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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5000 귀족노조? 그 돈 받아나 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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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5000 귀족노조? 그 돈 받아나 봤으면…" [자동차로 흘러들어온 사람들]<3> 현대차 울산공장 해고자 정진영 씨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가 송전탑 고공농성에 들어간 지 200일 넘었다.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도 노숙농성이 진행 중이다. 그 또한 한 달 째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화'. 길게는 이 문제로 10년을 싸웠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그들의 요구가 현실적인지 아닌지, 그들이 이기적인 집단인지 아닌지를 떠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해온 개개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들이 왜 싸우는지, 대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인지, 아니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들이기에 이러는지.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제각기 걸어온 길을 따라가는 이 글은, 총 6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필자 주


자동차로 흘러들어온 사람들
<1> "지가 싸움은 못해도 불의는 못 참거든요"
<2> "평생 '정몽구 하청' 일만 했는데 마지막은…"

노무사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는 해고자다.

"모르고 당하는 게 너무 많아요."

진영 씨는 말한다. 법을 공부하며 그가 몰랐구나 한탄한 것 중 하나는, 해고 예고 기간. 법은 고용주가 노동자를 해고할 시 30일 전에 해고를 예고하도록 정해 두었다.

"저 같은 경우는 그날 출근하니 "당신 일자리 없다 나가라". 생산대수가 적어지면 공정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공정 없어지면 같이 있던 정규직들은 다른 공정으로 가고, 비정규직들은 다 잘리는 거예요. 자를 때 다 잘라버리고, 필요하면 전화해서 찾아서 다시 불러오고."

이게 무슨 파리 목숨인가 싶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개 목숨'이었다. 이런 대접을 꿈꾼 것이 아니었다. 미래가 창창하다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고향은 대구였다. 전문대를 다니다 편입을 준비했다. 항공기계과를 가고 싶었다. 공부 안 하면 더울 때 더운 데서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해야 한다기에, 공부를 하고 싶었다. 뒤늦게 공부에 재미도 붙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 가정을 꾸려야 했다.

"공부를 손 놓기가 상당히 힘들었어요. 나중을 생각하면, 힘들어도 지금 고생을 해서 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심하게 했어요. 술도 마시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고민했다. 아내와 많이 대화했고, 현실을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편입준비를 멈추고 일자리를 구했다. 그런데 현실이라는 게 그리 만만치 않았다. 99년이었다. 그러니까 IMF 외환위기가 한국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그때였다.

"97년 전까지만 해도 취업은 원하면 다들 가능했어요."

사정이 달라졌다. 일자리 자체가 귀했다. 구하는 곳이라고는 파견직 아니면 임시직이었다. 그러다 울산으로 왔다. 현대자동차에 자리가 있다고 했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지회

세가 빠지게 기술 배우고 일 배우고 했는데

협력업체인데, 현대자동차 공장 안에서 일한다고 했다. 뭐지? 싶었다.

"처음에 설명 들을 때는, 청소만 간단히 하고 정규직 필요한 물품만 옮겨주면 된다. '아, 그래서 정규자리가 아니구나' 했는데, 막상 와서 한두 달 일해 보니까 라인을 타야 되고 기계를 돌려야 하고."

업체 사람은 한 번씩 와서 얼굴만 보이고 갔다. 하는 이야기라고는 월급 언제 나올 거다, 그 정도밖에 없었다. 정규직들 사이에서 정규직이랑 똑같이 일했다.

"정규직하고 똑같이 먹고 일하고, 회식 가면 같이 가고. 그때는 비정규직하고 정규직하고 나이 격차가 많았어요. 형들이 보통 마흔 가까이 된 나이들이라 동생이라 생각하고 많이 챙겨줬어요. 비정규직 그런 거 크게 생각 안 하고. 업체라고 해봤자, 가공 라인에는 나 혼자 밖에 없으니까."

일 년 넘게 그리 일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자리가 없어졌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의 자리 주인은 산재를 당한 정규직이었다. 정규직 직원이 휴직한 사이 일할 임시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없었다.

"그 사람 들어오니 내가 있을 이유가 없다, 이거지. 1년 반 동안 세가 빠지게 기술 배우고 일 배우고 했는데, 사람 오니까 '가라' 하는 거죠. 어이가 없잖아요."

2002년 말이었다. 그는 공정을 옮겼다. 조립공정으로 가 7년을 일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하루아침에 나가라 통보가 떨어졌다. 공정이 바뀌고 생산대수가 줄어 그가 일한 공정이 사라진 것이다. 공정에 딸린 하청업체 사람들이 해고됐다.

"하도 억울해가지고 일주일 동안 회사를 계속 나갔어요."

고민을 너무 해, 입도 돌아갔다. 그는 이제는 너무 알려져 뻔한 소리가 되어 버린, 해고가 곧 살인이라는 말을 체감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막막하거든요. 못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절망하는 거죠. '내가 왜 그랬을까'부터 시작해서 잘못이 어디 있을까 자기 나름대로 분석하고 찾고, 그러면서 자책이 심해지는 거고. 다른 데 가서 무슨 일을 할까. 자신감도 없어지고."

자동차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사람이, 몸이 자동차 공장 시스템에 다 맞춰진 사람이 다른 곳에서 일할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억울했다.

아무도 자신에게 손을 건네지 않았다. 노동부에 전화했지만 방법이 없다고만 했다. 나중에 노무사 공부를 하다 보니 방도가 없었던 것만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의 퇴직 날짜는 사실과 다르게 기재되었고, 업체는 후에 이름을 바꾸어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몰랐다.

"노동부도 방법이 없다는데 어째요. 순진하게 그걸 받았죠."

무조건 출근을 하던 그 일주일 동안, 그는 정규직 노동조합 대의원을 찾아다녔다. 자기만 잘린 게 아니었다. 업체 사람들이 다 해고됐다.

"당시에는 순진하게 좀 막아달라고, 같이 근무를 했으니 좀 막아달라고 (공정) 담당 대의원한테 부탁을 했죠. 그런데 대의원이라는 사람이 우리 (업체) 식구들 다 나갈 때, 자기는 월차 쓰고 아예 회사 안 나왔어요. 내가 일주일 동안 담당 대의원 붙잡으려 했어요. 결국 못 만났어요. 하청 일은 자기 일 아니라고 신경을 안 쓰는 거죠."

그는 정규직이 자신들을 총알받이로 생각했다 말한다.

"우리는 조합에 가입을 했든 안 했든 우리가 총알받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현대차에서 일하는 16.9%의 하청노동자들이 없으면 정규직 자리조차 위태롭다 정규직들끼리 공공연하게 말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바뀌었다. 그는 말한다. 일명 '개목숨'이라는 하청노동자 지위가 변했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하나둘 바뀌었다. 그러다 대대적인 변화를 맞은 계기는 2010년 현대자동차의 불법파견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었다.

"불법파견으로 고용된 최병승을 현대차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대법 판결 나오면서, 우리가 사람답게 인정받은 거예요. 정규직 노동조합 활동가조차도 비정규직을 대하는 태도가 그걸 기점으로 해서 크게 바뀌게 됐죠."

사내하청 노동조합은 끊임없이 불법파견을 주장했다. 하지만 관리자들은 "아냐, 도급이야"라고 했다. 그러면서 뒤로는 업체 변경 시 고용승계를 철저하게 막으며 어떤 노동자도 2년 이상 일한 기록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불법파견이 드러날 때를 대비한 게였다.

"그때는 힘이 없으니까 도급이야, 그래도 그런 가 보다 한 거죠."

실은 불법파견이었고, 정규직 채용이 되었어야 하는 이들이라는 판정이 나온 후 작업장 분위기는 달라졌다.

"크게 달라졌더라고요. 아르바이트생인데도 대접을 해주더라고요."

해고가 된 이후, 특근 때 아르바이트생 신분으로 현대자동차 일을 한 적이 있다 했다.

"어떤 대접이요?"
"속된 말로, '야, 임마 점마' 하지 않고. 사람 대우 안 하고, 막 부려 먹는 식으로 함부로 하지 않는 거요."

처음에는 초면인데도 '이 새끼 저 새끼'를 찾았다.

"만연하니까 그냥 적응하고 사는 거죠. 노동조합 만들어지고 서서히 싸우면서 바뀌게 된 거예요."

대법원 판결은, 10여 년 노동조합 활동의 결과였다. 회사는 일단 자르고 보자던 해고를 이제 부담스러워 했다. 해고를 시켰더니, 해고자들이 싸운다. 법으로 소송을 하고 구제신청을 했다. 노동조합은 사람 함부로 자르면 안 된다는 것을, 오랜 싸움으로 보여준 게였다.

"지금도 조합 가입 안 한 사람은 대부분 소리소문없이 잘려요."

해고가 된 그도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가장 현실적인 일

처음 대학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구할 때, 그는 아내와 현실적으로 생각하자고 했다. 나는 의문을 가졌다. 이게 현실적인가? 이렇게 용역들 무릎이나 마주하며 길거리에 주저앉아 있는 이 상황이?

"이게 가장 현실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싸우는 게 가장 현실적일 수밖에 없어요. 현실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바뀌지 않는 그런 현실이잖아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 사회는 바뀌지 않잖아요."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입사 초에는 한 달에 605시간까지 일했다. 605시간을 채우려면 24시간 철야를 4번 하고도, 저녁에 들어가 다음 날 아침에서야 나오는 반 철야까지 그만큼 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온 기본급이 147만 원. 굉장히 잘 받은 편이라고 했다.

"상여금 안 나오는 달에 140만 원정도 받으려면, 죽어라 뛰는 거예요. 그러면 몸이 녹초가 되요. 어쩔 수 없이 뛰는 거죠."

죽도록 일했다. 그랬더니 들리는 소리가 연봉 5000만 원 받는다고 귀족이란다.

"그 돈 받고 잘렸다면 억울하지 라도 않게요. 진짜 열심히 일했는데도 4000만 원을 못 넘겨봤어요. 3500만 원을 못 넘겼어요. 진짜 그 돈 받은 사람이 있다면 만나자 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받는지 이야기라도 들어보게."

반장에 조장에 15년 근속에 주 7일로 잔업 특근 다 하면 그 돈이 나오려나. 그런데 과연 개목숨 하청노동자가 15년이나 한 업체에 출근할 수 있을까. 대체 이 세상은 뭔가 잘못됐다. 그는 싸우는 이유를 이리 말한다.

"가만있으면, 내 권리를 내가 포기하는 거잖아요. 현실이 내 권리를 포기하게 하는 현실이라면, 차라리 현실적으로 굴지 않는 게 현실적인 것 같아요."

물론 해고 투쟁은 힘들다. 생계라는 현실에 부딪힌다. 하지만 아직은 싸움을 멈추기 싫다.

"싸우다 보니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사회는 많이 부분 썩어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술 먹고 지나가면서 "개 같은 세상" 이러는데, 이건 술 먹고 말하는 그게 아니라 맨정신으로 쳐다보기에도 어지러운. 상식으로 도저히 통하지 않는 세상인 거 같아요."

부당하다. 현대자동차 입사를 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똑같이 일하는데, 아니 우리가 훨씬 더 힘든 일 어려운 일 하는데 왜 하인 대접일까? 월급은 왜 반 토막일까? 부당하다 생각했다.

"민주화 운동 했던 사람들이 민주화다, 이러면서 싸웠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부당한 것이 싫어 싸운 거겠고, 그걸 학자들이나 똑똑한 사람들이 민주화라고 이름 붙였겠죠. 우리 싸움도 작은 것부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 길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아 보이진 않는다. 같이 해고된 이들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니 "몇몇은 재입사에서 하청에 계속 근무하고 있어요. 한시 하청이라고 해가지고 3개월짜리 6개월짜리 자리가 있어요. 떠돌이 생활하는 거죠. 그러다 운 좋게 자리 나오면 정착하는 거고" 한다.

세상은 그에게 많은 길을 주지 않았다. 내 손으로 벌이를 하고 자식들 입에 음식을 넣어주어야 사람에게, 세상은 많은 길은 내주지 않는다. 죽도록 일하다 버려질 것인지, 죽도록 싸워 이길 것인가. 양 갈래 길 앞에 그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오늘로 울산 송전탑 고공농성 231일, 현대 본사 앞 농성 44일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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