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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그>에서 <리니지>까지, 그 집단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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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갤러그>에서 <리니지>까지, 그 집단의 경험 ['87-'07, 일상의 혁명①] 어느 30대의 게임 편력기
지난 10일 한국 사회 곳곳에서는 20주년을 맞은 6월항쟁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시민의 혁명이자 정치적 혁명이었던 당시 항쟁은 형식적으로는 사회지배체제의 교체를 일구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87년의 의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후 한국 사회는 6월항쟁이라는 일시적 사건의 의미를 뛰어넘어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급속한 산업화시기를 거치면서 축적된 경제적 풍요로움은 대중문화의 확산을 불렀고 문화는 더욱 개방됐다. 자유주의 경향의 심화와 개인주의의 등장은 1987년 이전과 이후를 확연히 구분지었다.

이처럼 정치적 혁명 이후 나타난 '일상의 혁명'은 우리의 삶을 조금씩 그러나 빠르게 바꿨다. 정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대중들은 일상의 영역으로 빠르게 흡수됐고 일상은 대중문화에 의해 지배되는 양상을 보였다.

쉽지 않은 문제들도 함께 나타났다. 문화적 개인주의의 만개, 기술 발달로 이룬 '소통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의 파편화는 더욱 심해졌다. 표현의 자유, 문화 다양성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도 대중에 대한 본질적인 억압과 차별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

6월항쟁을 기념하며 각계각층에서 지난 20년간의 사회적 변화를 살펴보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정치·제도적인 변화와 성과는 활발히 논의되고 있지만, 정작 일상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 대한 성찰은 없다시피 하다.

<프레시안>과 문화사회연구소는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상의 혁명'이라는 주제로 87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가 겪었던 일상의 변화를 10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정치와 체제,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그림자에 갇혀 미처 감지하지 못했지만 어느 새 우리의 삶에 뚜렷한 자국을 남긴 '그 혁명'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변화의 본질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감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편집자>

어렸을 적 오락실은 금기의 장소였다. 어둡고 퀘퀘한 공간, 반짝이는 화면만이 명멸하던 공간, 뿌연 담배연기만이 공기를 데워주던 공간. 입장은 어른밖에 할 수 없었다. '출입금지'의 딱지는 오락실 입구에도 붙었고, 아이의 이마에도 새겨졌다. 그랬기 때문일까. 말썽꾸러기 아이들은 어떻게든 그곳에 가려고 발버둥쳤다. 동네 형을 대동하거나, 삼촌을 졸라서 오거나 등등, 아이들은 갖은 방법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대로 돌진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오락실 주인은 그때마다 입맛이 쓴 것인지 단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애매한 웃음만 지었다. 동네 개구쟁이의 열광과 동네 어머니의 성화를 동시에 들어야 했으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하지만 신세계에 홀딱 빠진 아이들의 물결을 어느 누가 막을 수 있었으랴. 그때부터였을까. 술래잡기와 다방구나 하던 아이들이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다. 놀자판 거리의 견고한 대오는 그렇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3S정책이 수놓은 80년대 대중문화 형성기에 성장기를 거치고 있었다. 총천연색 텔레비전, 전자오락, 만화가게, 프로스포츠… 아, 떡볶기집 비디오 상영방도 빼놓을 수 없구나. 이때부터 아이들의 '놀거리', 아니 '볼거리'는 무궁무진해졌다. 그들은 오후 5시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룩하게 했으며, 6시에 집으로 흩어져 만화영화에 빠져들었다. 아니면, 틈틈이 불온한 오락실로 발길을 돌렸다.

오락을 집단의 경험으로, <갤러그> 전성시대

처음에 등장한 것은 탁구를 본떠서 만든 <핑(Ping)>이었고, 다음에 등장한 것은 이른바 <방귀차(Rally-X)>였다. 성능이 뛰어난 적의 자동차를 물리칠 길은 방귀밖에 없었다. 미로 같은 도로를 잇달아 날렵하게 질주하며, 방귀를 쏠 때의 기쁨은 헤아리기 힘들었다. 게다가, '바바바바 밤바' 그전까지 듣기 힘들던 역동적인 효과음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과 귀를 순식간에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때는 1981년, <갤러그(Galaga)>가 탄생한 것이다. 전에도 슈팅게임은 있었다. <인베이더(Space Invader)>.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며, 많을 때는 느리게 적을 때는 빠르게 등, 고전적 슈팅게임의 원형을 이룬 게임이다. 그러나 화룡점정은 <갤러그>였다. 요즘 누리는 <스타크래프트(Star Craft)>의 인기는 저리가라였다. 심하게 말해서, 방방곡곡 오락실마다 80% 이상이 <갤러그>였다. 지금 보면 형편없는 그래픽이지만, 별들이 수놓는 배경에, '뿅뿅'거리던 소리와, 조금씩 상승하는 난이도 등등, <인베이더>의 단순한 세계를 뒤바꾼 혁명이었다. 당연히 아이들은 순식간에 <갤러그>로 헤쳐 모였다.
▲ <갤러그> 화면 ⓒ프레시안

어쩌면 '<갤러그>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오로지 <갤러그>만을 목표로 오락실로 집결했기 때문이다. 이후 동네골목의 권력판도는 바뀌었다. 딱지와 구슬의 전통은 쇠락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서열이 탄생했다. 그것은 <갤러그>의 점수였다. 서열의 근거가 물질의 껍질을 벗는 순간이었다. 뿐만인가. 새로운 경험의 공동체도 형성됐다. 빡빡히 늘어선 화면을 빼꼼히 쳐다보던 아이들의 시선들, 점수가 높아질수록 탄성을 지르던 목소리들, 오락의 경험은 집단의 경험이 됐다. 그때가 오락실의 첫번째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더불어 동일한 매체에 의한 동일한 경험의 공감대가 마련된 것 아니었을까. 삼삼오오 흩어졌던 대오는 다시 모였고, 역전의 용사들은 딱지 대신 '동전'을 말아 쥐었다. 80년대 한국은 본격 소비자본주의 시대를 준비했고, 동네 꼬마들도 동전을 들고 대열에 동참했다.

1987년, 거리에도 화면 속에도 장풍이 날아다니던 그때

<갤러그> 이후 전자오락은 중요한 문화적 경험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갤러그>만한 열풍은 되찾기 어려웠다. 그래픽 수준을 한층 높였던 <제비우스(Xebious)>, 아케이드 스포츠게임의 첫발을 디디며 숱한 진기명기를 연출했던 <올림픽>, 슈팅게임의 고전적 전통을 이었던 <1942>, 모험게임을 개척했던 닌텐도의 걸작 <슈퍼 마리오(Super Mario)>, 세가의 <원더보이(Wonder Boy)>, 틈만 나면 벌거벗고 뛰던 <마계촌> 등. 하지만 이들도 <갤러그>의 아성을 넘지는 못했다.

그래도 혁명은 여지없이 발생했다. 주역은 바로 <스트리트파이터(Street Fighter)>. 이 게임의 효과는 <갤러그>만큼은 아니었지만, 게임의 문법과 문화를 바꿀 정도의 혁신이었다. 우선, '대전액션게임' 장르를 새롭게 창조했다. 이 장르는 각종 플랫폼을 넘나들며 지금까지 확고한 영토를 구축했다. 당연히 아이들의 습속은 급격히 바뀌었다. 몇 점을 내느냐, 몇 판을 깨느냐? '이제는 안녕'이었다.

대전게임의 백미는 무엇보다 캐릭터의 독특한 기술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익히는 것이 급선무가 됐다. 그런데 이것이 또 간단치 않았다. 단순히 재빨리 누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단추가 6개로 대폭 늘어났고, 조종간을 활용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단추를 순서대로 연속해서 누르고, 조종간을 좌로 우로 돌리는 등, 슈팅게임의 단순한 방식을 일신했다. 아이들은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고자 마구잡이로 조종간을 흔들었지만, 정말 어려운 노릇이었다. 게임은 그렇게 점점 복잡해졌다. 그때가 1987년, 세상도 복잡했다. 거리에서 마치 장풍처럼 '꽃병'과 '지랄탄'이 날아다녔다.

'혼자서 하던 놀이'가 '대전'으로, <스트리트파이터 2>
▲ 전자오락의 두번째 전성기를 연 <스트리트파이터> ⓒ프레시안

혁명은 미완이었다. 대전체계가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시간문제. 1991년 <스트리트파이터 2>가 등장했다. 전보다 화려해진 그래픽,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 더욱 막강해진 기술이 나타났고 무엇보다 달라진 점은 사람과 겨룰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스트리트파이터 2>의 진정한 혁명이었다.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지금까지 전자오락은 혼자서 하는 놀이였다. 슈팅게임에서 대전게임으로 진화하면서, 적 캐릭터가 점차 사람의 꼴을 띠긴 했지만, 그래봤자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적수가 진짜 사람이 되자, 오락의 양상은 확연히 달라졌다. 그때의 긴장감은 단순한 기록경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누가 누군지 모른 채, 상위에 올라간 이름만 보고서, 전의를 불태우던 것과는 질이 달랐다. 이때부터 오락실은 혼자만의 고독한 모험의 공간이 아니었다. 모니터를 앞뒤로 세워둔 둘만의 격투장이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전통이 형성됐다. 대전게임 무림고수가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먼저 동네오락실을 주름잡고, 다른 동네를 평정하는 문화가 마련됐다. 당연히 고수들 이름이 동네마다 오르내렸고, 그들 간의 대전이 어떻게 될지 입소문이 돌았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설왕설래 말만 무성했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고립된 혁명이었다. 게임은 숱한 놀거리 가운데, 미관말석에 둥지를 틀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중요한 변화는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오렌지보이가 압구정동에 출몰했던 것은. 소비자본주의의 신호탄이 대한민국을 수놓았다. 돈이 곧 능력이자 매력이 되는 세상이 들이닥쳤고, 섹스와 상품의 논리가 세상과 담론을 물씬 달구었다. 하지만 가두에서 전경과 대학생이 진짜 쇠파이프로 대전하던 광경은 여전했고, 결국 누군가 맞아 죽었다. 자본의 욕망과 현실의 투쟁이 기묘하게 얽히던 시절이었다.

<삼국지3>, 나이 먹던 오락세대를 붙잡다

<갤러그>를 즐기며 오락을 접했던 세대도 나이를 먹었다. 온갖 눈을 끌어 당기는 게임이 속속 들어왔지만, 정작 그들의 발목을 잡아끌었던 것은 학교였다. 한국의 자랑인 무시무시한 입시교육의 올가미가 그들을 포획했다. 그들은 뺑뺑이 돌아서 중학교로, 연합고사를 치르며 고등학교로, 최고 경쟁률을 자랑하던 학력고사를 뚫고서 대학교로 입성했다. 물론 그들이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때 일명 '빨간 책'을 돌려 읽고, '빽판' 비디오를 보면서, 시시덕거리곤 했다. 당시에 유행했던 야구게임 <스타디움 히어로>를 하면서, 보충학습 시간에 친구들과 라면내기를 하곤 했으나, 전자오락과 그 또래세대는 서로 서로 멀어져갔다. 이제는 새로운 오락에 득달같이 달려가던 동네꼬마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물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뚫렸다. 컴퓨터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전에도 있었지만 워낙 비쌌기 때문에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랬던 컴퓨터가 마치 새마을운동을 하는 것처럼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대학교에도 혜택은 이어졌다. 처음에 컴퓨터는 전산실에만 있었지만, 곧이어 과실과 학생회실에도 보급됐다. 당연히 처음에 컴퓨터는 문건만 처리하는 기계였다. 단순하게 손을 대신한 장비였을 뿐이다.

하지만 발 빠른 인간들은 컴퓨터의 다른 쓰임새를 일치감치 알아챘다. <삼국지2>가 분위기를 잡더니만, 1993년 '주고받기' 방식 전략시뮬레이션게임의 걸작인 <삼국지3>가 드디어 출시됐다. <삼국지> 연작 가운데 1, 2위를 다툴 만큼, 지금까지 명성을 잃지 않는 게임이다. 삼국지의 거대한 서사를 기본에 깔고 원하는 장수를 선택해 경영・군사・외교 등, 인터페이스만 다를 뿐, 현실과 거의 유사한 경영기제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삼국지> 연작이 당장에 인기를 끈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씩 입소문을 타면서 하루가 다르게 퍼졌다. 학습준비를 한다느니, 문건을 쓴다느니, 공부 한번 해보겠다느니 별의 별 핑계를 대면서 학생회실의 새벽을 <삼국지 3>로 불 밝히는 인간들이 늘어갔다.

그것은 지금까지 봤던 전자오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전자오락의 능력은 오로지 '감각'에 근거했을 뿐이다. 슈팅게임을 할 때면 쏟아지는 폭탄을 피하는 동물적인 반사신경에 손가락 놀리는 속도가 중요했고, 대전게임을 할 때면 조종간과 단추를 적절히 조합해 사용하는 콤보기술의 숙련도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삼국지3>는 손가락을 빨리 놀릴 필요도, 기술적 숙련성을 기를 필요도 없었다. 대신에 '머리'를 써야 했다. 능력을 봐가며 캐릭터를 신중히 선택해야 했고, 그것에 따라 앞으로 수행할 계획을 짜야 했고, 적군의 전략을 내다봐야 했다. 그것은 감각을 달구는 '오락'이 아니라, 규칙에 따라 전략을 세우는 '게임'이었다. 게임의 수용은 손끝의 말초감각에서 두뇌 깊숙이 중추신경으로 확대됐다. 또 한번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말판놀이의 '주고받기' 방식을 본따 흥행한 전략게임들

<삼국지3>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학생회가 정화운동을 벌일 만큼 인기를 끌었던 바둑을 몰아내진 못했으나, 일은 안하고 놀기만 한다는 원성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야금야금 게임이 바둑의 지분을 빼앗기란 시간문제였다. 어느 선배는 <삼국지3>를 생산력 투쟁으로 정의하며 나름대로 의의를 설파했으나 동의를 얻기란 난망한 일이었다. 담배를 벅벅 피며 흑백모니터를 하릴 없이 뚫어져라 보던 광경은, 당시 여학우들의 속을 벅벅 뒤집을 만큼 흔했다. 달래도 보고 비난도 하고, 갖은 처방을 써봤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모종의 계기가 생겨 스스로 그만두기 전까지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아, 그때가 언제이던가. 뿌연 학생회 창문 바깥에 서슬 퍼렇게 부라리던 눈동자들이여.

어쨌든 이러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 등장한 이후, 게임의 생태계는 크게 바뀌었다. 유념할 것은 이때의 변화가 두 겹이라는 것이다. 게임매체의 증대와 게임장르의 확대. 전자는 앞서 지적대로 컴퓨터의 등장이고, 후자는 컴퓨터가 게임매체가 되면서 나타난 변화겠다. 전략게임은 후자의 첫 번째 변종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전략게임의 바탕은 장기 같은 말판놀이(board game)다. '주고받기' 방식의 구조를 고스란히 따랐기 때문이다. 더불어 <삼국지3>의 2차원 전투장면을 떠올려 보라. 말판에서 장기말이 주고 받으며 구역을 선점하는 것과 형태만 다를 뿐 결과는 별 다를 것이 없다. 물론 그럼에도 둘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전략게임은 구체적 서사를 갖고 있으며, 다음 캐릭터를 고유하게 육성할 수 있다. 장기에도 서사가 있겠지만, 내용이 완전히 닳아 없어진 탓에 서사의 '역할'은 하지 못하며 장기말 또한 고정되어 있다. 서사의 폭이 다른 만큼 재미의 질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갈 길 잃은 영혼'들이 게임의 세계로 몰입할 만한 조건은 충분했다

이런 바람을 타고서 전략게임은 점차 날개를 폈다. 도약의 계기는 <듄(Dune)2>가 이뤄냈다. 대략 199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프랭크 허버트의 과학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게임으로서, 최초로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real time starategy simulation games)을 실현했다. 이 역시 게임사를 기록할 만한 혁신일 것이다. 게임의 시간이 현실의 시간을 따라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의 의미는 초기 주고받기 방식의 <삼국지>와 비교하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주고받기 방식으로 진행하면, 거칠게 말해서 생각 따로 실행 따로 진행되는 까닭에 시간이 자연스럽게 지체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만으로 단점이라고 단정하긴 곤란하다. 처음에 마련된 구조에 따라 진행되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듄2>이 등장한 다음에 마치 커다란 구멍처럼 느껴졌다. 무엇인가 답답해진 것이다.

<듄2>은 현재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의 모든 면모를 드러냈다. 명확한 세계관에 따른 엄밀한 시공간구조, 개체와 건물 생산체계 확립, 개체 간의 궁합관계, 특히 중요한 것은 인터페이스일 것이다. 현재 <스타크래프트>의 영향 때문에 하단배치가 지배하고 있으나 당시까지 지배적 문법은 우측 배치가 기본이었다. 게다가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전투의 양상은 다른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실제 전쟁을 치르듯 개체 하나, 건물 하나 재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적에게 순식간에 박살나곤 했다. 장기 두는 것처럼 한 수, 두 수 생각하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설명은 얼마간 과장이 있긴 하지만 난위도가 높아갈수록 재빠른 선택과 신속한 대응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듄>은 생각보다 성공하지 못했다. 게임의 구조와 인터페이스가 너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에 불과했다.

웨스트우드는 <듄> 연작을 발표한 이후, <커맨드 앤 컨커(Command and Conquer)> 연작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게임은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 무엇언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듄>에서 이루지 못했던 게임자체의 완성도는 물론이요 대중의 열렬한 관심도 끌어냈기 때문이다. 웨스트우드는 일약 전략게임의 메카로 떠올랐다. 미국과 소련의 가상전쟁을 서사로 삼는 바람에 이데올로기의 편향이 심각해 '꼴불견'이긴 했지만, 게임에 영향을 미칠 만큼은 아니었다. 굉장히 얍삽해 보이는 대머리 '유리'의 캐릭터는 지금도 선하다. 그는 소련의 비밀 세뇌무기 담당자였는데, 희한하게도 <유리의 복수> 편이 제작될 정도로 두고두고 '사랑'을 받았다. 마치 <프리즌 브레이크>의 티백처럼 말이다.

또한 당시까지 신진 스튜디오였던 블리자드 또한 <워크래프트(War Craft)> 연작을 잇달아 발표하며 후일을 기약했다. <워크래프트 2>는 환상의 세계를 무대로 전개되는 게임으로서 <워크래프트3>로 이어졌고 <와우 온라인>의 초석을 다졌다. 두 게임 모두 원조 게임폐인을 양산했던 게임으로 유명했다. (글쓴이 역시 두 게임에 빠져들어 장장 4개월 동안 식음을 전폐한 전력이 있다. 이때의 소중한 경험을 밑거름 삼아 <스타크래프트>의 광풍을 온전히 피해 석사논문을 쓸 수 있었다.)

이처럼 고전적 전략게임을 주도한 두 스튜디오의 운명은 금방 갈렸다. 웨스트우드 스튜디오는 중간에 <타이베리안선>처럼 기대치를 한참 밑도는 게임을 제작하다가, 결국 안타깝게도 일렉트로닉 아츠에 흡수돼 버렸지만,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 연작 외에도 역할놀이게임인 <디아블로(Diablo)> 연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성공가도를 이어갔다. 일렉트로닉 아츠가 3차원으로 바꿔낸 <커맨드 앤 컨커 제네랄>을 발표하긴 했지만, 그것은 옛날의 <커맨드 앤 컨커>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실제 운명을 걸었던 전쟁은 정작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 바로 IMF 구제금융사태로 말미암아, 일반서민은 전에 없던 아노미를 겪으며 피 말리는 삶의 전쟁에 내몰리게 됐기 때문이다. 취직을 못하는 대학생, 일할 곳이 없는 성인들, 쓰러져가는 기업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당시에 갈 길 잃은 영혼들이 게임이 주는 환영의 세계로 몰입할 만한 조건은 충분했던 셈이다.

<스타크래프트>가 국민게임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스타크래프트>가 등장했다. 이 게임이 끼친 영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프레시안

그리고 <스타크래프트>가 등장했다. 이 게임이 끼친 영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최소한 한국에서 게임문화는 <스타크래프트> 이전과 이후가 갈라진다. <갤러그>가 오락실을 좌지우지하면서 슈팅의 게임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해도 그것은 오락실만의 혁명이었을 뿐이다. 반면 <스타크래프트>의 혁명은 게임을 훌쩍 넘어선 혁명이었다. 온갖 '폐인'을 양산하며 한국의 대중문화의 지형을 뒤흔들어 놓았다. 물론 이것은 <스타크래프트>만이 일구어낸 변화가 아니라 얼마간 축적된 결과이기도 했다.

<스타크래프트>의 성공은 무엇보다 네트워크 대전 때문이다. 기존의 전략게임처럼 시나리오를 따라서 한판 한판 깨는 것보다 사람과 직접 대전하는 재미가 훨씬 쏠쏠했다. 하지만 단지 재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게임문화 전체를 뒤흔든 요인으로 작동했다. 전에도 전략게임은 네트워크 대전기능은 있었다. 하지만 통신망의 조건도 나빴고 하는 방법이 수월치 않았다. 랜선을 이용해 1대1 대전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상황은 얼마 안 가 호전됐다. 인터넷이 자리 잡으며, 미지의 사람과 손쉽게 '놀' 만한 구조가 마련됐다. 예를 들면 <포트리스>는 간단한 인터페이스로 상대방과 대전할 수 있었다. 점심 먹고 한판, 식사 내기 한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손쉽게 빠져들었다. <스타크래프트>는 이런 결과가 집대성된 것이리라.

이후 숱한 사건이 나타났다. 게임제작사가 제작은 안하고 <스타크래프트>만 하다가 망했다느니, 논문은 안 쓰고 게임만 1년이라느니, 게임 때문에 연인들이 헤어진다느니… 온갖 문제들이 속출했다. 어떻게 평가하든 게임이 한국의 대중문화를 '지배하는 종'으로 태어난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했다. 동네아이들이 망까기 하듯 남녀노소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모습은 오래 전부터 전략게임을 했던 사람에게 굉장히 낯선 일이었다. 우선 전략게임은 다른 게임과 달리 익히기 쉽지 않다. 시간을 들여서 인터페이스를 '훈련'하지 않으면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규 유저가 접근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그런데 다른 계층은 말할 것도 없고 <테트리스> 빼놓고 게임은 생전 쳐다보지도 않던 여자친구들까지 단축키를 외워가며 손바닥에 굳은 살이 배기도록 마우스를 돌리기 시작한 것은 어지간히 신기했다. 이 정도라면 일종의 문화적 '언어'로서, 전무후무한 국민게임이 됐다고 해야겠다. 다양한 분석이 뒤따랐다. '종족 간 균형을 잘 분배했다', '저사양 컴퓨터에도 훌륭하게 돌아간다', '인터페이스가 쉬워졌다' 등 게임의 구조를 분석해 보기도 했고, '한국민족이 싸움을 좋아한다', '빨리빨리 근성이 게임에 딱 맞는다' 등 국민성을 따져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사항을 열거해도, 솔직히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전략'게임이므로 더군다나 사람 대 사람이 하는 두뇌싸움이니까 다양한 재미가 보장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게다가 <스타크래프트>만한 게임이 없지 않았다. 앞서 지적한 게임 외에도, <문명(Civilizations)>나 <에이지 오브 엄파이어(Age of Empires)> 등 <스타크래프트> 만큼은 아니지만 그것에 근접한 전략게임도 많았다. 또 차이가 있다고 해도 유독 한국에서 그렇게 성공할 만큼 중요한 차이였는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이후 <스타크래프트>가 한국에서 어떻게 진화했는지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점만 지적해 두자. 손끝의 말초신경에서 두뇌의 중추신경을 거쳐 집단의 집단경험에 이르게 됐다는 것. 현재 한국에서 <스타크래프트> 만큼 집단 소구력이 높은 '스포츠'를 찾긴 어려울 것이다. ('스포츠'로 명명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이긴 하지만….) 이러한 집단경험은 다중접속역할놀이게임에서 드디어 완성된다.

오락실에서 겨뤘던 역전의 용사들, 도전은 계속된다
▲ 다중접속역할놀이게임 <리니지> ⓒ프레시안

아쉽게도 글쓴이의 게임 편력기는 대략 여기서 끝난다. 그런데 다뤄야 마땅할 다중접속역할놀이게임이 빠졌다. (어디 그것뿐이랴. <둠> 같은 일인칭 슈팅게임도 빠졌고, <디아블로> 같은 역할놀이게임도 빠졌고, 온갖 다양한 콘솔게임도 빠졌다.) <바람의 나라>로 시작해 <리니지2>로 이어지는 한국형 다중접속역할놀이게임을 언급하지 않는다니,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인다. 세계만방에 한국형 게임을 알려냈고, 새로운 형식을 선도하는 게임을, 게다가 어느 나라보다 방대한 사용자를 자랑하며, 게임계의 '얼리어답터'로서 신천지를 개척하는 게임을 말이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끝이 없는' 게임은 게임처럼 느껴지질 않는다. '미션 클리어' 할만한 명확한 목표가 없는 것이 허전한 탓일까. 주변을 돌아보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롭게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통계를 보면 다중접속역할놀이게임에서 10대와 20대가 게임의 주류를 차지할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30대 사용자가 상당하다고 한다. 그 또래라면 대체로 앞서 적었던 경로를 겪었을 세대다. 심하게 말해서 오락과 한평생 같이 했던 그들이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을까. 그렇게 묻는 것은 우문일 것이다.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리라. 오락실에서 겨뤘던 역전의 용사들이 온라인에서 다시 만났다는 것, 그래서 집단의 경험을 새롭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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