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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제와 한국 대통령제의 차이는? '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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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제와 한국 대통령제의 차이는? '의회' [박동천의 집중탐구]<65>대통령제에 관한 오해
제6부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
제4장 의회개혁의 방향
제1절 대통령제에 관한 오해


한국사회에서 용어들이 아무 합당한 이유 없이 순전히 유행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는 경향은 도처에 팽배하다. 대통령제라는 말만 해도 어느새 "대통령중심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동시에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접두사를 습관적으로 붙이는 풍조도 생겼다. 애당초 어릴 때부터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서로 상반된다고 가르치는 도식을 주입 당했을 테니, 대다수 시민들이 대통령제에서 의회는 어차피 거수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해도 탓할 수만은 없겠다.

OECD 창립회원 20개국 중에서 미국만이 대통령제이고, 그 후 추가로 가입한 10개국 중에서는 한국과 멕시코만이 대통령제다. 대통령제는 유럽에는 드골 시대 프랑스를 제외하면 시행된 적이 거의 없고, 현재 프랑스나 핀란드에서는 변형된 형태 즉 이원집정제가 시행되고 있다. 미국처럼 행정부를 의회에서 독립시킨 형태는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에서 채택되었다. 그리고 미국을 제외하고는 예외 없이 독재 또는 권위주의로 변질된 경험이 있거나 여전히 그런 상태에 있다. 반면에 의원내각제를 하는 나라에서는 독재나 권위주의의 경향이 없거나 매우 제한적이다. 왜 그럴까? 미국의 대통령제가 기본적으로 의회주권주의에서 파생한 변종인데 비해, 다른 나라에는 그 점이 생략된 채로 수입되었기 때문에 대통령은 곧 추장 또는 군주와 쉽게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의회주권이라는 헌정원리가 관습적으로 내면화되어 있지 못한 곳이라도, 의원내각제를 시행한다면 의회의 위상이 제도적으로 부각되기 때문에 독재가 아닌 대의정치의 원리가 싹을 틔울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대통령이라는 직책은 의회주권, 즉 대의정치의 이념을 부인하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 의회주권주의를 시행하되 자기네 독특한 역사적 맥락에서 발생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협의 산물로 탄생했다. 미국은 독립전쟁에서 일단 승리한 후 1780년대를 느슨한 연방제, 즉 상설기관으로 중앙정부는 없이 13개 주가 각각 독립해서 지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대륙의회를 소집해서 논의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이 때문에 연방정부를 만들자는 여론이 일어서 1787년에 제헌회의가 열렸는데, 당연히 연방정부를 구상할 때 첫 번째로 고려된 모델은 의회가 주권을 가지므로 곧 의회 다수당이 행정권을 차지하는 영국식 의회제 정부였다.

그런데 당시 버지니아, 펜실베이니아, 뉴욕, 매사추세츠 등 큰 주들은 이의가 없었지만, 로드 아일랜드, 코네티컷, 매릴랜드, 델라웨어 등 작은 주들에게는 다수가 결정한다는 것은 곧 자기들의 목소리는 무시된다는 뜻과 같았다. 이처럼 13개 주 가운데 작은 주들은 처음부터 연방에 참여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영국의 대의정부를 모델로 삼되, 작은 주들의 참여를 배제하지 않는 한, 영국식으로 의회 다수당에게 권력이 통합되는 체제는 진지한 고려대상이 될 수 없었다. 맥락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행정부 수반을 의회에서 독립시켜서 별도의 선거인단이 선출하도록 한 데에는 의회를 무시할 수 있다는 가능성보다는 의회 다수파의 전횡 가능성에 대비한 견제장치를 확대하는 쪽에 무게가 실렸던 것이다.

물론 의회에서 독립된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존재만으로 작은 주들이 연방헌법을 승인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았다. 큰 주 대 작은 주라는 도식에서 바라보는 한, 여전히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큰 주 쪽에서 나올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미국 초기에는 초대 워싱턴, 3대 제퍼슨, 4대 매디슨, 5대 먼로, 9대 해리슨, 10대 타일러, 12대 테일러 등 버지니아주 출신 대통령이 줄을 이었고, 나머지도 매사추세츠, 노스 캐롤라이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뉴욕 등 큰 주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연방을 결성해서 자칫 영구적 소수파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던 사람들이 이 제도를 수긍하기에는 조지 워싱턴이라고 하는 정치적으로 거의 바보에 가까울 만큼 지위를 탐하지 않고 소극적이었던 인물이 그 자리를 맡게 되리라는 예상에서 오는 안도감이 작용했던 것이다. 프레지던트라는 명칭은 식민지 시대부터 각종 행정관의 우두머리나 의원회의 의장에게 붙이던 직함으로, 제헌회의 의장도 프레지던트라 불렸는데, 바로 그 직책 또한 워싱턴은 마지못해서 맡아 별로 발언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무색무취 무욕무력의 대명사 조지 워싱턴이 초대 프레지던트로 될 것이 확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제와 상하 양원제로 이뤄진 헌법이 각 주의 비준을 받았던 것이다.
▲ 백악관. ⓒ프레시안

현대의 미국 대통령은 물론 워싱턴과는 달리 훨씬 강력한 권한들을 행사한다. 특히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강력해진 대통령을 경계하고 비판하는 의미에서 "제왕적 대통령제"(imperial presidency)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은 지금까지 아무리 "제왕적"이라고 비판을 받아도 박정희나 전두환에 가까운 독재는 하지 못했다. 의회 다수가 설사 자기 당 대통령에 대해서라도 상식과 헌법에 따라 일정한 견제 역할을 의무로 여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제로 20세기에 미국 대통령의 권한이 확대된 것은 19세기말부터 일어난 진보주의 운동의 여파라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헌법을 만든 사람들이 권력분립과 상호견제를 중시했던 것이 농경사회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산업혁명 후 확대된 경제에서는 기득권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얘기다. 그처럼 불평등한 상황은 주로 의회가 기득권을 대변하기 때문이므로, 대통령이 더 많은 권한을 가져야 했다는 해석이다. .

미국 대통령제를 말하면서 조지 워싱턴의 선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말하는 사람들은 한국에도 많다. 그러나 미국이 건국초기에 이미 시민혁명을 거친 나라, 다시 말해 대의정치의 원리에 관해 사회적 합의가 탄탄하게 깔려 있어서 권력자의 전횡을 인민이 마냥 참고 넘어갈 수는 없는 나라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한국적인 시각에서는 의회라는 것이 시간만 보내고 시끄럽기만 한 곳으로 보이기가 십상이라서, 강력한 의회의 존재라는 맥락 안에서 그런 의회의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로서 미국의 대통령제가 탄생해서 성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여러 번 언급했듯이, 한미 FTA를 한국에서 찬성하는 편이나 반대하는 편이나 미국 행정부의 의견을 곧 미국 의회의 의견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정확히 똑같이 의회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프레임의 소산이다. 자유무역협정과 같은 외교문서를 미국의회라고 해서 거부한다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막상 이 의제가 미국 의회에 상정된 후 거기서 벌어질 논의는 그 꼼꼼함이라는 것이 한국의 국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수준이리라 점만은 장담할 수가 있다.

의회가 있다는 것만으로 대의정치가 실현되지는 않는다. 대의정치가 실현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반드시 추가되어야 한다. 의원 개개인이 부화뇌동하지 않고 나름의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의견을 표명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들의 뜻을 헤아려 자신의 행동을 거기에 맞춰야 한다. 그런데 이 중 후자는 대의정치의 본질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여기서 직접 파고들어가기는 곤란하다. 나아가 대표들이 유권자들의 뜻을 헤아리려면 먼저 유권자들이 자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표명해야 하는데, 그러면 다시 다양한 개인의견 가운데서 어떻게 집단의사를 찾아내느냐는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어쨌든 이에 관해서는 잠시 후 제6장에서 그 내용 중 일부나마 논의하기로 하고, 이 대목에서는 의원들의 의견표명에 관해서만 한 마디를 더하고자 한다.

한국에서도 의원들이 의견이야 대단히 많이 가지고 있고, 국회의원 누구에게라도 말을 시키면 무한정 이어나갈 수 있는 재주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말 중에는 참말도 있고 거짓말도 있고, 실질적인 알맹이가 있는 말도 있고 헛소리도 있으며, 뼈에 사무친 진심을 담은 말도 있지만 단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교언도 있다. 뻔뻔한 억지, 선동성 구호, 누군가의 기분만 맞추는 아첨, 내용은 따지지 않고 남들이 하는 언표만을 따라가는 상투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정에 관해서 좋은 말, 옳은 말, 유익한 말, 정직한 말, 내용이 있는 말들만을 남기고 나쁜 말, 틀린 말, 해로운 말, 거짓말, 공허한 말 등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거나 줄일 수 있는 묘책은 없다. 어떤 말이 나쁜지, 틀린지, 해로운지, 거짓인지, 공허한지 여부는 사전에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구체적인 맥락에서 어떤 구체적인 언사가 발화되었는지가 주어져야 판정이 가능하다. 나아가 나쁘거나 틀리거나 해롭거나 거짓이거나 공허하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규제가 가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나쁘거나 틀리거나 해롭거나 거짓이거나 공허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개인의 이익 또는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게 되었는지를 따진 다음에 그 정도가 일정한 한도를 넘어야 규제가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고려는 일반적인 의견과 공론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고, 국회의원처럼 일정한 수의 사람들로부터 위임받은 대표자들이 그 직무와 관련해서 의견을 표명하는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아주 좋은 예가 최근에 한나라당 내부에서 일부 의원들이 쇄신을 요구한 일이다. 사실 그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초래한 환경이 문제라고 봤는지 또는 그 일로 말미암아 민심이 이반했다고 느껴서였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였는지가 내게는 무척 모호한데, 어쨌든 국정운영에서 뭔가 쇄신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무엇보다 유권자들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라는 신분과 권한에 합당하게 국회에서 법안제출과 찬반토론 및 표결이라는 헌법이 보장하는 행위를 통해서 의견을 표명해야 했다.

국회재적의원이 299석이라고 할 때 절대 과반수는 150이고 한나라당은 170석이므로, 쉽게 계산해서 21명의 의원이 표결에서 이탈한다면 한나라당의 과반수는 흔들리기 시작하게 된다. 물론 세밀한 수치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통상 표결에 참여하지 않는 국회의장도 빼야 하고, 의석의 유고가 있어서 재적의원수가 변할 수도 있으며, 재적의원이라고 해서 모두가 표결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한나라당 소속이 아닌 의원들이 모두 한 뜻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자기들이 보기에 "쇄신"에 역행하는 정책을 대통령이나 당 지도부가 추진하려고 할 때, 한나라당에서 30석 또는 그 이상 충분한 수의 의원들이 만약 그 정책이 법안의 형태로 상정된다면 반대하고, 단순히 행정명령의 형태로 추진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법안을 제정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면, 굳이 국회 내 표결이라는 국회의원 고유의 임무와 직결되지 않는 당내 "쇄신"을 요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

대통령제의 전형에 해당하는 미국에서는 사실상 당론이라는 것이 없이 의원들이 모두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서 표결에 임한다. 반면에 의원내각제의 전형인 영국에서는 중요한 쟁점법안일수록 각 당이 소속 의원들에게 당론에 따라 투표하도록 지침이 하달된다. 야당이 가령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했거나(실제로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각이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하는 정책의 경우, 표결의 결과에 따라 내각이 물러나고 새로운 총선거로써 민의를 다시 물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경우에도 당론투표가 실제로 이뤄진다면 당론이 결정되기 전에 당내에서 충분한 토론과 협상과 흥정이 선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차이들을 자세하게 여기서 해설할 수는 없고 줄여서 말하자면, 당론에 의해 채택된 정책이 결과적으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당내 토론이나 흥정이 충분히 이뤄졌다면 설사 내심으로 반대했더라도 결과에 대해서는 공동책임을 공언할 것인 반면에, 그렇지 못한 채 부화뇌동한 사람이라면 슬그머니 뒤로 빠지거나 추궁을 받더라도 당론에 따랐을 뿐이라고 책임을 미루기 쉬울 것이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여당에 속했던 사람들 그리고 전두환 시절에 국보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지금 보여주는 행태가 바로 그와 같다. 일례로 이회창씨는 1961년 조용수 민족일보사장 사형판결에 배석판사로 참여했는데, 이 사건은 47년이 지난 2008년 1월 16일에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22부에 의해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회창씨는 지금까지 군데군데서 단편적으로 불분명한 언급만을 남겼을 뿐, 이 일에 대해 지금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명한 의견을 공표한 적이 없다. 이런 종류의 일들은 국회의원이든 장관이든 판사든 한국사회에서 대단히 자주 있는 일이다. 공직자들이 주권의 위임을 받아서 직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나 두목의 폭력에 굴종해서 하수인 노릇을 자청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런 관념에서는 국가기관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폭력조직과 별 차이가 없다. 주어진 폭력조직이 득세하는 한, 하수인들은 호랑이라는 배경을 믿고 설치는 여우노릇이 가능하다. 그 폭력조직이 몰락하더라도, 하수인들은 강요당했을 뿐 본심이 아니었다는 변명으로 넘어간다.

국가기관을 구성하는 직책 중에서 이와 같은 순응주의의 악순환을 끊는 데 선봉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국회의원이다. 판사들도 그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소송이 제기된 한도 안에서만 발언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장기적인 효과만을 기대할 수 있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가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물론 대단한 파장을 미치겠지만, 현재 우리 사법부의 인적구성과 충원과정을 감안할 때 그럴 가망은 매우 낮다. 물론 현재의 제도적 환경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국회의원들도, 특히 보수정당일수록 정권차원에서 중요한 쟁점에 관해서 개인의 소신을 국회표결은 고사하고 당내 토론에서도 공표할 가망은 매우 낮다. 하지만 제도적 변화를 통해서 국회와 사법부에서 보다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산출되는 결정이 보다 다각적이고 심층적인 고려를 반영하도록 유도할 길은 있다. 나는 국회의 제도개혁 방안을 이 장에서 논하고, 사법제도의 개혁방안을 다음 장에서 논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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