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편인 <엄마와 함께 칼국수>(한겨레출판 펴냄) 이후 9년 만에 장편소설 <빛>(산지니 펴냄)을 출간한 소설가 김곰치를 만나러 부산에 다녀왔다. 8월 11일 KTX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 지하철로 갈아탄 후 거제역에 하차하니, 청년의 풍모를 한 김곰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설가 김곰치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지만, 전혀 어색한 느낌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가 명랑한 달변으로 눌변인 나를 편안하게 했기 때문이겠지만, 동년배 문인으로서의 처연한 오늘의 문학에 대한 문제의식에 그나 나나 일정한 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터뷰는 김곰치의 소설을 출간한 산지니 출판사와 인근의 횟집에서 격식을 갖추지 않은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인터뷰라고 했지만 사실은 방담과 같은 것이어서, 체계도 없고 형식도 없었다. 다만 이 만남을 통해서, 나는 '인간 김곰치'가 생각하는 현실과 문학에 대해서 얼마간 궁금한 점을 물었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피력하는 형식이었다.
소설을 쓰지 않은 이유
김곰치가 문단에 등단한 것은 1999년이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엄마와 함께 칼국수>란 작품으로 등단한 후, 몇 편의 단편을 발표했지만, 그동안 그가 주력한 것은 르포 작업이었다. 그는 새만금 개발을 둘러싼 현장과 천성산 터널 반대 운동은 물론이고, 평택 대추리 미군부대 이전 문제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논란의 한 가운데서 글을 쓰고 취재를 했다. 그 발로 쓴 문장들이 엮인 책이 <발바닥 내 발바닥>(녹색평론사 펴냄)이다. 왜 작가는 소설을 쓰지 않고, 르포 쓰기에 전념했을까. 나는 일단 이 점이 궁금했다.
그는 두 가지 사실을 이야기했다. 첫째, 한국 문학의 당대적 경향성에 대한 비판 의식. 김곰치는 자신이 등단하던 시점은 물론이고 오늘의 한국 문단에 대해 그는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듯했다. 특히 한국의 평단이 요구하는 소설의 '언어적 완성도'에 대한 집착은 자못 끔찍한 느낌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평론가인 내가 그의 발언을 유추해 보자면 이렇다. 2000년대의 한국문학은 '땅'과 '인간'의 고통스런 자력 너머의 언어적 발랄함에 시종했다. 김곰치는 학창 시절, 리얼리즘으로부터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이르는 '비판미학' 또는 '사회미학'에 대한 뜨거운 관심 속에서 글쓰기를 벼려나갔다. 그러나 그가 새롭게 조우한 현장 문단에서 발견한 것은 비루한 인간의 욕망과 언어적 탐닉에 집중하는 트리비얼리즘의 세계였다. 이런 문학의 주류적 경향에 김곰치는 내적 반발감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둘째,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의 르포에 대한 조언. 김곰치가 김종철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월간 <우리교육>의 기자로 근무했던 1995년이었다.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로 만났던 사이가, 등단 이후 문학을 포함한 글쓰기의 멘토 관계로 진화한다. 한겨레 문학상 당선 직후 김종철 선생을 찾아간 김곰치는 '르포'가 부재하는 한국 문단의 현실에 대한 김종철의 문제의식에 동의하게 되고, 이것이 그를 '살아있는 글쓰기'인 르포의 영역으로 그의 활동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된다.
르포, 희망을 과장하지 않는 글쓰기
그러나 르포의 현장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한국 사회의 누적된 고통과 절규였다. 문학으로서의 르포는 저널리즘의 기본 정신인 '사실'과 '증언'에 집중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인간과 세계의 '깊은 진실'을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균형감각의 '기우뚱한 평형 상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제는 한 사람의 르포 작가가 요지부동의 절망 상황이라는 객관적 현실 앞에서, 과연 그것을 뛰어넘는 예리한 희망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대추리와 새만금에서, 천성산과 사북의 폐광 지역에서 그가 만난 힘없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르포 작가의 펜에서 당면한 현실의 고통을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희망'을 기대하지만, 르포 작가는 과장된 희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것인지를 항상 의식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취재원들에게 과장된 희망을 말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그는 글쓰기 내내 절감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글쓰기의 아이러니에 대해 말했다.
"비록 현실에서는 뼈아프게 패배했지만, 그래도 패배하지 않는 글쓰기란 무엇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천성산과 새만금 문제를 필사적으로 취재하고 글을 썼지만, 현실의 운동 차원에서는 패배한 시점에서 터져 나온 물음이었다. 그는 이 패배의 과정을 글쓰기에 대한 '대오각성'의 한 계기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그러는 것과 동시에 그는 스스로 '배척'했던 소설쓰기의 가능성에 대해 복기해나갔다고 말한다.
생각건대 소설이란 현실에서 패배한 자가 그 패배를 내적 승리로 마술적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 글쓰기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의 근대 소설을 검토한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에서의 근대 소설가의 출발이 몰락한 사무라이 계층의 '원한'에서 나왔다고 말한 바 있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는 작가의 창조적 몽상이란 성인이 되면서 억압되어버린 아이의 제멋대로 살려는 의지와 유희 욕망의 소산이라고도 지적한다. '현실적 패배와 내적 승리'라는 이 이율배반의 소설쓰기의 구조는 굳이 멀리 갈 것 없이 시정인의 일상적 회한의 자리에서도 자주 분출된다.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장편소설이 몇 권이다." 운운하는 술자리 담론이 그것이다.
'똥 누는 예수'를 상상하다
이런 저간의 고민들이 누적되고 밀도를 높여가면서, 그는 다시 '소설쓰기'라는 기묘한 상상의 장으로 귀환했다. 그것이 이번에 출간한 <빛>이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소설의 화자인 조경태와 정연경의 연애의 실패를 한 축으로 하면서, 그 실패의 근본적인 계기로 '인간예수'에 대한 이들의 서로 다른 기독교 인식을 중심 문제로 설정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가히 집요한 열정으로 '인간 예수'에 대한 견해를 집중피력하면서, 초대 기독교의 성자인 사도 바울의 교리를 전면적으로 공박하고 있는 인물이 조경태이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가령 마리아의 '성령 잉태설'과 바울에 의해 정초되었다고 판단되는 예수의 '육체 재림설', 그리고 '원죄의 대속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바울의 태도 모두이다.
소설 속의 조경태는 세속적 이성주의자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초월적 교리 모두를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의 힘으로 예수를 수태했다는 것은 실제로는 조작된 것일 확률이 높다.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시킨 사내가 존재했을 것이 분명한데, 예수의 신성을 과장하기 위해 이것이 은폐되었다는 것이다. 초대 기독교인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선 바울이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것이 완수되었다고 말하면서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죄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논리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예수를 영접했다고 해도 바울의 죄는 사해지지 않는다.
동시에 예수가 죽음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원망하며 내뱉은 발언 "알리 알리 라마 사막다니(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에서 조경태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예수의 내적 동요를 발견해 낸다. 만일 예수가 자신을 신의 아들로, 또 죽음에 의한 영원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동요할 필요는 없지 않았게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경태가 그의 애인인 정연경에게 제시하는 예수의 초상은 일상인과 똑 같이 '똥 누는 예수'다. 아무리 바울이 예수를 성화시킨다고 해도, 원리주의 기독교가 예수의 인간적 면모를 회피한다고 할지라도, '똥'을 참을 수 없었던 예수를 자신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조경태의 언설이 새벽 기도회를 열심히 나가고, 성경은 신의 의지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 제멋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주의 기독교 신자인 정연경에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정연경에게 조경태의 이러한 '신성모독'은 받아들여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조경태와의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어 가는 근본적인 계기가 된다.
예수의 참다운 거처
소설가 김곰치는 정연경의 신념화된 기독교 원리주의를 '닫힌 교회'의 상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그가 이 시점에서 굳이 '인간예수'에 대한 상상을 촉진하기 위한 기묘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오늘의 세속도시에서 예수의 '참다운 거처'는 어디인가 하는 질문을 우회적으로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쉽게도 김곰치의 '인간 예수'에 대한 상상이 내게는 대단히 불경하거나 전복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소설의 영역에서 보면, 가령 대중적으로도 널리 읽힌 '인간 예수'에 대한 더 논쟁적인 이야기는 많다. 가령 <다빈치 코드>가 그러하다. 예수와 창녀 마리아가 사실은 부부관계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의 자식이 프랑스에 살고 있으며, 장구한 세월동안 비밀기사단이 이를 보호하고 있다는 식의 설정도 오늘날에는 흥미롭게 읽혀지고 있다.
성경에 결락되어 있는 청년 예수가 실상은 인도로 가서 다채로운 불교와 힌두교의 성인들과 대화하면서 그의 '사랑의 철학'을 체계화시켰다는 '인도로 간 예수' 모티프 역시 여러 저작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상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가 하면 <유다복음>과 같은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외경(外經)에서는 4대복음에서 전형적인 '악인'의 면모를 체현하고 있는 유다가 사실은 구원의 사명을 완수시키기 위한 메신저의 역할을 했다는 점이 분명히 제시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프로이트와 같은 정신분석학자는 <모세와 일신교>라는 저작을 통해서, 구약에 등장하는 유일신 '야훼'가 실제로는 이집트의 아톤신의 교리적 변형이 아니겠느냐 하는 점과 모세가 유태인이 아닌 이집트인이라는 점도 환기시키고 있다.
'인간 예수'에 대한 김곰치의 문제제기가 바울의 교리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로 나아간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시선이 좀더 확대되어 가령 오늘의 일부 개신교계가 보여주고 있는 극단적인 이분법에 대한 체계적인 형상화로 나아갔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나는 갖고 있다.
닫힌 교회와 그 동맹자들
사실 오늘의 현실 기독교계의 힘 있는 보수교단의 존재방식을 보면, 닫힌 교계와 그 동맹자들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낮은 거처에서 '인간 예수'가 펼쳐 보인 관용과 사랑의 정신과 무관하게, 오늘의 일부 개신교계는 마치 아마겟돈 전쟁의 수사학을 연상시키는 '십자군과 사탄의 무리들'이라는 이분법을 교회의 강대상 위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의 자장 속으로 무차별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이 세속화된 전투적 기독교는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의 비유의 참뜻과 무관하게, 시장 권력과 정치 권력, 그리고 종교 권력이라는 동맹 체제를 통해,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을 위로부터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에 나서고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이 땅의 사탄인 빨갱이를 박멸해야 한다는 주장을 광장에서 확성기로 외치고 있는 집단적인 풍경을 보면 섬뜩한 느낌까지 든다.
한국의 개신교가 이데올로기적 우파의 강력한 동맹자로 등장하여 현실 권력을 좌지우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극단화하고 있는 현재의 풍경 앞에서, 어쩌면 김곰치가 <빛>을 통하여 제기하고 있는 기독교 원리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현실에 직핍하는 글쓰기의 위험성을 다소는 안전하게 '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의 조경태가 정연경과의 연애를 성급하게 종결하지 말고, 좀더 격렬한 논쟁의 자리로 나아갔다면 좋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조경태와 정연경의 기독교에 대한 서신 교환이 좀 더 확대된 현실의 저자거리로 하강했다면, 훨씬 더 문제적인 소설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또 한 명의 '살만 루시디'가 한국에 필요하다는 권유가 아니다. 광야에 선 인간 예수의 외침도 중요하지만, 그 예수가 이 땅의 자못 혼란스러운 한국적 현실 속으로 걸어 나오는 장면을 김곰치에게 기대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빛>의 문제의식을 확대시킨 후속작품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빛>에서 김곰치가 던진 '인간 예수'에 대한 상상이 거침없이 역사의 반동이 막무가내로 진행되고 있는 이 세속도시를 배경으로 밀도 높게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 앞에서도, 대한민국의 어둠은 더욱 짙어져가고만 있다. 메시아가 아닌 인간 예수를 만나야 할 장소는 바로 이곳이 아닐까.
현장에서 글쓰기
김곰치 역시 이런 문제를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특히 그는 최근의 촛불 항쟁을 지켜보면서, 소설가로서의 자기각오를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석가의 자비보다, 예수의 사랑보다 민주주의가 아름답다." 그는 민주주의야말로 인류가 꿈꾼 로망의 최고형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빛>에서의 '똥 누는 예수'에 대한 상상이 예수를 역사와 무관한 순수의 존재로 확정하고자 하는 경향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작가의 작의는 이 소설에서 충분하게 성취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소설가로 귀환한 김곰치는 앞으로 어떤 글쓰기를 독자들에게 보여줄 것인가. 아무래도 그는 당분간 소설가와 르포작가로서의 작업을 병행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그는 소설 <빛> 이후에도 <소리>와 <말>이라는 장편소설을 쓸 계획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 출간된 <빛>은 후속작인 두 장편으로 나아가기 위한 숨고르기에 가깝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나 그는 이 세 편의 장편이 '연작소설'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빛>을 출간한 이후 김곰치는 자신의 소설과 관련된 블로그(☞)를 개설했다. 이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을 읽다 보면, 인간예수에 대해 상상하고 있는 '인간 김곰치'가 잘 보인다. 김곰치의 본명이 '김경태'라는 사실도 나는 이 블로그를 방문해 보고 처음 알았다. 소설가 김곰치는 오늘도 르포를 쓰기 위해 성실하게 취재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격월간지 <인권>에 시인 박영희 씨와 교대로 탐사 르포를 연재하고 있고, <부산일보>에도 르포를 연재하고 있다. 작가로서 활동하기에 여러 점에서 어려움이 많은 지역에서 김곰치라는 존재는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상징이다.
그의 소설이 출간된 '산지니' 출판사 역시 인문사회과학 출판사정이 열악한 부산에서 의욕적으로 양서들을 출간하고 있다. 작가는 필자와 대화를 하면서 서울 중심주의에 대한 평소의 문제의식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그는 <녹색평론>이 서울로 옮겨가는 상황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피력했다.
동시에 그는 한국의 평론계에도 일침을 가했다. 자신의 문학 청년기에 읽었던 비평은 그 자체가 한 편의 훌륭한 예술 작품이었는데, 요즘 평론을 읽어보면 그런 영감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나는 반성적 포즈를 취했지만, 김곰치의 초기 작업의 문제의식과 비슷하게 나는 요즘 문학을 의식적으로 '배척'하고 있는 처지이다. 문학의 내부에서는 현실이 잘 보이지 않고, 현실의 자장 안에서는 문학의 무력함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소설계로 귀환한 김곰치에게서 느낀 것은 좋은 문학적 동지를 한 사람 만나게 되었다는 '예감'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평론가와 소설가의 태도가 전도된 것처럼도 느껴졌다. 그는 유창한 달변과 신념을 갖고 있었던 반면, 나는 미욱한 회의주의자의 태도로 술잔을 만지작거리거나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허공을 쳐다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김곰치의 건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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