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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이런 대접 받나…집에 정신 두고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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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이런 대접 받나…집에 정신 두고 와요" [자동차로 흘러들어온 사람들]<4>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박종평 씨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가 송전탑 고공농성에 들어간 지 200일 넘었다.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도 노숙농성이 진행 중이다. 그 또한 한 달 째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화'. 길게는 이 문제로 10년을 싸웠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그들의 요구가 현실적인지 아닌지, 그들이 이기적인 집단인지 아닌지를 떠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해온 개개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들이 왜 싸우는지, 대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인지, 아니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들이기에 이러는지.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제각기 걸어온 길을 따라가는 이 글은, 총 6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필자 주

자동차로 흘러들어온 사람들
<1> "지가 싸움은 못해도 불의는 못 참거든요"
<2> "평생 '정몽구 하청' 일만 했는데 마지막은…"
<3> "연봉 5000귀족노조? 그 돈 받아나 봤으면…"

이 사람, 말이 많다. 소풍 온 사람처럼 떠들썩했다. 별로 즐거울 것도 없는 자리이다.

"저는 심각하고 이런 거 싫어요. 즐기고 살고 싶어요."

그런데 저리 말하는 사람 얼굴에서 짜증을 본다. 웃는 사이사이 옅게 짜증이 묻어 있다. 짜증이 더 어울리는 공간이긴 하다. 현대본사 앞 농성장. 그래서일까, 가벼이 말을 할 때마다 그가 무언가를 참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리 종일 떠들면 안 힘드냐고 물었다. 실은 무엇을 그리 참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집에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아요. 농성장 올 때는 정신을 놔두고 와요. 정신을 놔두고 와야 내가 살 거 같아요."

무슨 말인지 알 듯하다. 주변으로 차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전경버스는 24시간 매연을 뿜어낸다. 가림막 하나 없이 수십 개의 눈 아래 있다. 그들 주변으로 용역들은 히죽거린다. 앉아만 있어도 몸은 지치고,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여기서 인간이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생각하면 미쳐버릴 거 같아요."

그가 참아내는 건, 현실이다. 토끼의 간처럼 정신은 아들이 있는 집에 두고 온다. 이 상황이 그래도 참을만해 지는 것은 아들 때문이다.

"애가 있으니까 참죠. 비겁해졌다, 나약해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쩌겠어요. 그게 당장 살아야 하는 내 인생이니. 내 인생에 무책임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무책임할 수 없는 그의 인생에는 아들이 있다. 서른을 갓 넘겼지만, 일찍 결혼해 아이가 꽤 크다. 아이 앞에서는 정신을 장착한다 하니, 어떤 아빠인지 궁금해졌다.

"친구 같은 아빠죠. 다정한 아빠가 되고 싶어요. 조용조용히. 일절 욕을 하지 않고. 실수로라도 하게 되면, 아이가 '아빠 욕했어?' 그래요. 그럼 '아, 미안' 이러고. 공부했느냐고 묻진 않아요. 나중에 할 때가 되면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어릴 적 그는 제법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다른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손재주가 많았어요. 아버지가 그걸 일절 못하게 했죠. 공상과학, 만들기, 조립 이런 거 좋아했거든요. 상을 타 왔는데 다 찢어버리고. 남자가 그런 거 하면 안 된다고. 지금은 자동차 만드는 거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슬슬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학교에 잘 가지 않았다. 돈을 벌고 싶었다.

"연말에는 양말 같은 것도 팔고 그랬죠. 교복을 입어야 해요. 얼굴이 착해보여야 해요. 항상 아르바이트하는 가난한 학생이라고 말해야 하고. 어찌 보면 앵벌이지요. 업그레이드 앵벌이. 애처로워 보여야 하고."

무엇을 하든 돈을 버는 것이 중요했다. "어릴 적에는 잘 못 살았어요." 그래서 물었다. 현대차에 와서는 잘 살았느냐고.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제공

"끝을 보고 싶어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현대차에 들어갔다. 전단지를 보고 전화를 거니, 면접 보러 오라고 했다. 별것 묻지도 않았다. '일할 수 있느냐?' 묻기에 '네'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입사를 했다. 하청노동자 시급이 2000원 수준이던 때였다. 상여금도 없었다. 조건이 그러니 사람들이 뜨내기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늘 사람이 부족했다. 누구나 들어와 일했고, 누구도 오래 버티질 못했다.

스물을 갓 넘긴 그는 관리자들과 멱살 잡고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처음 본 사람이 반말이고, 욕이었다. "나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 싸우다 잘렸다. 하청인생 따윈 뭔지 모르던 때였다.

"저쪽에 있는 사람들은 화장실 가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왜 전부 다 일하고 있지? 그런 생각도 많이 했고. 우리는 화장실 안 보내 주느냐고 따져 보기도 했고. 이런 회사가 있나 싶고. 언제는 누나 결혼식이 있어서 조퇴를 해야 되겠다고 얘길 하니까 조퇴를 안 시켜주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나갔죠. 반장이랑 싸우고. 내가 왜 이런 델 다녀야 하나 싶어서 나왔죠. 왜 이리 무시당하고 살아야 하나 싶어서."

그래도 돌아갔다. 싸우고 나오고 다시 들어가고, 그 반복이었다. 그에게는 책임질 어린 아들이 있었다. 때려치우고 싶다 하면서도 10년을 현대자동차에서 일했다.

"현대자동차가 싫어요. 치가 떨려요. 진짜 싫어요."

그 싫다는 자동차를 계속 다닌 것은 노동조합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반대하니까 더 해보고 싶었고, 솔직하게. 그런 게 있었던 거 같아요. 노동조합이 회사를 다니게 만들어 줬어요, 어떻게 보면 저는 공장 다니는 게 싫었거든요, 솔직하게.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저도 여기 없겠죠."

하지만 오기 때문만은 아니다.

"애를 낳고 여기 왔기 때문에 조합에 가입한 걸 수도요. 애가 없었으면 아무 생각도 없었겠죠. '저런 거 있어서 뭐 하겠노' 하고. 어쨌든 애가 있고 그러니까 저런 게 필요성이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질문을 바꿔야 할 듯하다. 현대차에 들어온 뒤로 잘 살았느냐는 물음보다는 아버지가 된 후 잘 살았느냐고 묻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애 낳고 눈물이란 걸 처음으로 흘러봤거든요. 애가 막 났을 때는 어릴 때니까 처음에는 이게 내 아인가 싶기도 하고. 100일 딱 되니까 애가 딱 꽂히더라고요. 그때 <오세암>이라는 만화영화를 보고 울었어요. 만화를 보고 처음으로 울어봤어요. 가만 있는데, 꼬마 애가 죽는 걸 보니 계속 눈물이 나는 거예요."

노동자가 되기 싫어 버티던 시절도 있었다. 두 손에 기름 묻히고 사는 일은 어쩐지 부끄러웠다. 노동자라 불리는 게 싫었다. 그런 그가 노동자로,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10년을 살고 있다.

"끝을 보고 싶어요. '우리가 이 정도의 성과를 내며 싸웠구나'라는 걸 보고 싶은 거겠죠. 왜냐면 우리는 싸울 줄만 알았지, 우리 힘으로 교섭해서 마무리 지은 적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온 기회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한 번쯤은 자동차에게 답을 받아 보자' 이거예요."

울산 현대차사내하청 노동조합의 전신인 비투위 때부터 지금까지 10년, 그 사이에 많은 싸움이 있었다. 싸웠기에 얻었다. 현대차 사내하청 기사에 달리는 악플들이 말하는 다른 중소업체 정규직보다 잘 받는 임금이라는 것마저 싸워 얻은 것이다. 시급 2000원 인생을 여기까지 끌어올렸다. 그럼에도 그를 아쉽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만한 것들이 있다.

현대차 불법파견 특별교섭이 재개된다고 한다. 교섭을 하여 합의안을 7인 모임(금속 1명·지부 3명·지회 3명)에서 다수 의결로 확정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졌다. 3지회가 동의하지 않는 일방적인 결정은 하지 않는다고 금속노조 위원장이 밝혔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싸움의 주체인 사내하청 지회가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모임 구성이다. 7인 모임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목줄을 잡고 있는 불법파견 문제의 최고 의결기구임에도 말이다.

현대차는 사장까지 나서 특별교섭 재개를 원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굳이 환영하는 이유는, 부담스러운 불법파견 투쟁을 이번 교섭으로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모든 사내하청의 정규직화'라는 사내하청 노동조합의 요구가 크게 수용되는 형태로 정리될 가능성이 보인다면, 이리 교섭을 환대할 이유가 없다.

지회도 교섭을 하든 무엇을 하든 해야 한다 여긴다. 오래 싸웠다. 그러나 이 교섭에서 지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해고자들은 공장 안 조합원들에게 우릴 잊지 말라고, 아니 이 싸움을 잊지 말라고 서울까지 올라왔다. 올라와 할 수 있는 것은 현대 본사 앞도 아닌 바로 옆 대형마트 후문을 지키고 앉은 것뿐이다. 교섭은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하자는 모양새인데, 교섭에서 사내하청 조합원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어 보인다.

내가 이 싸움의 주체인데, 현실에서 싸움은 나를 주체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층층이 숨 막히는 현실이 그러하다. 이런 상황에서 용역들 무릎을 보고 앉아 있으려니, 속은 하루에도 몇 번을 널뛴다. 그래서 아직 잘 싸우지 못한 것 같다고 한다. 답답한 속이다.

그럼에도 "뭐든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 게 있다면 뚫고 지나가겠다"라고 호언하기도 "아직 끝장을 못 봐서 계속 싸울 수밖에 없다" 다짐하기도 한다.

그런 마음으로 현대 본사 앞 농성장에서 40여 일을 보냈다. 해고되고 한 달 반을 집에만 있을 때,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는 그가 집에 가지 못했다.

"엄마 없는 것도 어떻게 보면 가슴 아픈 일인데, 애 입장에서 봤을 때. 근데 아빠라고 있는 게 집에도 안 들어가고 있고. 그런 생각 하고 이런저런 깊게 생각하면 너무 힘들고, 벗어나고 싶죠."

그래서 생각을 안 하려 한다. 정신은 집에 두고 온다. 즐기며 살고 싶다는, 현재만 생각하려 한다는 그가 지금 이 순간 즐거운지 의심이 갔다.

"즐거우니까 하죠, 안 즐거우면 안 하지 않겠어요? 당장 때려치웠겠죠."

무엇이 즐거울까. 알 것 같으면서 알 수 없다. 그야, 이들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많은 것들을 기대하며 싸우는 이유를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이들의 싸움이 오늘로 송전탑 고공농성 238일, 현대 본사 앞 농성 51일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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