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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콜트 기타(Cort Guitar)'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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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콜트 기타(Cort Guitar)' 이야기" [기고] 고압 전류가 흐르는 곳에 선 해고노동자들을 보며
지난 15일 오전 2명의 노동자가 양화대교 인근에 있는 100m 높이 철탑에 올라갔다. 이 중 한 사람은 무선 조종기 제조사인 하이텍 알씨디 코리아의 노동자 이인근 씨. 그는 "하이텍이 7년째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창사 이래 최대 흑자를 낸 상황에서도 조합원을 전원 정리 해고했다"고 반발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은 악기제작 업체 콜트·콜텍사의 노동자 김혜진 씨. 이들은 "콜텍이 경영이 어렵다는 핑계로 위장 폐업을 하고 노동자 80여 명을 정리해고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18일부터 "공장폐쇄·정리해고 중단", "민주노조 사수"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린 100m 상공에서 단식 농성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의 고공 시위를 지켜보며 콜트에서 제조한 기타를 연주하는 노래를찾는사람들의 전 단원, 가수 명인 씨가 자신의 마음을 담을 글을 보내 왔다. 명인 씨는 이 글에서 오는 21일 보신각 앞에서 열리는 촛불 문화제에 함께 해달라고 호소했다. <편집자>

꽤 오래 노래를 잊은 채 살았었다. 노찾사에서 잠시 활동하고, 한 때 음반을 발표하며 가수를 본업으로 활동한 적도 없지 않았으나 먹고 사는 노동에 치여 사는 동안, 그 사이 나는 노래를 잃어버렸다. 그래도 어떻게든 진보 운동에 복무하고자 이런저런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가수라는 자의식도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사는 동안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나는 자주 투쟁 사업장의 집회장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점점 더 숨쉬기조차 힘든 자본주의에 맞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장기투쟁사업장 투쟁에 머릿수 하나 보태주는 일이라는 게 늘 마음 아팠다. 나는 그저, 틈나는 대로 혹은 부러 시간을 내어 기륭이든 이랜드든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비정규직 투쟁 현장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노동자 가수 김성만 선배가 집회장 한 구석에 앉아 있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반갑게 입을 뗀 선배의 첫 마디가 "이런 데 다니면서 왜 노래 안 해?" 였던가? "쟤 여기 왔는데 왜 노래 안 시켜?" 였던가?

투쟁사업장은 많고, 날마다 여기저기서 투쟁문화제가 열리는데 투쟁 현장에서 함께 연대할 가수들은 적다면서 김성만 선배는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내가 다시 노래해야 한다고 나를 설득했다. 가수는 몸이 악기인 사람인데, 평소에 몸 관리도 목 관리도 연습도 전혀 못하고 사는 내가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극구 사양하는 내게 연대의 마음을 강조하던 김성만 선배가 어느 날 우리 집으로 선물을 하나 주러 왔다면서 들렸다.

기타였다.
▲ 'Cort'는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탄압하는 악랄하고 나쁜 회사라고, 그래서 이렇게 상표는 박박 지워왔지만, 그래도 이 기타로 내가 다시 노래를 만들고, 다시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건네준 기타 하나. ⓒ프레시안

기타가 들어있는 가방에는 'Cort(콜트)' 라는 상표가 찍혀 있었는데, 내가 받은 선물은 검은 매직으로 그 상표가 박박 지워진 채였다. 'Cort'는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탄압하는 악랄하고 나쁜 회사라고, 그래서 이렇게 상표는 박박 지워왔지만, 그래도 이 기타로 내가 다시 노래를 만들고, 다시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건네준 기타 하나.

무대가 두려워서 다시 노래하기를 주저하고 망설이던 나는 '가수'를 직업으로 살 때와 달리 '노래하는 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비록 여전히 노래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쓰지 못하는 '비정규 가수'지만, 대단한 예술적 열정 때문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대라는 생각으로, 이제는 틈날 때마다 혹은 부러라도 시간을 내 기륭으로 이랜드로, 또 어디든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곳으로 노래하러 간다.

그렇게 나는 내 노래를 되찾았다. 극악한 현실 속에서 100일, 300일, 500일, 1000일이 넘도록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내게 무대를 찾아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투쟁의 현장에서 음향이면 음향, 노래면 노래, 닥치는 대로 궂은일을 마다 않는 노동 가수 김성만 선배가 내 손에 들려준 기타 하나가 내게 잃어버린 노래를 돌려주었다.

그런데, 바로 그 기타를 만든 콜트(전자기타 생산, 인천 소재)·콜텍(통기타 생산, 대전 계룡시 소재) 노동자들이 지금, 600여 일 째 싸우고 있다. 기타 몸체를 깎는 과정에서 나오는 나무 분진들과 소음으로 가득한 작업 현장에서,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도 참고, 관리자의 비인간적인 대우도 참으며 묵묵히 일해 온 그 노동자들은 근골격계 질환, 유기용제 노출로 인한 직업병, 기관지 천식, 만성기관지염에 시달리며 콜트·콜텍악기를 세계 시장점유율 30%를 점하는 회사로 성장시켜온 주역들이다.

그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과 각종 산업재해에 시달린 열악한 환경의 노동은 회사에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에게 음악을 선사하는 도구가 되었고, 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지금 그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회사에서 쫓겨났고,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마저 부당해고로 판정 받았지만, 이어진 직장폐쇄로 인해 뜨개질로 투쟁기금을 마련하며 멈춰 선 공장을 지키며 싸우고 있다. 며칠 전에는 찬바람 부는 양화대교 옆 철탑에 올라갔다. 15만4000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곳에 이들이 올라간 것은 절박한 사연을 알리기 위해서다.

나는 생각한다. 이제 내가 그 노동자들에게 노래를 돌려드릴 시간이라고. 그들이 만들어 준 내 기타가 그들을 위해 울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이제 우리가, 그 노동자들에게 그 노동의 아름다운 의미를 돌려드릴 차례고, 그 노동자들이 '노동'을 되찾고 '삶'을 되찾는 일에 주저 없이 연대할 때라고. 나의 기타는 이제, 연대의 노래를 울려야 한다고.
[콜트콜텍과 함께하는 문화노동자들의 호소]

▲ 콜트 악기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회사에서 쫓겨났고,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마저 부당해고로 판정 받았지만, 이어진 직장폐쇄로 인해 뜨개질로 투쟁기금을 마련하며 멈춰 선 공장을 지키며 싸우고 있다. 사진은 콜트 악기 공장 내부의 모습. ⓒ프레시안

1. 양화대교 옆 철탑에서 외롭게 고공농성 중인 분들에게 지지 방문을 가주면 좋겠습니다.

2. 우리에게 악기를 선사해준 노동자들의 피땀 위에서 콜텍콜트 박영호 회장은 자산 1000억대의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더 많은 이윤 획득만을 목적으로 라인을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빼돌리고, 근무 15년 차에 최저임금 수준의 돈을 받으며 일했던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집단 해고시키고 회사마저 위장 폐업시키고 말았습니다. 기타를 사랑하고,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콜트·콜텍 본사와 박영호 회장에게 항의합시다.

[초대 합니다]

<콜트·콜텍 위장폐업 철회와 원직복직을 위한 촛불문화제>

- 일시 : 10월 21일 오후 6시
- 장소 : 보신각 앞
- 출연 : 드럼서클 / 명인 / 서히 / 위기의 삼촌들 / 연영석 / 송경동 / 노순택의 사진슬라이드 등
- 여는 사람들 : 콜트·콜텍노조 / 금속노조 /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 조직위원회 /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 / 콜트·콜텍과 함께 하는 문화노동자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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