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모든 증거가 소령 에스테라지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프랑스 육군성은 반유태인 정서에 편승해서 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새로운 증거를 덮어버렸다. 태어난 지 20여년으로 아직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한 제3공화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흔들어 군부 중심의 극우체제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필적 조작에서부터 기소와 재판 과정, 그리고 에스테라지에 관한 새로운 증거 은폐 과정, 중령 피카르 등 진상을 밝히려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좌천시킨 과정 등에서, 군부로 대표되는 프랑스 보수 세력이 체계적으로 개입했다. 작가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육군성 장관부터 이 일에 관련된 모든 고위 장교들을 고발했다. 졸라는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어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항소심이 준비되는 사이에 영국으로 망명했다.
졸라의 뒤를 이어 작가 아나톨 프랑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사회주의 지도자 장 조레스, 등등 유수한 지식인들이 진실에 입각한 정의를 요구했다. 그 결과 1899년에 재심이 열렸지만, 군사법원에서는 형량을 10년으로 감경했을 뿐 유죄판결을 반복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드레퓌스를 사면함으로써, 진실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주로 군부의 위신을 지키는 방향으로 타협했다.
그 후로도 진실과 정의를 향한 요구는 계속되어, 드레퓌스는 민간법정의 재심을 통해 1906년에야 모든 혐의를 벗었다. 명예도 회복되어 육군에 복직했지만 이미 유형을 통해 쇠약해졌고 나이도 들어서 이듬해 전역했다. 왜곡과 은폐 과정에 개입한 육군성의 장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그래도 이 사건은 현대 프랑스가 무력과 억지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진실이 지배하는 자유 사회로 넘어가는 계기에 해당한다.
미국 워싱턴 시, 워터게이트 빌딩에서 그해 11월의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던 민주당 선거본부에 1972년 6월 17일 좀도둑이 침입했다. 이들은 모두 공화당의 닉슨 선거본부 언저리에 있던 인물들로 고위층과의 연루 의혹이 있었지만 물증은 없어서, 1973년 1월에 단지 절도와 도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후 그들의 범행과 닉슨 선거본부 사이의 연결고리가 하나둘 나타나면서 은폐를 위한 노력도 치열해졌다.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은폐 과정에 법무부, FBI, CIA, 그리고 어쩌면 백악관도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폭로했다. 의회에 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특별검사가 임명되었다.
닉슨은 도마뱀 꼬리처럼 참모 한둘에게 책임을 지우는 선에서 수습을 꾀했다. 하지만 백악관 회의를 녹음한 테이프의 존재가 알려지자 특별검사 콕스는 백악관에 증거를 제출하도록 소환장을 보냈다. 닉슨은 법무장관 리차드슨에게 콕스를 해임하라고 지시했으나 리차드슨이 듣지 않자 리차드슨을 해임했다. 결국 콕스는 장관대행에 의해 해임되었지만 후임 특별검사에 의해 수사는 계속되었다.
할 수 없이 닉슨은 테이프를 제출했는데, 중간에 결정적인 대목이 삭제된 상태임이 드러났다. 여비서는 전화 받는 사이에 우연히 녹음기 페달을 잘못 밟아서 지워졌을 뿐이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무실의 구조상 그럴 수가 없었음이 사진으로 전국에 공개되었다. 대통령의 행정대권에 기대 닉슨이 버티자, 결국 연방대법원이 이는 행정대권이 적용될 사안이 아니라고 판시하고 삭제된 부분을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최초의 침입조가 체포된 직후인 1972년 6월 23일 녹음된 테이프에는 닉슨이 참모와 은폐를 통한 수습책을 계획하는 대화가 들어있었다. CIA를 시켜서 국가안보를 핑계 삼아 FBI의 수사를 중단시킨다는 것이었다.
하원의 법사위원회는 1974년 7월 사법절차방해 혐의로 닉슨 탄핵안을 상정하기로 가결했다. 삭제된 테이프가 제출된 8월에는, 법사위원회에서 닉슨을 옹호했던 공화당 의원들마저도 본회의에 탄핵안이 상정되면 찬성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닉슨은 끝내 모든 혐의를 부인했지만, 탄핵소추가 하원을 통과하면 상원에서도 가결될 것이 확실하다는 공화당의 전언에 사임했다. 재임 중의 범죄에 대해 사임 후에도 기소될 위험이 있었지만, 직위를 계승한 포드가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면을 허락한 덕분에 다시는 조사받지 않았다. 닉슨의 참모들은 감옥에 갔고, 위증죄를 저지른 관련 증인들도 처벌받았다.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받다가 숨졌다.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했고, 내무부장관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고 했다. 5월 17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기념미사에서 김승훈 신부는 이 사건이 조직적으로 왜곡되고 은폐되었음을 폭로했다. 이 일이 도화선이 되어 6·10 항쟁이 일어났고 군부독재가 종식될 수 있었다 (한홍구, )
▲ "서울경찰청이 순전히 단독으로 특공대 투입을 강행했다고 보기는 어차피 어렵다. 강경 진압을 청와대가 직접 승인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국정운영 방향이 무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는 정도는 청와대가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다." ⓒ프레시안(만평=손문상 화백) |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고 우리는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거짓말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그 말이 얼마나 맞는지를 실감할 것이다. 권력이 거짓말을 시작하게 되면 아주 작은 사소한 거짓말일지라도 권력의 명운이 걸리기 때문에, 극악무도할 정도로 지독한 거짓말의 연쇄고리를 만들고야 만다.
지금 용산 참사 진상 규명이라는 것이 그렇다. 경찰의 강경 진압을 비난하는 시민에 대해 검찰과 한나라당과 청와대는 "진상 규명이 먼저"라는 소리를 베를린 장벽처럼 써먹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내놓는 진상이라는 것이 결국 "농성자들의 화염병 때문"이라는 용산경찰서의 초기 발표의 반복에 불과하지 않은가?
발화의 직접 원인이었다고 검찰이 상상하는 화염병의 실체가 밝혀지지도 않았고 검찰의 발표와 상반되는 증언들도 많다. 진상 규명이란 일방적 시나리오가 아니라 다른 가능성들을 배제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나가는 과정이어야 설득력을 얻는다. 다른 모든 가능성들이 널려있는데도 무조건 문질러버린 채, 농성자 몇 명에게 물증도 없이 혐의를 씌워서는 최악의 경우 제2의 6월 항쟁까지를 유발할 위험이 대단히 높다.
애당초 이번 사건은 협상이나 설득에 필요한 노력이나 시간도 들이지 않고, 경찰 자체의 수칙도 어기면서 서둘러 특공대를 투입한 경찰 책임이다. 구체적인 발화 원인까지 경찰이 제공했다면 그만큼 책임이 더 커지겠지만, 발화 원인이 화염병 때문이라고 해서 줄어들지는 않는다. 설령 화염병 때문이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격앙된 상태의 농성자들이 인화물질을 가지고 있는 좁은 공간에 서둘러 무모하게 무력 진압을 시도한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잘못을 호도하기 위해 쟁점을 자꾸만 발화 원인에 관한 "진상 규명"으로 돌리고, 나아가 그것마저도 농성자 잘못이라고 미리 정해진 결론에 짜 맞춘다면, 오히려 이 근처에 결정적으로 은폐해야 할 뭔가 있지 않느냐는 구린내가 풍겨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강경 진압에 청와대가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 도심에서 특공대를 투입하는 정도의 일에 청와대와 사전교감이 없었다면 극히 이례적이라는 의혹은 이미 김종률 의원에 의해서 제기된 바 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강경책을 서둘렀기 때문에 그런 의혹이 당연히 나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검찰의 "진상 규명"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속하고 일방적이다. 나도 처음에는 단지 이 일이 제2의 촛불로 번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일반적인 우려 때문에 신속하게 수습하려는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검찰이 진상을 서둘러 덮고자 하면 할수록 특별히 감춰야할 내용이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 점점 커져간다.
권력 조직은 은폐의 기술에 익숙하다.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비밀"이라는 영역을 모든 나라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권력자들은 자신의 비리와 범죄를 "국가 안보"에 섞어서 은폐할 유혹을 본능적으로 받게 된다. 대개의 경우 수사권이라는 것을 정부가 독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 워터게이트 사건, 박종철 사건에서 보듯이, 결정적인 역사의 계기에서는 시민들이 직접 진상을 밝히고야 만다.
서울경찰청이 순전히 단독으로 특공대 투입을 강행했다고 보기는 어차피 어렵다. 청와대의 성향과 의지를 지난 1년 동안 겪어본 서울경찰청장이 경찰청장까지 시켜준다는 대통령에게 충성을 과시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강경 진압을 청와대가 직접 승인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국정운영 방향이 무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는 정도는 청와대가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정도에 그치더라도 대통령과 정부는 그동안의 강공 드라이브를 철회하고 시민의 불만과 요구를 경청해야 한다. 억압과 응징이 아니라 소통과 설득을 통해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어렵기는 해도 현재의 국내적 국제적 난국을 헤쳐나가는 데 국민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도 야당이나 시민단체가 물리력으로 저항을 계속한다면 누가 봐도 "생떼"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못할 이유가 특별히 있는가? 불이 시너 때문에 크게 번졌고, 시너는 농성자들이 갖다 둔 것임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들이 전에 화염병을 만들어 던졌다는 것도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물리적 충돌의 와중에 어떻게 불이 나서 경찰관까지 사망할 정도로 번졌는지는 검찰이 전혀 해명을 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왜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사체를 부검했으며, 왜 핵심 사항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수사를 덮고 기소하는가?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 이외에 알려져서는 안 될 "비밀"이 정말로 있는 것인가?
오바마는 취임식 다음날 집무를 개시하면서 각료와 참모들에게 "공중이 신임한 직책에 아무리 오래 봉사했더라도, 우리가 공중의 심부름꾼으로서 이 자리에 머문다는 사실은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대단히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워싱턴에 "그동안 비밀이 너무 많았다"고 지적하면서, 자기가 이끌 행정부는 "정보를 감추는 사람 편이 아니라 정보를 알리는 사람 편"에 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권력 조직이라는 것이 비밀을 만드는 생리를 가지고 있음을 깊게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오바마가 비밀을 줄이는 데에 얼마나 성공할지, 아니면 초심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는 당연히 미지수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정부는 그런 마음조차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해외 언론에서도 모두 '1980년대 상황을 새삼 언급하면서 보도하는 참극이 일어났는데,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나선 검찰의 행보를 보면 아무리 봐도 "정보를 알리는 사람 편"이라기보다는 "정보를 감추는 사람 편"으로 보인다. 내가 지금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있는가 아니면 검찰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는가?
드레퓌스 사건에서 진상이 온전히 밝혀지는 데에는 12년이 걸렸다. 워터게이트 사건도 2년이 넘게 걸렸다. 개인이 은폐를 하더라도 밝히기가 쉽지는 않은데, 권력이 조직적으로 은폐를 시도하면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대한민국의 간첩 조작이나 의문사 중에는 30년 후에야 진상이 밝혀진 것도 있고, 전쟁기의 학살에 관해서는 60년이 걸려 밝혀지는 일도 있다. 아직도 안 밝혀진 것들도 많다.
그렇지만 모든 진상은 시민사회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백일하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다만 30년이 지나서 밝히기보다는 지금 밝히기가 더 쉽다. 용산 참사를 또 하나의 의문사로 남겨두면 장차 30년 동안 대한민국이 피곤할 것이다. 지금은 "과격 시위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아니라 "왜곡과 은폐의 악순환을 끊을 계기"다. 왜곡과 은폐의 악순환이 끊어진다면 과격시위는 저절로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