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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잘 될 거야!" 이젠 그 입 닥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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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잘 될 거야!" 이젠 그 입 닥치시지! [이권우의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긍정의 배신>·<배드 사이언스>
거칠지만 나름대로 철학을 분류하는 법이 있다. 모든 철학은 결국에는 주체와 세계의 갈등을 다룬다. 이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길로 갈라진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 하나는 갈등을 이겨내기 위해 주체를 변화하는 방법이다. 대체로 관념론과 종교가 여기에 든다. 다른 하나는 세계를 바꾸려 한다. 넓은 의미의 유물론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개인과 세계의 동시적, 또는 변증법적 변화를 꾀하는 철학도 있다. 그럼에도 두 갈래가 있기에 이런 철학도 나왔을 터이니, 표 나게 내세우지 않아도 될 터이다.

후기 구조주의가 득세할 적에 나는 이 이론이 세계의 변화를 포기한 철학이라 여겼다. 사르트르의 말을 비틀면, 본질이 실존보다 선행한다는 주장은, 결국 세계와 벌이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개인을 바꿀 수밖에 없다는 체념주의 속성이 짙다. 이런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은 듯하다. 후기 구조주의 이후 세계 차원에서 혁명이 일어난 바 없다. 혹 그런 조짐이 있었더라도 체제 내의 변화만을 목표로 했을 뿐이다.

후기 구조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동전의 양면처럼 세상을 지배해온 것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구조라는 이름의 본질이 앞서는 것과 시장을 그 모든 것보다 더 가치 있게 평가하는 것은 일종의 이란성 쌍둥이일 뿐이다. 후기 구조주의가 소비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쪽으로 흐르는 경향성이나, 마이클 샌델 식으로 표현하면 시장 경제가 시장 사회로 확장되는 것은 다르지 않다. 역시 대처는 정직했다. 사회는 없다고 강변하지 않았던가. 개인만이 남게 되고, 이럴 때 사회는 경쟁 논리에 치우치게 되었다. 지난 30년을 시장과 경쟁이라는 말로 정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긍정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부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떠할까? 여전히 개인과 경쟁만이 유효할까. 성급하게 아니라고 해도 될 정도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주체와 세계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세계의 변화에 방점을 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나 같은 책벌레도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닥치는 대로 읽은 책들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는데, 그게 한마디로 개인의 변화보다 세계의 개선에 방점을 두고 있다. 이런 느낌을 강하게 준 책 가운데 하나가 <긍정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이다. 미국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긍정적 사고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하고 있는 이 책에 대한 국내 반응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화제가 되었던 <피로 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와 함께 읽으면 좋다. 나는 주변에 농 삼아 발로 뛰어 쓴 <긍정의 배신>을 책상머리에 앉아 어렵게 쓰면 <피로 사회>가 된다고 말한다). 들리는 말로는 3만 부가 팔렸다니, 이 정도면 요즘 우리 출판 시장에서 대박이다. 책 내용은 워낙 잘 알려졌으니, 내가 주목한 내용만 추려 소개하면 이렇다.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쉽게, 분명하게 바꿀 방법은 없다. 적절한 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해, 혹은 더 인간적인 기업 정책을 요구하기 위해 사회 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평생 노력을 바쳐야 한다. 지금 당장 가능한 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뿐이다.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현실을 기껍게 받아들이고 아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업이 해고된 노동자들과 과로에 시달리며 아직 버티고 있는 직원들에게 주는 최대의 선물, 곧 긍정적 사고다.

(…) 부유하고, 성공을 거두고, 충분히 사랑받은 사람이라고 행복이 당연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행복한 환경이 필연적으로 행복이라는 결과를 낳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과 감정을 교정하는 내면으로의 여정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직면한 위협은 현실적이며, 자기 몰입에서 벗어나 세상 속에서 행동을 취해야만 없앨 수 있다. 제방을 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고, 치료제를 찾아내고, 긴급 구조 요원을 강화하자!"

인용한 앞부분은 개인의 변화를 통해 세계와 화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지난 3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는 세계 차원의 경제 위기와 양극화의 심화로 위기를 맞이했다. 뒷부분은 바로 세계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이제, 나를 바꾸려고 안달하지 말고 뜻있는 이들의 연대를 통해 세상을 바꾸자고 말한다. 다시 거칠게 말하면 구조주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다시 실존주의 시대로 우리는 돌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의 다른 말이니까 말이다.

▲ <배드 사이언스>(벤 골드에이커 지음, 강미경 옮김, 공존 펴냄). ⓒ공존
<배드 사이언스>(벤 골드에이커 지음, 강미경 옮김, 공존 펴냄)는 <긍정의 배신>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건강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세태를 보면, 오히려 더 많이 읽을 만한 책인데 말이다. 텔레비전을 켜면 건강 정보가 넘쳐난다. 뉴스에서 주부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까지 건강과 관련한 약품과 식품, 그리고 보조제를 소개한다. 여기에 홈쇼핑에서 흘러나오는 전문가의 목소리까지 덧붙이면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다.

영국의 의사인 저자는 과학으로 포장한 건강 관련 정보가 얼마나 그릇되었는지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고소도 당해 고초도 겪은 모양인데, 지은이는 명랑하고 쾌활하게 글을 쓴다. 읽다보면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 국내 언론에서 이런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친 적이 없는지라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 먹으면 어디에 좋다는 식의 말이 범람하는 시대에 저자는 뜻밖의 말을 한다.

"계층에 따라 이처럼 시대 수명이 크게 차이 나는 이유는 햄스테드 주민들이 영양요법사의 충고에 따라 셀레늄 결핍이 생기지 않도록 매일 구기자와 브라질산 호두를 한 움큼씩 챙겨 먹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식의 설명은 순전히 헛소리이자, 어떤 면에서는 영양요법사들이 벌이는 모든 사업이 지닌 가장 유해한 속성 가운데 하나다. 이는 매키스의 예에서 이미 여실히 드러났다. 또 이런 식의 설명은 건강이 나쁜 진짜 이유가 뭔지 헷갈리게 만들뿐더러, 좀 심하게 말하면 우익 개인주의 선언문이나 다름없다. 즉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고, 일찍 죽는 사람들한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무지하고 게을러서 죽음을 선택하지만 여러분은 삶과 싱싱한 생선과 올리브기름을 선택하므로 건강하다. 여러분은 여든까지 살 것이다. 여러분에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과 같지 않다.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 보면, 질병을 일으키는 사회적 원인과 생활양식 원인을 해결하는 진정한 공중보건 차원의 중재는 질리언 매키스나 텔레비전 방송 외주 제작가가 다룰 만한 것들에 비해 수익성 면에서나 볼거리 면에서 훨씬 떨어진다. 그러니 어느 황금 시간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거대 슈퍼마켓 체인들, 즉 언론에 등장하는 스타 영양요법사들과 엄청난 돈벌이 계약을 맺은 바로 그 회사들 때문에 생겨난 '식품 사막'을 자세히 보도하겠는가? 건강 불평등을 야기하는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과연 누가 텔레비전 화면에 보여주겠는가?"

건강 문제를 개인 차원으로 돌렸을 적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지은이의 주장은 상당히 의미 있다. 그것도 몰라 못 먹어 병든 것이 아니라, 병들 수밖에 없고 적절할 적에 치료받지 못해 병이 더 깊어진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 생각했던 건강도 알고 보면 사회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버락 오바마가 정치 생명을 걸고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의료 보험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지고 보면 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 체제가 문제야, 이 바보야 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우리는 체제나 구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몰락하면서 내는 파열음을 들으며 만시지탄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체와 세계의 갈등을 해소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반복하지만, 이는 우연히 집어 들어 읽어본 책들이 함께 동의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만큼 광범한 지지를 얻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된 건가? 앞으로 우리는 편안하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러지 않을 터이다. 세계의 변화는 주체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어느 책도 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이 교양의 한계인 모양이다. 분석만 하고 변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래서 드는 의문이 있다. 이러한데도 과연 세계를 바꿀 수 있는가 하고. 역시 나는 타고난 회의주의자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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