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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마조히스트로 만드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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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마조히스트로 만드는 소설가 [프레시안 books]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
"세상이 나를 지겨워한다.
나 역시 세상이 지겹노라." (샤를 도를레앙)


마침내 공쿠르상 수상에 성공한 프랑스의 자타공인 '공공의 적' 소설가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정소미 옮김, 문학동네 펴냄)를 펼치면 바로 위의 인용구를 마주하게 된다. 순탄치 않은 그의 작가 인생과 작품 세계가 떠올라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저게 과연 자신의 삶에 대한 우회적인 절망의 표현인지 아니면 독자들에게 보내는 또 하나의 우엘벡 식의 삐딱한 구애의 손길인지 좀 헷갈린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 함께한 책인 <공공의 적들>(변광배 옮김, 프로네시스 펴냄)에서 엿보이는 인간 우엘벡은 공공의 적이라는 딱지가 어울리는 막돼먹은 망나니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방식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방법을 몰라서 번번이 망하고 마는 괴팍하고 예민한 남자아이에 가까워보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의 책은 항상 그의 삶과 닮아 있다. 직장 생활을 하던 이력이 반영된 <투쟁 영역의 확장>(용경식 옮김, 열린책들 펴냄), 히피였던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외조모와 살던 어린 시절이 반영된 <소립자>(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 전 유럽적 유명 인사가 된 자신의 처지를 주인공에 삐딱하게 투영한 <어느 섬의 가능성>(이상해 옮김, 열린책들 펴냄)이 그렇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 소설 <지도와 영토>에는 미셸 우엘벡 본인이 직접 등장한다.

재밌는 점은, 그의 소설이 그의 삶의 어떤 한 시기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의 소설은 그의 삶을 추격하여 따라잡고 있다. 처음에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회사원이었고 그 다음에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셀레브리티였고, 그 다음에는 미셸 우엘벡 자신이다.

이런 변화는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1인칭 시점의 서술 때문에 소설의 화자가 늘어놓는 지긋지긋한 이야기들은 우엘벡 본인의 이야기와 더 노골적으로 겹쳐졌고, 노골적인 자기 고백적 태도는 도대체 그의 다음 소설은 어떻게 될까 아니 그가 다음 소설을 쓸 수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자아냈다. 그러더니 이번 소설에서는 우엘벡 본인이 등장하여 심지어 살해당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아 올 것이 온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읽고 보니 단순하게 우엘벡 자신과 자신이 쓴 소설 사이의 거리가 0이 되었다고 보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일단 우엘벡은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다. 소설은 3인칭 시점으로 제드 마르탱이라는 한 예술가의 일생을 다룬다. 우엘벡은 중반부쯤에 등장해서 주인공과 친구가 될 뻔하다가 후반부가 시작하자마자 살해당한다. 아니 그때는 이미 살해당한 뒤로, 우엘벡은 난자당한 시체로 잠깐 등장한다.

이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언제나 프랑스 언론에 의해 난자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소설적으로 형상화한 것인가? 아무리 자신이 당대의 아이콘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직접 소설에 등장시키는 것은, 그것을 결심하는 작가의 뇌에서는 어떤 일련의 사고 과정이 발생한 것인가?

사실 내가 진짜 궁금한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자학과 나르시시즘, 야유와 자조가 뒤섞인 우엘벡의 우엘벡에 대한 묘사를 읽고 있자니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는 곡예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 떨어지지 말았으면, 나는 우엘벡 애호가로서 매 쪽마다 기도했다. 그래서 그의 줄타기는 성공했는가?

"20만 분의 1 지도, 특히 미슐랭 지도에서는 온 세상이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란자로테 섬 지도처럼 더 상세한 지도에서는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도에서 숙박 시설과 레저 인프라들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1:1 축척에서는 딱히 즐거울 게 없는 정상적인 세상이다. 그런데 거기서 더 확대하면 우리는 악몽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다시 말해, 살을 파먹는 진드기류, 사상균류, 기생충들을 구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섬의 가능성> 중)

줄타기의 성공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먼저 지도 이야기를 하겠다. 미슐랭 지도 작업을 통해서 성공적으로 데뷔하게 되는 책의 주인공 제드 마르탱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위의 구절을 떠올렸다. 우엘벡의 염세주의가 핵심적으로 녹아있는 아름다운 구절이라서 여러 번 읽고 발췌까지 해 둔 부분이다. 사실 그래서 <지도와 영토>에 미슐랭 지도 작업이 소재로 등장하는 것이 몹시 반가웠다. <지도와 영토>에서는 위의 구절을 다시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지도가 영토보다 흥미롭다."

▲ <지도와 영토>(미셸 우엘벡 지음, 정소미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반가운 것은 그 뿐이 아니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흥미를 끄는 현대 미술의 두 거장 데미안 허스트와 제프 쿤스가 등장하는 도입부, 소설로 쓰인 예술론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예술에 대한 성찰과 대화들…. 그리고 예술가보다는 유명 인사라는 말이 어울리는 당대 미술가의 모습과 또 그런 그들이 속한 돈과 허영심으로 넘쳐나는 업계의 풍경 또한 흥미롭고 또 교훈적이었다. 무엇이 '교훈'이었냐 하면, 그 화려한 예술계라는 것은 사실 예술과 아무 상관도 없으며 그러니 진정한 예술가는 명성을 얻거나 기껏해야 부자가 되며 결국 고독하게 혼자서 늙어죽게 된다는 점이다. 과연 절망적이고 지겨운, 지극히 우엘벡스러운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우엘벡은 이런 식의 절망적이고 지겨운 결론들을 반복해서, 엄청난 밀도와 강도로 표현하는데 대단히 뛰어난 작가다. 포기하기 직전과 포기하는 순간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절망적인 당대의 풍경과 사람들, 그것이 지금까지 우엘벡이 한결같은 자세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서구) 문명의 종말, 일인용 인스턴트 파스타의 소비자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는 고독한 도시 사람들, 사랑의 불가능함, 늙는다는 것의 괴로움.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꽤 피곤한, 종종 역겨운 일이다. 그래서 그가 쓴 책들을 모조리, 반복해서 읽는 나를 보며 마조히스트가 아닌가 의혹에 빠질 때도 있다. 물론 나는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내가 그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가 지금 시대의 퇴폐와 쇠멸의 리얼리티를 제대로 담아내는 흔치않은 작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지독하게도 서양적인, 유럽적인, 프랑스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의 풍경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그리스인들만의 유산이 아니듯이, 우엘벡 또한 프랑스인들만의 지역 특산품은 아니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당대의 유행과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하는데,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같은 유행을 따르는 지금, 전 세계인이 실시간으로 그것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번쩍이는 마트 가판대에서 삼성의 디지털 카메라, 2000년대 여행의 방식을 바꿔버린 저가 항공사까지, 거기엔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세계가 있다.

그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삶의 변화와, 그 변화가 바꾸어놓은 세계의 풍경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그런데 묘사의 집요함과 열정을 보면 그는 천성적으로 라이언에어나 삼성 디지털 카메라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 매혹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유명 인사들로 떠들썩한 파티와 오래된 난방기를 똑같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열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제드 마르탱을 전율하게 한 지도의 시선과 동일한 것이다.

"지도 속에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 기술적 이해와 모더니티의 본질이 동물적 삶의 본질과 한데 섞여 있다. 색깔과 구분되는 약호만 사용한 그림은 복잡하고 아름다웠으며, 완전무결한 명료함을 지니고 있었다." (<지도와 영토> 중)

어쩌면 우엘벡은 반복해서, 소설 쓰기를 통한 지도 그리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냐고? 소설 속 제드 마르탱의 마지막 인터뷰를 통해 추측해보자면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소. 단지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오."

"그렇다면 선생이 잘 본거요. 내 인생은 내리막을 걷고 있고, 나는 실망했으니까. 젊었을 때 바랐던 것들 중 이루어진 게 하나도 없소. 살면서 재미있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늘 힘에 부쳤고 안간힘을 써야 했지. 선물처럼 거저 얻은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제는 다 지긋지긋해. 지금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너무 큰 고통 없이, 중병에 걸리는 일도 거동이 불편해지는 일도 없이 끝나는 것뿐이요." (<지도와 영토> 중)

소설 속 등장인물인 우엘벡의 고백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고백은 새롭지 않다. 다만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그것은 긴장감의 상실이다. 여러 면에서 <지도와 영토>는 이전의 책에서 했던 이야기를 갱신하지 못하고 반복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래서인가 자전적 묘사에서도 자학에 가까운 엄격함보다는 자포자기적인 나르시시즘이 느껴진다. 또한 그의 또 하나의 장기인 멜로드라마적인 관계들의 직조는 전과 같이 깊은 슬픔이나 애절함을 낳지 못하고 종종 소설 자체를 변변찮은 아침 드라마의 세계로 인도하고 만다.

물론 이런 특성들에 단지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우엘벡의 소설 중 가장 접근성이 높다. 노골적인 섹스 장면도 없고, 신경을 거스르는 비난과 야유도 거의 사라졌다. 모든 것이 수위가 낮다. 거슬리는 것이 없으니 술술 읽히고, 예술에 대한 낮은 밀도의 통찰은 야심 없는 대중적 수필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즐거움을 준다. 아마도 그것이 이 소설이 공쿠르 상을 탈 수 있었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상이란 대게 멍청이가 만든 유행 타는 공산품이나 대가의 변변찮은 범작에 주어지는 법이니까.

그런데 이 소설이 이렇게까지 미지근해진 가장 핵심적인 이유를 굳이 꼽아보면 그건 욕망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된다. 즉, 이 소설에는 지금까지 우엘벡의 소설의 단골손님이자 문제적 요소였던, 예쁜 여자들을 향해 나하고 한 번만 자달라고 사정하는 남자가 빠져있다. 그들은 여자들의 엉덩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소란을 피우고, 술주정하고, 엉엉 울며 모두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처절한 면을 보여준다. 그들은 아직 삶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게 오직 섹스에 대한 애착이라는 게 문제지만, 아무튼 그렇다.

물론 우엘벡의 소설에 이런 인물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반대편에는 애착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무감하지만 매력적인, 절망했지만 통찰력 있는, 그래서 언제나 예쁘고 똑똑한 여자들이 주위를 서성거리는, 달관한 남자들이 있다. <소립자>와 같은 성공작에서는 이 두 종류의 남자들이 겹치고 충돌하면서 모순적이면서도 풍요로운 결들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지도와 영토>에는 후자의 남자들만 남아있다. 그래서 모순이 없고, 매끈하며, 그리고 지루하다. 하긴, 전자의 남자를 놓아야 했다면 그것은 분명 우엘벡의 자리였을 텐데, 아무리 우엘벡이라도 자기 자신을 그런 처절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꽤 힘들고 언짢은 일이었을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이번 소설에서 우엘벡이 줄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크게 실망하지는 않는데 우엘벡에겐 이미 놀라운 소설 <소립자>와 <어느 섬의 가능성> 사이에 시시한 범작인 <플랫폼>을 쓴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한 인간이 쓸 때마다 명작을 쓰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소설을 <소립자>에서 <어느 섬의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명작의 사이사이에 놓인 <투쟁영역의 확장>과 <플랫폼>를 잇는 별종 작가의 괴팍한 소품의 자리에 놓고 우엘벡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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