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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중동 평화 전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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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중동 평화 전망 <4>

美, 이란 전복 위해 집요한 공작

바로 그런 상황에서 1979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 시스템의 한 축이 무너진 것입니다. 이란이 민족자결주의의 손아귀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카터 행정부는 즉각적으로 샤 체제를 복구시키기 위해서 군사 쿠데타를 지원하려 했습니다. 카터는 나토의 한 고위 장성을 보냈지만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이란 군부 내에서 미국의 동맹세력을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죠.

남아있던 나머지 두 축이었던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즉각 미국에 가담했습니다. 쿠데타를 유도하기 위해 언제나 써먹는 구태의연한 방식인 이란 내 무기 반입을 시작한 것이죠. 무기 반입 사실과 그 목적은 즉각 폭로되었지만 곧 은폐됐습니다. 더 이상 은폐가 불가능해졌을 때에야 몇면 단편적 사실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지요. 이렇게 되자 미국 정부는 그 사건을 “인질 구출을 위한 무기거래 ”(arms for hostage deal)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그 거래가 비록 “실수”였다 하더라도 아주 멋들어진 인도주의적 거래인 것처럼 들렸습니다. 레이건 행정부는 레바논에 억류되어 있던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 할수없이 무기를 거래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것은 미국이 무기를 이란에-정확히 말하자면 이란 내의 특정한 군사집단이 되겠죠-보낸 것이었습니다. 무기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지원을 받아, 이란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이스라엘을 거쳐 반입됐습니다. 그것은 결코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거래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이유로 말입니다. 인질이란 애초에 없었으니까요. 레바논에서 첫 인질이 발생한 것은 이 거래 이후의 일입니다. 하필이면 그 인질들은 이란인들이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정상적인 군사 작전 과정이었습니다.

***이란 회교혁명-미 중동정책에 균열**

만약 여러분 중 누구라도 외교관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리고 민간 정부를 전복하는 방법을 알기를 원한다면, 아주 간단한 답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교과 과정 어디에선가 가르쳐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가르칠 필요도 없는 것인긴 합니다만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민간정부를 전복하길 원한다면, 누가 그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군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군부와 연관을 맺고, 그들에게 자금을 대주고, 그들을 훈련시키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로 하여금 정부를 전복해야 한다고 설득시키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성공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 방법이며, 대개는 성공합니다. 인도네시아와 칠레는 그런 일이 제대로 들어맞은 최근의 두 사례입니다. 그 과정에서 살해당한 인도네시아의 수십만 국민들이나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칠레의 희생자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것을 노렸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된 일이지요. 따라서 이와 똑같은 정책을 이란에서 시도했던 것은 전적으로 합리적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위 이스라엘 관리들은, 주미 이스라엘 대사인 모쉬 아렌스를 포함해서,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미국의 언론에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발언은 금세 은폐됐지요. 샤 체제 하의 이란에서 사실상 주이란 이스라엘 대사을 했던 유리 루브라니라는 사람은 BBC 다큐멘터리에서 만약 우리가 거리의 시위대 수천명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쏴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면, 아마도 과거 샤와의 협약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 정보기관의 전직 고위 관리들은 이에 대해 “글쎄,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일을 진행시키는 자연스러운 방법인 것처럼 보이네요”라고 답했습니다. 그게 바로 군사력이 하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인질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우리 미국인들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란 정부는 이러한 음모를 알아냈고,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군부의 일부 세력과 접촉한 사실을 발견했으며, 그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국면이 오게 됐습니다. 그것은 올리버 노쓰 국면인데 아마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첫 번째 단계의 연장일 뿐입니다. 이런 가정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실제로도 그래 보이는데요, “인질 구출을 위한 무기거래”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은, 첫 번째 국면을 사실상 은폐시킨 것과 더불어, 아주 타당하고 당연한 것입니다.

동시에, 미국은 이라크의 이란 침공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즉, 미국의 친구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는 것을 돕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랍국가가 아니라 독립적인 석유 생산국이었지만, 어쨌거나 독립적 국가가 탄생하는 재앙을 뒤바꾸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담의 이라크도 미국이 마음을 놓기에는 독립적 국가였지만, 그보다는 중동 지역에서 미 정책의 가장 확고한 주축 중에 하나였던 이란을 잃는다는 것이 너무나 뼈아팠기 때문입니다. 이란은 미국에 대해서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25년 전에 독립을 향한 움직임의 시도를 차단했던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던 미국을 거스르는 범죄였습니다. 그런 종류의 불복종은 절대로 용인돼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의 “신뢰도”가 위협받기 때문이지요.

***이란-콘트라의 핵심은 이란정부 전복**

자, 이 사건은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됩니다. 미국은 매우 진지하게 이라크의 이란 침공을 지원했습니다. 이는 사담 후세인의 극악무도한 만행을 지원하는 차원을 훨씬 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군함을 보내 걸프지역을 순찰시켰는데 이는 이란이 이라크의 석유 선적을 차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는 곧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얼마나 열심히 도왔는가는 이라크가 미 국적 선박을 공격, 37명의 선원을 살해하고도 미국의 보복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나라는 이스라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의 보복을 완전히 면할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1967년에 그랬고, 이라크는 1987년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 외에는 다른 사례는 없습니다. 이는 당시 미국과 이라크간 협력의 깊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결의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1988년에는 미 구축함 US 빈쎈스호가 이란 민간항공기인 이란항공 654기를 격추시켜 2백90명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이란의 영공에서요. 사실 이 구축함은 이란 영해 내에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란은 이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미국이 사담 후세인의 승리를 위해 갈 데까지 갈 준비가 되어있다고 결론지었고, 그래서 그 시점에서 조건부 항복을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사소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에서는 사소한 사건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만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용어의 정의상, 강대국은 도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으며 절대로 범죄를 저지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팬암 103기의 폭파가 이 사건에 대한 보복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이는 저의 추측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서방측 정보기관들은 사건 직후 이 사건은 이란항공 654기 격추에 대한 이란의 보복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저는 이 추론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리비아의 범행이라는 증거는 매우 불충분합니다. 미국과 영국이 이 사건의 국제법정 심리에 동의한 이후(리비아는 수년전에 중립적 장소에서의 심리를 제안했었습니다),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벌어진 희한한 사법심리는, 그 문제를 가까이 추적했던 사람들에게는 의심만 증폭시킬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공공의 토론에 부쳐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도 했겠죠. 예를 들면, 유엔 안전보장의사회 결의 1192(1998년)에 따라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지명한 국제 감독관이 작성한 “네덜란드의 로커비 재판에 관한 보고서”는 완전히 은폐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됐던 것 같습니다. 한 달 전쯤 공개된 이 보고서는 로커비 재판 과정에 대한 날카로운 비난 그 자체였습니다. 혹자는 만약 그가 미국과 영국의 공식적인 입장을 그대로 따랐더라면 아마도 이 보고서는 서방측 신문들의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란이 팬암103기를 폭파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범행을 부인했을 겁니다. 미 CIA의 상투적 수법인 “그럴 듯한 부인”(plausible denial)과 같은 것이지요. 또 CIA가 지난 1985년 베이루트에서 회교사원 앞에서 차량 폭탄을 터뜨려 80명이 죽고 수십명의 사람들이 부상을 당한 극악무도한 테러를 했을 때처럼 외부 요원을 이용했겠죠. 어쩌면 이란은 리비아 요원을 골랐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추측입니다. 우리는 결코 진실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질문을 할 만한 적절한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불복종 용납 못해**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예외로 남아있습니다. 1958년에 이라크는 스스로 미국 주도하의 체제에서 이탈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외적 사태였으며, 다른 면에서도 예외적이었습니다. 이라크는, 그 정권이 아무리 극악무도할지라도, 자국의 자원을 국내 발전을 위해서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이라크에서는 실질적인 사회적 경제적 발전이 일어났는데 이는 미국이 중동에 구축해 놓은 체제가 돌아가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부는 서방으로 흘러 들어가야 하는데 누수가 생긴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과 이라크간에는 복잡하고 예외적인 관계가 늘 수반되었습니다. 지금 그것을 살펴볼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끝났습니다. 전쟁과 특히 경제제재의 효과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이라크의 독자성을 역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라크가 미국 주도하의 국제 체제로 재편입하는 것이 허용될 때쯤이면, 아마 그렇게 되겠죠, 자국의 자원을 자국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는 심각한 위험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살아남아서 부분적이라도 회복하게 되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이 문제는 아마도 조만간에 끝날 것입니다. 혹자는 그게 경제제재의 목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경제제재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든 사태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인권옹호에 대한 우리의 공약은 도대체 어떻게 됐는가? 중동의 다양한 행위자에게 주어진 인권은 어떠한가? 그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권리는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만큼만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강대국의 정의상 당연히 권리를 갖습니다. 영국은 미국의 충성스러운 경비견일 경우에 한해 권리를 갖습니다. 아랍의 대리정권들은 자신들의 부를 서방으로 보내고, 자국민들을 잘 통제하는 만큼 권리를 가지며. 현지순찰 중인 경찰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만큼 권리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어떻습니까? 그들에게는 부가 없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따라서 국가경영의 기본 원칙에 의해서, 그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죠. 그것은 2 + 2=4만큼이나 분명합니다. 사실 팔레스타인들은 마이너스의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무소유와 고통이 세계 여러 곳에서 현 체제에 대한 저항과 반대를 불러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권리는 영(零)이 아니라 마이너스로 계산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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