하는 거예요. 작업복인데도 먼지 묻는다고."

명절에 정규직은 기름값 받아가는데, 내 손에는 선물세트 하나 들렸다. 공장 내 의무실, 통근버스도 정규직만을 위한 것이었다. 시급 2500원 받아가며 하청노동자들은 그 꼴을 봐야만 했다. 자존심 상하고 억울하고 납득이 가지 않고. 비정규직들이 그리 살았다. 그러다 몸에 불을 붙였다. 그해 2003년, 죽음을 택한 노동자가 13명이었다.

살타는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불타 죽었다. 눈이 뒤집혔다. 한 달 뒤 도심에 화염병이 등장했다. 상원 씨도 쇠파이프를 들었다. 언론은 폭력 사태라 보도했고, 1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연행됐다. 상원 씨도 속해 있었다.

구치소에 온 것이 서러웠다. 노동자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스물다섯 살 청년은 생각했다. 한편으로 젊었기에, 구속이 되면 되는 거지 생각했다. 그러다 일이 생겼다.

"안에 있을 때, 누나 친구가 면회 왔더라고요. 와 가지고 표정이 안 좋더라고요. 누나 친구가 이 말 듣고 울지 마라고 하는데, '뭔데요? 뭔데요?' 웃으면서 그랬어요. 아버지 돌아가셨다. 그 순간 기분이 진짜 안 좋더라고요. 방에 들어가는 순간 울었어요. 못나갈 수도 있으니까, 상 거기다 물 얹어갖고 아버지 돌아가신 그쪽으로 보고 절을 하라 하더라고요. 절을 하고 많이 울었죠."

담당 형사와 그날 반나절 울산 영안실에 다녀갔다. "제가 불효자거든요" 그는 말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그는 내게 말했다.

"오늘은 안 울라고요. 꾹 참고 있습니다."

단지 살아온 이야기를 듣겠다는 것인데, 그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눈물이 많다고는 하지만 울지 않으면 돌아볼 수 없는 삶인가, 나는 뭣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싸움은 못 해도 불의는 못 참거든요

"그런데도 노동조합을 왜 그만 안 두었어요?"

그만두기는커녕, 그는 2년 전 대의원을 맡았다. 그때 해고를 각오했단다.

"아버지 돌아갔을 때도 후회는 마이 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누가 알겠어요, 이런 일을. 자기가 직접 겪지 못하면 모르잖아요. 저는 체험을 해봤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굴러가고 있고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후회 안하고 나름대로 자랑스러워요."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드린 것이 죄스러워 그는 독거노인을 방문하는 봉사활동을 했다. 주변에서 쉬엄쉬엄 하라고 말릴 정도로, 시간만 있으면 찾아 갔다. 독거노인의 초라함도 말이 아니었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도 밭 한 뙤기 가지고 있지 못해 고향 언저리에 뿌려졌다. 후에 찾아가니 공사 중이더라. 유골이 뿌려졌을 땅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다. 가진 것 없는 인생이란 그랬다.

반장이 욕하면 들어야 했고, 공정이 바뀌니 나오지 말라 그러면 그날로 직장을 잃었다. 가진 것 없는 하청노동자 인생이 그랬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2004년, 작업 중 화장실을 안 보내주는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십여 명의 하청 노동자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나가버렸다. 라인이 섰다. 나간 이들은 즉시 해고됐다. 이들이 자전거 보관소에 비닐을 씌우고 농성을 했다. 상원 씨는 그 싸움을 도왔다.

"지가 싸움은 못 해도 불의는 못 참거든요."

그러고 10년을 싸워왔다. 그나마 회사 안에서 싸울 때는 낫다. 2010년 CTS(도어 탈착 공정) 파업으로 인해 해고된 지 2년 반이다. 가정 있는 사람들의 먹고사는 걱정은 엄청나다. 총각들이야 뭐, 그는 그런다. 그렇지만 자신도 집을 판 처지다. 엄살이 없는 건지, 서먹하여 속내를 못 드러내는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 걱정이 우선인 건지. 나는 답답하여 묻는다.

"후회 안 해요?"

"저는 이거 시작하면서, 이 싸움은 내가 먼저 그만두지 않겠다, 한 거니까요."

"이 싸움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나요? 정규직이 그리 되고 싶으세요?"

정규직 자리만을 생각한다면, 회사가 하고 있는 신규채용(현대자동차는 노동조합과 협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적으로 신규채용 지원을 받았다. 3월 300명의 정규직 채용 모집이 있었다.)에 지원하면 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 부러 묻는다.

"제가 안 되도 상관없어요, 진짜. 솔직한 마음. 진짜 열심히 싸웠던 조합원들 공장으로 돌아가 정규직이 된다면 바랄게 없어요. 제가 안 되도 후회는 안 해요. 왜 그러냐면, 나라에 법이 있는 건 지키라고 있는 거지 어기라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상원 씨가 의아하여 화까지 치미는 것은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 대법원 판결이 났음에도, 누구 하나 법대로 바로잡을 생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책임을 지는 사람도 이행하는 사람도 처벌받는 사람도 없다.

정규직 전환하면 회사 망한다며 기업경쟁력 운운하는 10년 사이, 정몽구 회장 개인 재산은 6억 원에서 무려 그 10배인 6조 원으로 부풀어 올랐다. 상원 씨가 12시간 맞교대를 버텨내며 비정규직 설움이 서러워 울컥 울음을 삼킬 때, 정몽구 회장의 재산은 갈 데 모르고 커져만 갔다. 어디서 나온 돈인지는 뻔했다. 현대자동차를 만들 뿐, 현대자동차와는 무관하다는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가능치 않았을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말하는 기업경쟁력이란, 한때 요리사가 되고 싶었던 한 남자가 화장실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며 만들어낸 값싼 노동이다.

상원 씨의 꿈, 그리고 걱정

상원 씨는 여전히 꿈꾼다. 식당을 열어 한 달에 한두 번 가게 문을 닫고 동네 어르신들 모셔놓고 밥 한 끼 드리는 것이 그의 꿈이란다. 어쩌면 정규직 전환보다 더 바라는 꿈. 그러나 지금은 송전탑 위 두 사람에게 밥 한 끼 마음 편히 못 해주는 형편이다.

"병승이 형하고 의봉이한테 해주고 싶어도 안 되니까. 철탑이란 공간이 답답하잖아요. 감옥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진짜 맛있는 고기 그런 거 해주고 싶은데… 몸이 안 좋다니까. 육류 많이 먹다 보면 안 좋아지잖아요. 못 올려주니까 진짜 미안하더라고요. 눈물이 쭉쭉 나는데 그땐 쪽팔린 것도 없었어요. 너무 미안하고 서럽더라고요."

눈물이 많다는 그는 서러워 쪽팔린 것 없이 운다. 요즘 그를 눈물짓게 하는 걱정이 하나 늘었는데,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앞에 가 있는 동료들이다. 5월 21일 오늘로, 송전탑 고공농성 216일, 현대 본사 앞 농성 30일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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