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사법제도 개혁의 방향
제3절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생활에는 도처에서 결정과 판단이 필요하고 행해진다. 개인 차원, 조직이나 단체 차원, 그리고 민족공동체의 차원, 나아가 인류공동체의 차원에서도 결정과 판단이 이뤄진다. 이 모든 차원의 결정과 판단은 곧 일종의 재판과 같다. 일정한 사실을 토대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결단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그런데 민족공동체, 즉 국가가 내리는 결정은 개인이나 단체나 국제사회 차원의 결정과는 뭔가 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흔히 강제력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들 말한다. 국가의 명령에 불복하면 경찰이나 군대와 같은 조직된 폭력수단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국가의 명령이란 전형적으로 법령을 가리킨다. 강도나 방화와 같은 범죄는 당연히 처벌대상이지만, 세금을 안 낸다든지 병역을 기피한다든지 국가가 부과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처벌을 받는다. 이런 강제력은 민간단체에도 없고, 유엔이나 국제사법재판소 같은 국제기구에도 없기 때문에 확실히 국가가 독특한 성격을 가지는 것까지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국가의 명령을 어기면 다 처벌을 받는가? 국가의 명령을 어기면 다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마틴 루터 킹은 "양심의 소리에 따라 불의한 법을 어기고, 그 불의함에 관해 공동체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투옥되는 형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개인은 진실로 법에 관해 가장 높은 존경을 표시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 ). 국가라는 권력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하는 시책이 정의롭지 못한 경우에는 그 법을 어기는 것이 법에 대한 최고의 존경이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가짜 법 또는 악법이라면 지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 문구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해진다.
왜냐하면 무엇이 악법인가를 개개인이 나름의 변덕이나 느낌, 또는 가치나 이념에 따라 판정하고서 지키지 않기로 한다면 사회가 소란스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한 개인이 아무리 나름의 가치에 따라 행동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사회의 이름으로, 법의 이름으로 제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제재를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법이 아무리 악법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순전히 그 때문에 제재가 부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연재에서 누차 강조해왔듯이, 사회적 결정의 당/부당은 특정 개인의 소원이나 느낌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 즉 공론의 차원에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의견은 공론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요소로서, 그 요소들이 모여서 어떤 결정으로 이어질지는 번번이 해봐야 알 일이지 사전에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처럼 공론에 의한 결정이 뭔가 특별한 지위를 가진다는 점을 일컫기 위해서 개발된 용어로 주권이라든지 정치적 권위 등이 있다. 개인의 의견이란 주권에 대해 이처럼 항상 형태적으로 한 풀이 꺾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의 이름만 내걸면 아무나에게 대해 무슨 짓이든 해도 좋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다섯 명이 살던 공동체에서 네 명이 나머지 한 명을 죽이고 한 명이 가지고 있던 소유물을 나눠 가지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사회는 누가 봐도 야만이다. 문명사회에서도 사형제라든지, 또는 무력으로 저항하는 범죄자나 반란군을 사살한다는 등, 다수 공동체를 위해 소수 반대자를 죽임으로 처단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례로 최근에 금융사기로 전 세계 경제위기를 초래한 메이도프에게 미국 법원이 150년 징역형을 선고하였듯이, 특정 범죄자의 인생을 사실상 박탈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무거운 형벌이 야만이 아니라고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다수세력의 변덕이나 불편 때문만이 아니라 뭔가 더욱 고상한 차원에서 불가피했다는 정당화가 필요하다. 나아가 무거운 형벌이 아니라 아무리 가벼운 형벌이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자유로운 삶에 지장을 초래하는 만큼 모든 형벌에는 다수파의 변덕 이상으로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그래야 문명사회라는 자격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런데 문명사회의 유지를 위해 어떤 행위, 어떤 사람을 처벌해야 할 것인지를 미리 정해서 법전에 담아둘 수가 없다. 일례로 살인은 처벌이 마땅하다고 정하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겠지만, 어떤 사람의 어떤 행위가 살인에 해당하는지를 따져서 결정하는 일은 결국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건이 재판의 주제로 등장했을 때 세부사항들을 살펴서 가늠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규칙은 자동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적용하는 과정에서 선택과 판단과 분별을 다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은 규칙을 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고, 성문법전과 같은 형태로 규칙을 정할 필요가 있다면 정하더라도 여전히 그것만으로 미래에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부담이 특별히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어떤 행위를 어떤 정도로 처벌할지는 궁극적으로 개별적인 사안이 등장한 이후의 공방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달려있다. 이 점은 당사자주의 사법체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직권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송사에 따라서는 어떤 사람의 눈에 나름대로 결과가 뻔하게 내다보일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판결이 그의 예상을 벗어나는 경우도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측이란 선례나 관행을 기초로 이뤄지는 것인데, 선례나 관행은 언제든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고려들은 결국 정치공동체의 건강은 구성원들 자신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다시 확인해준다. 교과서에 수없이 반복되는 소리로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그토록 진부한 소리가 계속 되뇌어진다는 사실은 곧 그 말이 맞기는 하다는 뜻일 것이다. 보일러나 자동차나 컴퓨터, 기타 어떤 문명의 이기도 사용자가 관리를 게을리 하면 도움은커녕 해를 끼치기가 쉽다. 사람을 고용해서 관리를 맡기더라도 다시 그 관리인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은 주인의 몫일 수밖에 없다. 정부란 개인들의 사생활을 범죄자로부터 보호해주고, 교육이나 기간시설 또는 경제정책, 기타 등등, 공공정책으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주권적 인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는다. 따라서 사법제도가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공공사업들이 어떻게 입안되어 추진되는지를 주인의 눈으로 감시하고 감독할 의무가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군부독재가 종식된 이후 한국인들은 공공정책에 대해서는 종전에 비해 현저한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표명한다. 기득권층은 이를테면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끈질기게 반대하고, 농민이나 노동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나 비정규직법안에 격렬한 불만을 표시하는 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의사표현들이 좀더 개명된 방식으로 전략적인 순서를 가지고 이뤄지기를 바라며,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 정치의식의 낡은 프레임 네 가지를 비판함으로써 경직되고 폐쇄적이며 교조적인 감정싸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언제나 제도적인 여건에 대해 상대적이다. 시민들이 이익을 표출하는 방식이 거칠다면 자기가 추구하는 명분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자신감이 부족한 데에는 항상 정부와 이웃의 양식을 믿지 못하는 까닭이 내재한다. 그러므로 정치의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제도적인 개선의 여지들을 샅샅이 찾아다녀야 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정치의 구조적인 개선을 위해서 사법제도개혁이 가지는 중요성은 어쩌면 의회개혁의 중요성보다 크면 컸지 작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개혁이라는 주제는 지금까지 진보적 의제에서 우선순위가 별로 높은 적이 없었다. 과거에 독재정권이 법을 멋대로 주무르던 시절에 "사법이 정치에서 독립되어야 한다"는 아주 피상적인 관념이 생겨난 이후 여태까지 제대로 비판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를 단순한 권력투쟁으로 이해하고, 권력이란 항상 전제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면, 사법만이라도 전제적인 권력을 둘러싼 투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까지는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한 꺼풀만 벗기고 들어가면 천진하고 유치하다는 점이 금방 드러난다. 전제적인 권력이 왜 사법을 가만 놔두겠는가? 전제적인 권력이 사법을 주구로 활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전제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전제적인 권력을 가만 내버려둔 채 사법의 중립을 꿈꾼다는 것은 네모난 동그라미를 찾아 헤매는 짓이나 매한가지다.
정치가 전제적인 권력을 둘러싼 이전투구의 상태라고 해서 정치를 없애는 것이 해법일 수는 없다. 해법은 오로지 야만적인 정치를 불식하고 개명된 정치로 바꾸는 데에만 있다. 개명된 정치란 권력과 지위를 둘러싼 경쟁이 규칙에 의해서 이뤄지는 상태, 즉 법치주의다. 이때 법이란 결코 법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독점하는 생업의 영역이 아니라, 일반적인 시민들이 지지하는 생활의 질서여야 한다. 따라서 법치주의란 곧 인민이 원하는 법에 따라서 정치적 경쟁이 이뤄져야 한다는 원리, 즉 민주주의의 다른 양상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서는 지식인에 속하는 일부 인사들이 앞장서서 법치와 민주가 마치 대립되는 것인 양 말하는 어법을 퍼뜨리고 있다. 일례로 헌법재판소가 행정수도특별법을 위헌으로 판시했을 때, 마치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중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 그렇다. 전형적으로 법치라고 할 때 "법"을 마치 사법시험 합격자들의 전유물로 치부해버리는 발상이다. 실제로 법을 단지 하나의 직업적인 전문영역으로 치부해 버리는 이런 발상은 우리국회에서도 횡행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국회에서 법사위원회를 으레 율사 출신으로 충원하는 관행이 그렇다 (2009년 7월 13일 현재 법사위원 16명 중 법대 출신이 14명, 사법시험 합격자가 12명이다). 국회는 이미 입법권을 수임 받은 기관으로서 적어도 국회의원이라면 모두가 입법자, 즉 법률의 전문가이기에 앞서는 법률의 창조자들이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법제"와 "사법"을 논의하려면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경력이 우대받을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현실은 분명히 크게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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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는 우리 진보진영에서 사법개혁이라는 의제를 최우선 순위로 추구하면서, 개혁의 내용 역시 대륙법 체계를 버리고 보통법 체계로 환골탈태하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히 법에 관한 관념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무엇인지, 정부가 무엇인지, 공공성이 무엇인지,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무엇인지, 도덕과 법률의 관계는 무엇인지, 인권은 왜 존중해야 하고 어떤 것들이 기본권에 속하는지, 내가 원하는 요구는 어떻게 추구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은 어디까지 존중해야 하는지, 기타 등등, 사회생활의 본질적 의미에 관해서 끊임없이 이어갈 수 있는 질문들에 관해 대답하는 관점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다시 예를 하나 들자면,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검찰과 언론의 처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분개하는 이유는 검찰이 먼지털기 식으로 수사를 진행했고, 그러면서도 기소는 하지 않은 채 세월을 보내면서, 일방적인 이야기들을 언론에 흘려서 전직 대통령의 인격을 황색저널리즘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줬다는 데 있다. 만약 우리 재판제도가 직권주의가 아니라 당사자주의였다면, 수사가 시작될 때부터 수사기관과 피의자 사이의 공방이 판사의 심판 아래 진행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여론재판을 하더라도 처음부터 변호인 측의 변론권이 공평하게 인정되었을 것이고, 어떤 사실까지 공표가 가능하고 어떤 의혹부터는 공표해서 안 되는지도 법원에 의해서 통제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 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실체적 진실의 규명에 협조할 자세였던 만큼, 추문 상태로 시일만을 끌면서 온갖 악성 추측과 저질 왜곡이 자라나도록 방치하는 대신에, 실체적 진실을 향해 적실성 있는 쟁점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사회적 관심이 인도를 받았을 것이다.
당사자주의 재판에도 당연히 나름대로 결점이 없지 않다. 예컨대 많은 경우 재판이 원래 쟁점에 대한 규명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이른바 플리 바겐(유죄 인정 흥정, plea bargain)으로 끝난다든지, 배심원단에 의한 재판은 오히려 사회적 주류들이 가진 편견을 영속시킨다는 결점이 대표적이다.
이 재판 방식은 피고 측이 혐의에 관해 다투지 않고 죄를 인정하면 끝나기 때문에, 중범을 저지른 범죄자로서는 보다 작은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큰 죄를 덮어버릴 수 있다면 이익이 된다. 검찰 측에서도 피고인의 악착같은 반론을 "합당한 의혹의 여지없이" 물리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플리 바겐에 응하는 것이 편리하다. 살인혐의를 입증해서 20년 형을 물리려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방면하는 결과보다는, 과실치사 정도를 자인하게 만들어서 5년 형이라도 확실하게 물리는 편이 사회에게는 더 안전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플리 바겐이다.
다음으로 배심원단의 편향성이란 하퍼 리가 쓴 『앵무새 죽이기』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흑인이 백인 처자를 폭행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는데, 변호인은 법정공방을 통해서 피해자의 아버지가 자기 딸을 때려 놓고는 만만한 흑인에게 뒤집어 씌웠음을 밝힌다. 피해자는 오른쪽 눈 주위를 집중적으로 맞았는데, 피고는 왼팔이 어깨 죽지부터 없는 반면에 피해자의 부친은 왼손잡이다. 상대를 때려서 제압한 다음 겁탈하려는 급박한 상황에서, 오른손밖에 없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편하게 주먹이 도달하는 상대의 얼굴 왼쪽을 때리지 않고 굳이 불편하게 오른쪽을 때릴까? 이와 같은 경우에, 폭행이 왼손잡이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은 "합당한 의혹"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백인만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피고에게 유죄를 평결하고, 따라서 이 괘씸한 흑인에게는 사형이 선고된다.
이 소설은 1960년대 미국의 상황을 그렸는데, 그 후로 사정이 엄청나게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흑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은 법정에서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로드니 킹을 폭행한 경관들이 받은 처벌이 너무나 경미하다는 이유 때문에 발생한 1992년의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좋은 예다. 이런 배경 아래서, 1994년 백인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미식축구 선수출신 O. J. 심슨은 유죄를 "합당한 의혹의 여지없이"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1995년 10월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배심원단이 주로 백인으로 구성되었다가 유죄 평결이 나면 폭동이 재발할까봐, 백인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의 법정에 재판을 맡겨서 배심원 중 여성이 열 명, 흑인이 아홉 명이나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배심재판을 당장 전면적으로 시행한다면 배심원단의 구성에 따라 많은 편차들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플리 바겐도 현재와 같은 정치의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민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직권주의 체계 때문에 빈발하고 있는 불공정과 불의,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사법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에 비하면 두 가지 문제점 모두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너무 급격한 전환에 따른 마찰은 줄이기 위해 점진적인 단계를 밟아야 하겠지만, 큰 맥의 전환은 가능한 한 서두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실제 우리 법조계의 추세도 과거에 비해 영미법적인 사고와 판례가 점점 중요시되는 경향이 있다. 대륙법과 영미법 사이에서 어영부영 누더기식으로 뒤죽박죽을 만들기보다는 원칙에 관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추진해야 마땅한 일이다.
당사자주의 재판과정은 그 자체가 시민들에 대한 민주주의의 교육장이다.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기본적인 가치에 대해 자신은 선택을 미루고 마냥 회피만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선택해서 가는 길이 맘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딴죽을 거는 무책임한 자세로는 배심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배심원에 참여하는 경험, 자기가 언젠가 배심원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등은 시민들에게 자연스럽게 도덕적 정치적 사법적 판단에서 한 가지 기준만을 고수해서는 안 되고, 여러 가지 사항들을 종합해서 판단하는 균형 감각이 필요함을 알려준다. 나아가 법정이나 국회 등, 공론의 장에서 이뤄지는 결정들은 자기가 법관이나 의원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의견을 개진하면서 논의에 참여할 수가 있고, 설사 자기가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신이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책임한 짓임을 깨닫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로써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법치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개혁은 단순히 제도의 부속품 몇 개를 바꿔 끼우는 일이 아니라, 정치생활의 근간을 뿌리부터 변혁하는 일이다. 아울러 사람들이 맘속에 품고 있는 의식과 가치와 이상과 표준을 바꾸지 않으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면적인 개편이 정착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린다고 보고, 최종적인 목표까지 가는 도중에 거쳐야 할 중간 지점들을 정교하게 배치한 로드맵이 필요하다. 그러나 최종 목표 자체가 무엇인지는 명백하게 공표하고 그것이 왜 우리사회에 필요하며, 그것이 실현되면 실생활에서 어떤 점들이 바뀌게 될지를 끈기 있게 알리는 작업은 이르면 이를수록, 상세하면 상세할수록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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