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280km 떨어진 산타클라라는 쿠바혁명 과정에서 체 게바라의 거친 숨결이 배인 도시다. 1959년 1월 2일 카스트로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 바로 58년 12월말 체 게바라 사령관이 이끄는 혁명군의 산타클라라 전투 승리였다. 인구 20만쯤의 도시인 그곳에는 10미터 높이의 혁명 기념탑과 아울러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체 게바라 동상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건축물들은 지난 1987년 체 게바라 사망 20주년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해지기 바로 직전 무렵. M-1 소총을 오른손에 든 채 전진하는 모습을 취한 게바라의 동상이 긴 그림자를 끌고 서 있다. 게바라 동상 바로 밑 지하에 만들어진 무덤 안에는 게바라를 비롯, 38구의 ‘혁명열사’ 시신들이 잠들어 있다. 그 가운데는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싸우다 죽은 17명의 게릴라 시신이 묻혀 있다.
볼리비아 정부군은 그 시신들을 몰래 빼돌려 비밀장소에 파묻었지만, 30년만인 1997년 다시 파내져 쿠바 산타클라라로 옮겨졌다. 여기에는 이 연재 3회 때 살펴본 볼리비아 3형제 가운데 두 사람, ‘코코’(본명은 로베르토 페레도, 1938-1967년)와 볼리비아 군 포위망에서 벗어나 수도 라파스에서 무너진 조직을 정비하던 중 사살됐던 ‘인티’(본명은 귀도 알바로 페레도, 1937-1969년), 게바라가 볼리비아 정황을 살필 겸 선발대로 미리 보냈던 유대인 출신의 아르헨티나 여성 타니아(본명은 하이데 분케, 1937-1967)도 함께 잠들어 있다. 안내원들의 설명은 친절했지만, 사진은 찍지 못하도록 막았다.
***“혁명 성공의 조건은 도덕성과 민중지지”**
이사벨 모날(65)은 오랫동안 쿠바의 유네스코 대표를 지낸 쿠바의 진보적 지식인으로 좌파 사상지 <마프크스 아호라>의 편집인이다. “피델 카스트로를 지도자로, 체 게바라를 사령관으로 한 반정부 혁명군은 사실상 병력 머릿수에서나 무장수준에서나 바티스타 정부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쿠바 동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한 혁명군은 그러나 정부군보다 훨씬 강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높은 도덕성과 쿠바 민중의 지지였다. 부패하고 사기가 떨어진 정부군은 우수한 무기(이를테면 미국이 대준 전투기)들을 지녔음에도 혁명군에게 졌다. 마치 모택동의 중국공산당 군대가, 미국으로부터 지원 받은 우수한 무기를 지녔지만 부패했던 장개석 국민당 군대를 깨뜨린 것과 비슷한 상황이 쿠바에서 연출됐다“
이어지는 이사벨 모날의 얘기. “체 게바라는 일찍부터 민중의 힘이 조직화되면 정치사회적 변혁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1954년 그가 과테말라에 머물고 있을 때 하코보 아르벤즈 정권이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는 것을 보았을 때도 그런 생각을 품었다. 그때 과테말라의 아르벤즈 대통령은 미국의 다국적 농업기업인 유나이티드 후르트(United Fruit Company)가 갖고 있던 대토지들을 국유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 회사의 간부들과 미 CIA는 과테말라 군부를 움직여 아르벤즈 정권을 엎어버렸다. 과테말라에서 멕시코로 옮겨온 게바라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 뒤 쿠바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무장봉기에 뛰어든 것은 자연스런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혁명이 무슨 뜻인지 게바라에게 배웠다”**
사령관 시절의 체 게바라는 함께 싸우는 전사들에게 흐트러짐이 없는 엄격한 자세를 요구했다. 그 무렵 체 게바라가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는 혁명가로서의 강철의지(iron will)와 규율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래서 규율을 어긴 자들에겐 심한 벌을 내렸고, 몇몇을 처형하기도 했다. 그는 전투를 잘 할 수 있도록 강한 신체단련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길 주문했다.
일부 전사들에게는 그런 주문이 무리였을 것이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간지대의 농부 출신으로 총을 들고 혁명군으로 싸웠던 베니그노(본명은 다니엘 알라르콘, 1939년생)는 쿠바 정부 쪽에서 제작한 한 다큐멘타리 필름에서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긴 바 있다(그는 1966년 말부터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 무장게릴라 투쟁을 벌이다 극적으로 살아남아 1968년 3월 쿠바로 돌아온 3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바티스타 정부군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지역의 혁명군 근거지 가까이 사는 주민들 집을 불태우거나 죽였다. 주민들이 카스트로 혁명군에 협조한다고 트집을 잡았다. 나의 여자친구도 그렇게 죽는 걸 보고 나는 산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는 글자도 쓸 줄 몰랐다. 혁명(Revolution)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나에게 바티스타 친미독재 정권을 무너뜨려야 쿠바 민중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혁명의식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 뒤 나는 그를 따라 볼리비아로 가 투쟁을 했다”
이념무장을 중요시하는 게바라의 태도는 볼리비아 게릴라 시절에서도 이어졌다. 이 연재 제3회 ‘체 게바라의 혁명 근거지’ 편에서 살펴보았듯,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폈던 볼리비아인 형제 ‘코코’와 ‘인티’의 동생이 오스발도 페레도(65, 볼리비아 산타 쿠르즈 시의원)다. 볼리비아 군 포위망에서 벗어나 수도 라파스에서 무너진 조직을 정비하던 중 사살됐던 형 인티로부터 라파스 지하 은거지에서 들었던 얘기는 다음과 같다.
“게바라는 험한 산을 오르내리면서도 그의 배낭 속에 넣어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우리 동료 게릴라들과 함께 학습 토론하는 시간을 갖곤 했다. 우리는 아울러 볼리비아의 역사와 지리, 정치상황, 현지 인디오들의 언어인 케추아를 공부했다. 수준에 따라 3개 반으로 나눠, 수학을 배우도록 했다. 아울러 게바라는 원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런 학습을 통해 우리는 혁명전사로서의 자세를 가다듬어 갔다”
***모택동 투쟁전략에 관심 기울여**
59년 1월 3일 아바나에 닿은 체 게바라는 아바나 시내를 내려다보는 라 카바나 요새를 접수, 사령부를 차렸다. 게바라가 요새에 도착했을 때, 전에 그곳에 주둔중이다 혁명군에 항복한 바티스타 정부군 3천명이 도열한 채로 게바라를 맞이했다. 게바라는 그들을 (미국에 빌붙은 바티스타 정권 아래서 군인으로 근무했기에) ‘신식민지 군대’(neocolonial army)라고 비판하면서도 그들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 게릴라들에게 어떻게 행진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우리 게릴라들은 어떻게 싸우는지를 가르쳐 주겠다”(존 리 앤더슨, ‘체 게바라, 한 혁명적 삶’ 1997년판)
쿠바혁명 성공 뒤로 게바라는 쿠바를 기지로 삼아 남미와 아프리카에 혁명을 수출하는 데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다. 카스트로를 비롯한 게바라의 혁명동지들은 쿠바 내부문제 처리가 현안이었다. 게바라와는 생각이 달랐다. 1965년 4월 비밀리에 콩고로 향할 무렵 게바라가 남긴 메모엔 이렇게 적혀있다. “나의 특이한 입장은 급작스레 나를 (한 나라의 장관에서)한 사람의 병사(soldier)이자 전략가로 만들었다”
콩고는 개혁적 좌파 지식인 패트리스 루뭄바를 군사 쿠데타로 사살한 모부투 세코 장군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는 전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벨기에와 미 CIA가 뒤에서 부추긴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었다. 체 게바라는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머물며 로렌트 카빌라의 콩고 반군들을 훈련시켰다(카빌라는 그로부터 32년 뒤인 1997년 이웃 르완다의 군사적 지원 아래 모부투 독재정권을 쓰러뜨리고 권력을 잡았다가 지난 2001년 암살됐다). 그 무렵 게바라의 행적을 둘러싸고 온갖 소문이 나돌았으나, 카스트로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만이 게바라의 거취를 꿰고 있었다. 66년 11월 바리엔토스 장군의 친미 군부독재정권이 들어선 볼리비아의 안데스산맥 기슭 낭카와수 강변을 혁명기지로 삼아 남미혁명을 꿈꾸며 쿠바를 떠날 때도 게바라는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다.
쿠바 산악지대에서 지역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그들을 훈련 무장시켜 정부군을 패퇴시킨 경험은 체 게바라로 하여금 마오쩌뚱의 전술전략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혁명은 안락의자에 앉아 전술전략을 논하는 사람들을 패배시켰다. 우리는 농업혁명(대토지소유자로부터 경작지를 몰수,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는 혁명)을 일으켜 농촌을 변화시키고, 그런 다음 도시에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오스카 솔라, 페르난도 가르시아 공저, ‘체 게바라-한 혁명가의 이미지들’ 2000년판).
***“혁명조건 성숙되길 기다릴 필요 없다”**
볼리비아 산타 쿠르즈 국립대학에서 만났던 로헤르 뚜에로 교수(정치학)의 평가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도시보다는 농촌을 중시하는 게바라의 혁명전술론은 그의 정치적 경향이 사회주의 모국임을 내세우던 옛소련보다는 중국에 기울어있다는 해석을 낳아왔다(실제로 게바라는 여러 차례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당국 비위를 건드렸다. 이를테면, “소련이 말로만 국제사회주의 형제애를 내세우지, 실제로는 개발도상국들에게 무역호혜와 원조에서 실질적으로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비판 따위다). 볼리비아 공산당수 마리오 몬헤가 지도력을 둘러싼 이견대립으로 게바라와의 협조를 거부하면서 해댄 비난이 “게바라는 (소련이 사회주의 맹주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모택동주의 분파주의자”였다.
체 게바라는 말했다. “민중의 힘은 정부군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혁명을 이루기에 가장 적당한 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민중봉기는 그런 조건들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가 겨우 몇백명의 군대를 이끌고 산타클라라로 진격했을 때 그런 말은 옳았다. 그러나 겨우 50명의 무장세력(쿠바인 18명, 페루인 3명, 볼리비아인 29명)으로 미 특수부대 교관이 훈련시킨 볼리비아 정부군을 상대로 벌인 군사적 모험은 끝내 그의 죽음을 불렀다.
필자 이메일: [email protected]
사진설명(@김재명)
1. 10미터 높이의 체 게바라 청동상과 기념비(산타 클라라)
2. 게바라는 340명의 혁명군을 이끌고 산타 클라라에서 정부군이 탄 무장열차를 습격, 항복을 받아냈다.
3. 산타 클라라 지역은 쿠바 학생들의 수학여행 필수 코스다.
4. 체 게바라가 혁명군 사령관으로서 아바나를 접수했을 때 머물렀던 라 카바나 요새. 아바나 시내를 굽어보는 군사적 요충지다.
5. 1967년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투쟁하다 게바라와 함께 사망한 무장 게릴라들(아바나 혁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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