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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다시 난장을 꿈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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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다시 난장을 꿈꿔라 ['87-'07, 일상의 혁명⑤] 6월 항쟁에서 월드컵까지
'완전 난장판이네.'

무질서와 혼란한 상황을 빗댄 말이다. 이 표현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정황이 전제되어 있다.

먼저 난장판은 다수의 대중이 취하는 집합행동을 의미한다. 또 난장판은 무질서와 혼란을 가리킨다. 즉, 기존 질서의 권위와 정상성의 관례가 흔들리거나 위협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난장판은 화자의 일정한 평가가 개입돼 있는 가치평가를 수반한다. 이처럼 난장판은 전적으로 무질서나 일탈로 볼 수만은 없다. '화자의 시선'이라고 하는 관찰자의 이데올로기를 문제삼게 되면, 난장판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집합행동이 되는 것이다.

생활에서 우러난 개방적 공간…한국 광장문화의 뿌리

원래 난장은 정해진 장날 이외에 새로운 시장을 내려 할 때 혹은 기존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행해졌다. 난장이 틀 때면, 마을 유지나 거상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잡기 위해 남사당패와 같은 놀이패에게 돈을 주고 며칠간 연희를 계속하게 했다. 난장을 트는 공간은 시장을 보러 온 사람들의 동선이 고려됐다. 각종 연희와 씨름과 같은 민속놀이를 구경하고 참여하는 대중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시장과 놀이가 유기적으로 결합됐다.
▲ 1974년 개봉한 영화 <남사당>의 한 장면 ⓒ프레시안

이로부터 볼거리의 제공을 통한 대중의 결집이라는 광장문화의 유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난장이 트고 볼거리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 공간을 현대적 의미에서 '광장'이라 부를 수 있다. 이때의 광장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생활동선에서 만들어진 개방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특성이 한국적 광장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 광장문화인 동제(洞祭)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에게 마을사람들의 무병과 풍년을 빌기 위해 드리는 공동제사를 말한다. 제사와 당굿에 이어 마을 공터에서 벌어진 대동놀이는 마을사람들의 연대의식을 고취시켰다.

신분과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살판'나는 신명을 벌였던 대동놀이로서의 광장문화 전통이 사라진 것은 조국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국민총동원체제를 구축했던 박정희 정권 때다. 권력의 정당성을 반공과 경제개발에서 찾으려 한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운동을 통한 노동규율사회를 구축하려 했다. 새마을운동을 통한 국민적 동원과 '잘살아보세'라는 개발이데올로기는 조국근대화의 필수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우리는 멍석을 깔아줘도 못 놀게 됐나

위로부터의 일방적 개혁정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농경생활문화로부터 습속화된 대중의 생활문화는 큰 걸림돌이 됐다. 자연력에 기초한 기존의 노동관행은 자본주의적 시간(가치측정의 기초)단위에 맞춰진 규율화된 새마을운동의 주체를 만드는 데 장애가 됐던 것이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조국근대화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시급해 척결해야 할 전근대적 유산'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정화작업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일상생활 가운데 전승됐던 수많은 민속문화들이 국가의 통제 속에서 관리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국가의 통제 속에서 민속문화들이 민중의 생활과 동떨어진 채, 단순히 보존되고 전시되는 박제화된 죽은 문화로 전락하게 됐다는 점이다. 일과 놀이의 분리과정을 통해 풍물굿, 노동요, 대동놀이는 전문예술인(명인)에 의한 기예로 바뀜과 동시에 '일놀이'라 부르던 노작연희(勞作演戱)의 전통은 소멸됐다.

대동놀이 역시 낭비의 전근대적 잔재로 규정되어 통제되긴 마찬가지였다. 광장문화는 삶과 놀이가 분리되는 과정 속에서 삶의 문화라는 총체성을 상실한 채 인위적으로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멍석'이 도리어 놀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후 멍석(광장)은 특별한 사람만이 밟을 수 있는 문화교양의 구별짓기로서 기능했다. "멍석을 깔아줘도 못 논다"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잊혀진 광장, 두 개의 모습으로 부활하다

사라진 혹은 망각된 광장문화의 부활은 조용히 다른 한편에서 왁자지껄하게 진행됐다. 그 요란함은 국가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전두환 정권은 권력의 취약한 정당성을 은폐하기 위해 폭력적 통제와 교묘한 의식조작을 뒤섞은 체계적인 문화정책을 구사했다. 하나의 방향을 강제하고 장려하는 의도적 육성정책과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탈을 통제하는 체계적 배제정책이 그것이다. 국가적 동원이 이루어진 광장문화는 제도적 지원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되고 운영됐다.
▲ 국풍81 당시 거리에 걸린 현수막 ⓒMBC

1980년 미스유니버스 대회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 수영복 차림의 카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길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운집은 정당한 군중행동이 됐다. '국풍81'과 1985년 '대학로 차 없는 거리'는 당시 청년세대들의 정치적 불만을 문화로 치환하려는 정권의 의도적 광장정책이었다.

한편 전두환 정권의 핵심 통치이데올로기였던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는 전 국민의 체육화 속에서 국민체조를 광장문화의 콘텐츠로 보급시켰다. 1982년을 기점으로 한 프로스포츠의 출범(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씨름) 역시 경기장문화라고 하는 스포츠광장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당시 해태타이거즈의 경기관람은 전라도 사람이 합법적으로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처럼 요란스런 광장문화의 국가적 동원은 민중문화운동에 대한 대대적 탄압 속에서 이뤄졌다. 때문에 민중문화운동은 조용히 그 나름의 광장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80년대의 민중문화운동은 조직적인 틀을 갖추면서 발전하게 되는데,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족미술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한두레, 연우무대, 현실과 발언, 두렁, 신명, 불림, 아리랑, 새벽, 그루터기, 민요연구회, 서울영화집단이 그것이다.

이들 단체들은 망각됐던 공동체의식을 되살릴 수 있는 형식으로서 공동체문화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공동체문화는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인 광장을 필요로 했지만, 정권의 폭압 속에서 합법적 공간의 확보는 불가능했다. 그로부터 차선으로 제출된 대안이 '현장 소모임 활동'이었다. 비록 현장 소모임 활동은 그 규모 면에서 매우 작았지만, 문화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소모임 단위의 공동체놀이를 만들어 생활 속의 문화운동을 실천하고자 한 광장문화의 또 다른 흐름이었다.

가두투쟁과 월드컵 응원, 차도에서 이뤄진 광장의 부활

정치적 회합은 금지되고 정권을 지지하는 동원만이 인정되는 광장문화의 왜곡 속에서 1987년 6월 항쟁은 광장문화의 정치성을 제기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시청 앞 광장에 모인 100만 인파는 독재 속에서 소통되지 못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그리고 최루탄을 동원해 어떠한 정치적 공론장도 불허된 상황에서, 가두투쟁은 정치적 의견을 교류하고 표현하는 정치광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즉, 제도화된 정치수렴장치가 부재한 상황에서 차도는 차량의 통행뿐 아니라 당시 민중이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87년 체제의 확립 이후 차도를 중심으로 한 광장문화는 합법화될 뿐만 아니라 다양화됐다. 이제 차도는 사전신고를 통해 정치집회 장소로 가능하게 되었고, 지자체의 각종 지역축제들의 주요 공간이 됐다.

차도는 2002년 월드컵 길거리 응원전을 통해 축제로서의 광장문화를 제기했다. '비 더 레즈(Be the Reds)'라는 문구를 새긴 100만의 붉은 티셔츠가 시청 앞 광장을 물들인 풍경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대규모 스펙터클이 연출한 장엄함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은 노는 것을 게으름의 징표로 금기시하고 군중의 흐름을 무질서와 폭력으로 동일시하던 노동규율사회에 대한 통쾌한 풍자와 비판이다. 연인원 2400만 명이 참여한 길거리 응원전은 세대와 계급, 성별과 나이를 넘어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문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길거리 응원의 흥분과 동원기제는 그 후 '미선이·효순이 정국', '반전·평화운동', '탄핵반대시위'의 핵심적 동인으로 작용했다.
▲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을 위해 시청 앞에 모인 시민들. 이날 시청 앞에 모인 시민들은 100만 명에 육박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왼쪽) 지난 2002년 당시, 미 장갑차에 살해된 효순, 미선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시청에 모여 진행한 촛불시위 모습. ⓒ연합뉴스 (오른쪽)

잔디밭과 도서관 앞, 사라진 '대학의 광장'

마지막으로 광장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대학문화다. 1990년대를 강타한 서태지 신드롬. 이후 신세대 담론이 80년대 운동권 담론을 대체하고 대학생들의 탈정치화가 진행되면서 대학의 광장문화 역시 바뀌게 됐다.

80년대 대학의 광장문화는 시위문화와 맥을 같이 했다.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이 대학문화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으면서 운동권 문화는 대학의 주류문화로 부상한다. 사회적으로 언론통제가 심했던 상황에 비춰볼 때, 대학은 군사정권의 부당성을 알리고 상호 소통하는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특히 '도서관 앞 광장'은 이런 학생들의 정치적 공분이 상호 공유될 수 있는 주요 공간이었다. 도서관은 대학의 상징이었기에, 그 앞에서의 정치집회는 구성원 모두가 비판담론을 공유하고 결정할 수 있는 대표성이 보장됐다. 당시 또 하나의 광장문화는 일명 '캠퍼스문화'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잔디밭문화였다. 잔디밭은 격렬한 토론과 고즈넉한 명상 혹은 공동체놀이와 술판의 열린 공간이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도서관 앞 광장은 그 어느 공간보다 조용하게 된다. 오히려 총학생회가 나서서 도서관 앞 집회를 불허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도서관이 학문과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청년실업의 악령이 학생간 소통을 완전히 끊어 놓았다.

한편 잔디밭문화 역시 사라졌다. '야상과 군복바지'로 지칭되던 80년대 대학생 패션은 사라진지 오래다. 패션의 유혹에 그 어느 세대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세대가 90년대의 대학생이다. 이른바 명품과 브랜드의 소비가 일반화되면서, 옷을 더럽히는 잔디밭에 들어갈 이유가 없어졌다. 대신 소통을 위한 공간으로 인터넷광장이 새롭게 들어섰다. 인터넷, 휴대폰, 디카, 미니홈피로 대표되는 디지털문화세대가 된 이들은 사이버광장의 새로운 개척자이자 참여자가 됐다.

소비공간과 자폐적 애국주의, 광장 앞에 놓인 숙제
▲ 지난 2006년 월드컵 당시 SK텔레콤 컨소시엄이 이용권한을 넘겨받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는 십자형 울타리와 경호업체 직원들이 시민들의 출입을 제한했다. ⓒ연합뉴스

굴곡진 한국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광장문화의 부침 역시 매우 역동적이라 할 수 있다. 마을사람이 모두 참여했던 대동놀이는 조국근대화란 이름 아래 전근대적 잔재로 낙인찍혔다. 일과 놀이는 분리됐고 광장은 생활문화의 공간이 아닌 문화교양의 척도로 기능했다. 즉, '멍석 위에서 놀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광장문화를 통한 민주적 소통이 가능하게 됐고, 2002년 길거리응원전을 통해 축제로서의 광장문화를 경험했다.

광장문화의 새로운 부침으로 떠오른 것은 노골적인 상업화에 따른 과시적 소비 공간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분명한 사례는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전후로 야기된 길거리 응원전의 상품화다. SKT와 KTF를 각각 등에 업은 윤도현과 붉은악마가 서로 길거리응원전의 적자임을 내세웠던 갈등, 거리의 전광판 중계료가 따로 책정됐던 상황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또 하나 광장문화의 부침은 애국주의의 노골적 조장에 있다. 축구경기에서 한국을 응원한다는 게 문제인 것이 아니라, 애국주의가 상업주의와 교묘하게 결합되면서 나타나는 과잉된 집단적 자아도취다. WBC 준결승에서 한국이 일본에게 패하자 지상파 방송은 정작 결승전을 중계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했던 것은 야구라는 스포츠경기가 아니라 일본과 싸워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자폐적 애국주의'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장문화는 그 자체로서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문화적 욕망을 자연스럽게 표출시킬 수 있는 열린 공간의 창출여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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