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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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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다산 칼럼]<23>

기미 생(己未生). 1919년 3·1만세운동 때 태어나신 내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내게 전화를 거신다. 얼마 전 어머니는 내게 "너도 이제 그만큼 늙었으니, 민주니 독재니 하는 이번 싸움 판에는 끼어들지 않을 수 없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90이 훨씬 넘은 노인이 70을 넘긴 아들을 보고 애가 타서 하는 소리다. 30여 년에 걸친 군사독재의 악몽이 얼마나 진하게 여태까지 남아 있으면 저런 말씀을 하실까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등 따습고 배부른 게 제일이라고, 제발 나서지 않으면 안되냐고 그렇게 노심초사하시던 어머니를 나는 무척도 속을 많이 썩여드렸다. 수배에, 투옥에 못된 자식 때문에 30여 년 잠 한숨 편히 자보지 못하신 내 어머니시다. 그런데 이번 대선판이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이요, 그 이후가 또한 민주 대 반민주의 싸움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비록 연세높고 또 시골에 계셔도, 살아오신 경륜과 육감으로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낌새를 다 헤아리고 계신 것 같다.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 전 나는 1975년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1975년에 사형을 당한 바우 김용원 선생의 아들로부터 과분한 저녁 대접을 받았다. 지난봄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있었던 그의 아버지 묘소 이장 때 새로 세운 묘비의 글을 내가 썼다고 각별히 초대해 준 것이다. 우선 반듯하게 자라준 것만 해도 대견하고 고마운데 이런 대접까지 받으니 김용원 선생에게 황송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짓고 청민(淸民)오병철 선생이 쓴 그 비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암장(暗漿)으로 살다가/ 활화산의 뜨거운 분출을 미룬 채 갔으니 분하다/ 그러나 그는 조국의 산하에 의로움으로 남아/ 그의 사랑은 사람마다의 가슴 속에 꽃으로 피어날 것이요/ 그의 생각과 열정은 겨레의 숨결로 살아날 것이다."

40의 나이에 사법살인으로 세상을 떠난 김용원 선생과 그 가족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아리고 시리다. 그는 군대를 갔다 온 나이가 많은 선배로, 나는 그가 대학생활을 하면서 많은 회의와 궁극적인 질문들을 부여안고 고뇌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또한 5·16쿠데타로 감옥에 들어간 친구, 이수병의 옥바라지를 아무런 불평 없이 했다. 오히려 그가 자신의 친구인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 결국, 그는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와 한날한시에 죽었다.

교사 특별전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우수교사로 5년째 경기여고에 재직 중이던 1974년 4월 1일, 영장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지 1년 하고 8일 만에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 1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가족면회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의 핵심인물로 구속되었던 유인태에 의하면 죽기 하루 전 그는 다음날 자신이 처형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고 한다. 운동 시간에 그가 유인태에게 수갑이 미제로 바뀌었다면서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기도 전인 4월 8일 새벽 3시에 이미 군법회의 검찰부에 사형선고 통지가 접수되었고, 정작 4월 9일 새벽 4시부터 사형을 집행한 구치소에는 그날 오후 3시에야 사형선고 통지가 왔다는 것이다.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기도 전에 사형선고가 통지되고, 사형선고 통지가 오기도 전에 사형이 집행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바로 사형을 집행하라는 대통령 박정희의 명령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증언이 있다.(국정원 진실위 보고서)

그로부터 32년이 지나, 이들은 20여 회에 걸친 재심공판을 거쳐, 2007년 1월 마침내 전원이 무죄의 선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인혁당 사건에는 1975년의 판결과 2007년의 판결, 두 개가 있다고 마지막까지 우기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9월 24일 마지못해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면서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했다. 이것이 그가 행한 사과의 전부다.

1974년 지학순 주교는 그의 옥중 메시지에서 "화해는 진실과의 화해이어야 하고 전제를 일삼아온 강자가 억압에 찌들은 약자에게 먼저 청해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화해와 용서를 말하려면 먼저 진실고백과 사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한 번도 진심에 찬 사죄와 용서를 빈 적이 없다. 감히 이걸로 어떻게 국민통합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이대로라면 역사는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는 후퇴할 것이며 국민통합은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다. 이 나라 지도자가 일차적으로 지녀야 할 최고의 가치는 뭐니뭐니해도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신념과 실천의지다. 어떻게 하든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야 하고, 그것이 후퇴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용서할 수는 있으나 잊을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잊으면 똑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되고 결코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은 「사상계」 1958년 8월호에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쳤다. 이번 대선과 관련해서도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깨우침이라고 생각한다. 그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 다산연구소가 발행하는 <다산 포럼()> 12월 18일자에 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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