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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왜 BBC가 못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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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왜 BBC가 못 되나 [이봉수의 미디어 동서횡단] '수신료 공방'의 맹점들
<BBC>의 기라성 같은 방송인들 중에서도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얼굴은 아마 데이비드 아텐버러(David Attenborough)일 것이다. 평생을 동식물 다큐멘터리 내레이터로 활약하면서, 세렝게티 평원 같은 대자연과 쫓고 쫓기는 동물의 생존 투쟁을 전세계의 안방과 거실로 끌어들이고, 동식물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엿보게 해준 일등 공로자이다. 여러 달, 때로는 여러 해 걸려 만든 걸작들을 비스듬히 누워 감상하면서 시청자들은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의 황제보다 더 행복할 수 있었다.
▲ 다큐멘터리 내레이터로 평생을 바쳐 <BBC>의 명성을 높인 데이비드 아텐버러의 젊은 시절과 근래의 사진 (비망록 표지). 여든인 올해에도 현장에서 뛰는 방송인이다.

영국에 살 때 <BBC> 매니아가 됐지만, <BBC>와 한국의 방송들을 모니터링 하다 보면 부러움과 아쉬움이 교차할 때가 많다. <BBC>가 객관성과 공정성 등 방송이 추구해야 할 규범들을 잘 실천하면서도 속보성과 흥미를 잃지 않는 비결은 무엇일까? 무엇이 <BBC>를 세계 공영방송의 표준으로 만들었을까? 이런 의문을 갖다가 가끔 "바로 이거다" 하고 무릎을 칠 때가 있다.

공영경쟁에 기여하는 영국의 상업방송

필자의 모니터링 일지에 따르면 2005년 11월 21일의 일이다. 무심코 TV를 켰더니 앞서 소개한 아텐버러가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담에 응하고 있었다. '덤불 속의 생명'(Life in the Undergrowth)이라는 새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제작과정의 에피소드 같은 것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다큐멘터리 시리즈 방영을 앞두고 <BBC>가 그것을 선전하는 대담프로를 편성한 것이겠거니 했다. 나중에서야 알고 놀란 것은 그 대담프로가 <BBC>가 아니라 <ITV>에 의해 제작-방영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상업방송인 <ITV>가 경쟁사인 <BBC>의 프로그램을 선전하다니…… 방송이 끝날 때쯤에는 "어느 날 몇 시부터 <BBC>가 이 시리즈를 방영한다"는 자막까지 넣어주는 게 아닌가.

<ITV> 쪽은 '영국 국민이 이런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자신들의 공영성을 높이는 길'이라고 판단했음직하다. 이런 '페어플레이'는 영국의 방송체제가 기본적으로 '상업경쟁'보다는 '공영경쟁'에 뿌리를 두고 성장해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BBC>는 영국에서 송출하는 TV방송만도 2개의 아날로그 겸용 채널과 8개의 디지털 채널이 있다. 상업방송인 <ITV> 등에 대해서는 규제기구(ITC)를 두는 한편, 독립 프러덕션 회사들이 제작한 프로그램을 일정 부분 방영하게 하는 등 공영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들을 두고 있다. <채널4>도 상업방송이지만, 설립 허가 당시에 다양한 소수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도록 의무화 하는 등 공영성을 추구해왔다.

우리나라 공영방송의 과도한 '상업경쟁'은 첫째, 이런 방송체제의 미비점들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 '월드컵 올인'이나 드라마와 코미디 등 오락프로그램의 과잉편성 현상은 공영방송 체제를 도입한 나라치고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형식적으로는 세 채널(KBS1,2와 MBC, EBS를 포함하면 네 채널) 공영체제를 갖추고 있는 우리 방송이 실질적으로는 상업주의 경쟁에 내맡겨져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국에서는 1956년에 <ITV>를 허가할 때 광고를 허용하면서도 공익에 봉사하도록 규정한 것은 상업방송이 공영방송을 상업주의 경쟁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입술이 망가지면 이가 시릴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그런 맥락에서 상업적 공영방송인 <MBC>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도 <MBC>는 <KBS>와 '공영경쟁'을 하기보다는 <SBS>와 '상업경쟁'에 주력함으로써 전체 방송의 공영성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 월드컵 때 <MBC>는 뉴스데스크를 거의 잠식하고 <SBS>조차 압도하는 '싹쓸이 편성'으로 비판을 받았다. 지금 수신료 인상을 둘러싸고 공영성 문제가 거론되고 있지만, <KBS> 내부에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영방송 지킨 보수당 내 전통주의자들

둘째, 영국의 공영방송 체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확립된 정당정치와 시민의식 등 정치사회적 환경이다. 사실 <BBC>도 영국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와 언론학자, 그리고 일부 보수언론의 끈질긴 공격에 시달려왔다. 방송 진출을 노리던 루퍼트 머독 소유의 <더 타임스>는 1985년 1월 사흘 연속 내보낸 사설에서 <BBC>의 수신료를 동결하는 한편 광고를 도입하고 방송면허를 공개입찰에 부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당시 대처 정부가 영국의 공영방송체제를 허물려고 시도하자 그것을 막는 데 공헌한 세력 또한 보수당내 전통주의자들이었다.

<BBC>는 보수당으로부터 '좌편향' 소리를 들었으나 노동당 집권기에도 엄격한 감시자 구실을 다했다. 블레어 정부가 이라크전쟁을 비판하는 <BBC>를 뒤흔들고 그렉 다이크 사장을 쫓아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영국의 시민의식은 85% 안팎의 지지율로 <BBC>의 손을 들어줬고, 블레어는 끝내 권좌에서 축출됐다. 이런 고양된 시민의식은 물론 <BBC>의 활발한 담론활동에 힘입은 바 클터이다.
▲ <KBS> 홈페이지(7월 6일). <KBS>는 공영방송이면서도 드라마와 코미디 등 오락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시청률 경쟁을 한다.

셋째, <BBC>가 정치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방송이 된 것은 TV 한 대에 연간 135.5파운드(약 25만원)나 되는 거액의 수신료 덕분이다. 우리가 연간 3만원이니 무려 8배가 넘는다. 게다가 물가에 연동돼 매년 수신료가 인상되고, 체납되면 1000파운드의 벌금과 형사처벌까지 감수해야 한다. 수신료에 대한 저항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만한 돈을 내면서도 국민이 공영방송체제를 지지하는 것은 그 이상의 공익서비스를 되돌려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신료, 올려도 대폭 올려야

그런 점에서 26년 만에 1500원을 올리겠다고 하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된다. 수신료를 올려도 대폭 올려야 하고 지속적 인상시스템을 갖춰야 공영방송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수신료 문제는 수준 높은 방송 서비스를 제공 받는 대가로 치르는 소비지출이라고 생각해야 풀린다. 예컨대 현재 EBS에 넘겨지는 수신료는 연간 150억 원에 불과한데, 이를 대폭 올린다면 전국민의 허리를 휘게 하는 사교육비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최고의 강사진을 모셔와서 강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하고 그 범위 안에서 수능시험 등을 출제하게 한다면 지금 지출하고 있는 사교육비를 몇 십 분의 일로 줄일 수 있을 터이다. 추가채널이 확보되면 같은 과목을 여러 등급의 모듈로 나누어 강의함으로써 고교 평준화의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도 있으리라. 실제로 <BBC2>와 위성방송 채널은 질 높은 교육방송을 하고 있다. 우리로 말하면 방송대학인 개방대학(Open University)은 일류 교수진을 확보해 수준 높은 방송강좌를 함으로써 영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KBS>가 지금까지 말한 식의 논리만 편다면, 이번 수신료 인상안조차 국회 통과가 힘들 것으로 보인다. <KBS> 스스로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공영성 확립을 약속하는 일이다. 우선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고 실천해야 한다. 얼마 전 탄핵 사태가 터졌을 때, <KBS>와 <MBC>의 일부 노조와 직능단체, 몇몇 진보적 언론학자와 시민언론운동단체까지 '중립'의 가치를 "기계적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탄핵이 '민의에 대한 의회 쿠데타'일지라도, 그 보도가 현저히 중립성을 잃어버린다면 공영방송의 토대를 스스로 허무는 일이 되고 만다. 뒤집어 말하면 다수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 보수파의 폭거일지라도 소수의견만큼의 대접은 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우리 방송은 그런 중립의 가치를 소홀히 해왔기 때문에 집권자가 방송을 통치와 정권재창출의 도구로 삼으려 했던 불행한 역사가 있다. "방송 때문에 선거에 졌다"는 울분이 남게 되는 한,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라 '국민분열의 쐐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가며 집권해온 서구에서 정치적 중립과 공정성은 공영방송의 존립근거이고 철칙이다. 언론은 자본으로부터 독립이 쉽지 않기 때문에 한 나라의 언론 지형도는 보수편향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언론의 중립성은 좌파의 노력으로 쟁취된 가치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진보세력'이 언론의 중립성을 매도하는 수준에 있다. 공영방송을 중립지대에 묶어두지 않고, 정권이 바뀌면 방송도 내줄 것인가? 현행 제도는 사장 선임권을 사실상 집권자의 손 안에 들어가게 했다.

"집권당 압력을 거부해 온 게 <BBC> 역사"

<BBC>의 편집 가이드라인은 의견의 다양성과 공정성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표준을 꼼꼼하게 만들어 두었다. 요약하면 '정치적 쟁점은 반드시 정확하고 공평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2003년 4월 이라크전쟁과 관련한 '언론보도의 공정성과 국익' 논쟁이 뜨거웠을 때 <BBC> 사장 다이크는 필자가 공부하고 있던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의 심포지엄에서 공정성과 중립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집권당은 언제든 그들 노선을 지지해 주도록 압력을 넣었으나 이를 거부해 온 게 <BBC>의 역사"라는 거였다. 사실 다이크는 처음에 이라크 참전을 지지했다. 그러나 사장도 어쩔 수 없는 <BBC> 가이드라인이 공정보도를 이끌었다.
▲ <BBC 뉴스24> 홈페이지. 테러단체에 납치됐다가 114일만에 석방된 특파원 알란 존스톤이 석방된 뒤 기쁨에 겨워하고 있다. <BBC>는 150명의 국제부 기자와 특파원을 두고 전세계를 커버한다.

<KBS>는 제도와 실천, 양면에서 아직 국민들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라크파병이나 한미FTA와 관련해서도 독립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몇 주 전에는 난데없이 '한미FTA 타결은 10년간 230억 달러 수출효과'라는 일방적 정부 광고가 전파를 타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실망을 안겨주었다.

두 번째 주요과제는 자체구조조정이다.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고 있는 <KBS> 한 간부는 "구조조정도 많이 했고, 보수도 <MBC>의 80% 수준"이라며 "좋은 방송 만들려면 봉급 많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필자에게 반문했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돈을 낼 서민들은 더 혹독한 구조조정을 기대하고 있다.

<BBC>는 3일 발표한 연례보고서에서 '6,500명을 잘라냈고, 수신료 수입과 공적 서비스 지출이 각각 5%씩 늘어났다'고 밝혔다. <BBC>의 구조조정은 인원감축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력을 재배치하고 직무교육을 강화해 '노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데도 주안점을 둔다. 소수인종과 장애인은 채용뿐 아니라 승진과정에서도 형평성이 보장되도록 제도화했다.

정치와 자본으로부터 중립성 확보할 기회

물론 정치사회적 환경이 다르고 방송지역도 협소한 한국이 영국의 공영방송체제를 금과옥조로 삼을 필요는 없을 터이다. 영국에서도 머독이 위성방송(BSkyB)에 진출하면서 상업경쟁이 치열해지는 등 영국의 공영방송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임스 커런 등이 집필한 <책임 없는 권력>(Power without Responsibility) 속에는 영국의 공영방송들도 포함돼 있다.

또 우리 공영방송 종사자들의 실력이나 열정이 그들에 뒤진다는 증거도 없다. 탐사보도나 토론 프로를 늘려 한국사회의 의제들을 끌고 나간 공적도 인정해야 한다. '생로병사의 비밀'(KBS)과 같은 다큐멘터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들이 능력을 꽃피울 수 있고 시청자들이 질 높은 공영방송을 즐길 수 있는 여건조성이 이번 수신료 인상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공적을 내세우기보다는 과오를 탓하고, 정치적 중립성 확보를 과시할 수 있는 '살신성인의 획기적 조처'를 기대해 본다. 정치로부터 중립성을 강화함으로써 자본으로부터 독립성까지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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