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진보파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유주의라는 말을 싫어하고 사회주의라는 말을 좋아한다. 내가 "자유주의", "사회주의"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자유주의라는 말", "사회주의라는 말"이라고 말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자유주의나 사회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의 사회질서를 가리키는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매우 표피적인 수준에서 문구에 반응하는 풍토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제1부 제4장 제1절에서 이미 밝혔듯이, 자유와 평등은 상호모순일 수가 없다. 제1부 제3장과 제4장 및 이 연재 전반을 통해서 강조해왔듯이 진보와 보수는 상대적인 개념이며, 현실정치에서 현재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회주의 세력이란 거의 예외 없이 자유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자유주의 정치의 근본원리들을 수용한 정당의 형태로 활동한다. 자유주의 정치원리란 개인들의 자발성이 자유롭게 자라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나아가 자발성을 고무하며 북돋우는 데에 사회질서의 목적이 있다고 본다. 정부에게 어떤 적극적인 선의 실현을 향해서 인민을 지도해달라고 기대하지 않으며, 단지 자유로운 시장경쟁을 방해하는 억압이나 전횡을 찾아서 제거하라는 임무만을 부여한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때리거나 협박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면 억압이다. 사기나 속임수로 상대를 등쳐먹고, 상대의 항의를 묵살하는 것도 억압이자 전횡이다. 계약을 이행하지 않거나, 맡은 바 임무를 배신하는 행위도 자유로운 시장경쟁을 방해하는 범죄다. 살인, 폭력, 방화, 사기, 배임, 횡령, 탈세 등, 상식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행태들은 모두 개인들이 일반적으로 방해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한다.
그러나 자기가 돈이 많다고 해서 사치스럽게 살아도 되는가? 십억 원짜리 승용차를 타고 억대의 코트를 걸치며 머리손질 한 번에 수백만 원을 지출하며 살음으로써 88만 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하는 이웃에게 좌절감을 안겨 줘도 되는가? 승용차를 위해 십억 원 이상을 지불하지 말라고 부자에게 명령한다면 자유의 침해인 것이 분명하겠지만, 개인용으로 생산되는 승용차의 배기량을 환경에 대한 고려나 일반적인 에너지 절약을 위해 제한하는 것은 가능하다. 부자더러 특정 재질의 의류를 입지 말라고 금지하면 자유에 대한 부당한 침해지만, 동물을 좀더 자비롭게 대하는 것이 곧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예의로 연결하는 사회적 결단이 있다면 모피 생산을 금지할 수 있다. 부자가 자기 돈을 가지고 시장에서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물품을 구입하는 것을 간섭하면 부당한 침해지만, 일반적인 사회복지를 위해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때 부자에게 세금을 더 많이 매기는 것만으로는 자유의 침해라고 할 수 없다.
자유주의, 특히 정치적 자유주의란 대체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발상과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대체로 도덕과 법을 구분한다. 그러나 이때 구분이란 도덕적 고려를 곧바로, 아무런 매개나 여과 없이, 사법적 고려로 연결하면 곤란하다는 뜻이지, 사법이 부도덕해도 된다든지, 도덕적 고려가 사법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살인이나 강도는 일반적인 도덕관념에 따라 악행이기 때문에 사법적으로도 처벌대상이다. 그러나 사치는 금욕주의라고 하는 특별한 도덕의 관점에서만 악행이고 쾌락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장려할 일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금지해야 할 일은 아니다. 더구나 어디서부터가 사치가 되는지조차 철저하게 각 개인적 취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설령 국가가 개입해서 간섭을 하려고 해도 기준을 정하기가 난감하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면 자의적인 기준이라도 시의에 따른 요청으로서 정당화될 수 있다. 선물과 뇌물의 구분이 좋은 예다. 특별히 물욕에서 해탈하기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상대의 호의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기왕 선물이라면 진귀하고 값나가는 물건일수록 더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령 추석 선물이라는 것이 몇 천 원짜리 양말이나 한 만 오천 원짜리 소설책 한 권이라면 고마움으로 끝나겠지만, 백만 원짜리 상품권 정도만 되더라도 부담스럽게 느낄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특별히 값나가는 선물이 아니라도 명절이나 기념일, 기타 특별한 날들을 잊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챙겨서 정표를 보내주는 사람이라면, 마음 깊이 고마움을 새기고 있다가 나중에 어떤 이익을 되돌려 줄 작정을 하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홍길동이 심학규에게 이런 식으로 한 이십년 동안 정성을 바쳤는데, 심학규가 어느 날 장관이라도 돼서 특별히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재량의 범위 안에서 홍길동에게 호의적인 결정을 내린다고 하면 어떨까?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떤 원칙을 정하더라도 자의적(恣意的)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또 어떤 원칙을 정하더라도 그것을 개별적인 사례에 적용하려면 그 때마다 해당 사례에 독특한 판단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판단이 요청되는 경우에 어떤 보편적인 원칙에 따를 것을 요구하거나, 모든 사람들이 승복할 객관적인 기준을 요구하게 되면 설왕설래만 한없이 이어질 뿐 어떤 결정도 불가능하게 된다. 누차 강조했듯이, 이와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어떻게든지 결판을 내고 다른 일로 넘어가는 것이 당사자들에게나 사회 전체에게나 유익한 상황에 해당한다. 따라서 일정한 기구나 위원회에 결정권을 위임하고 거기서 나오는 결정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그 문제 하나를 가지고 아웅다웅 다투면서 세월을 허비하기보다 훨씬 현명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위임에 의해서 권한을 수임한 기구나 위원회가 권한을 남용하거나 악용할 위험은 언제나 상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에 이의가 있다면 항의할 수 있는 절차가 반드시 덧붙여져 있어야 공정성을 확보할 수가 있다. 불만, 반대, 이의, 항의 등은 제도적인 절차가 마련되어 있거나 말거나 표출되기 마련이다. 일시적으로 억압할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억압할 길은 없다. 더구나 일시적으로라도 억압에 성공한다면, 그 자체로 그런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라 억압적인 사회임이 드러난다. 지금 북한 주민들이 그렇듯이 (또는 대한민국의 서민층 가운데 대통령을 "국부"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당하는 억압을 자각하지 못하는 일부가 그렇듯이), 억압당하는 일에 이골이 나서 자유를 포기한 사람들이라면 국가권력에 마냥 순종할 줄밖에 모르겠지만, 그런 상태를 본보기로 삼아 인간사회가 지향할 일은 도저히 아니다. 인간사회의 진보를 말할 때, "진보"라는 단어가 개인적인 아집의 수준을 넘어 조금이라도 상호주관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억압이 없이 자유로운 상태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사회를 이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항의, 반대, 이견의 권리를 사회질서의 공정성을 위한 필수 요건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는 소청, 청원, 상소, 소원(訴願) 등등, 항의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적 절차를 마련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소청이나 상소제도로도 분출될 수 없는 항의나 반대를 위해서 훨씬 포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바로 표현의 자유가 그것이다. 표현의 자유란 우리 헌법에 열거된 항목으로 말하면, 종교, 양심, 사상, 학문,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기술적 해석에 따라 이런 항목들에 속한다고 간주될 수 있는 영역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논의한 대로 공동체가 개인에 대해서 내릴 결정에 대해 반대할 수 있는 포괄적인 권리를 뜻한다고 봐야 타당하다. 공동체가 내리는 결정이 그래야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 모양을 갖출 수가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사안의 성격에 따라 허용되는 정도가 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무제한으로 허용되어야 한다. 단, 앞에서도 말했듯이 표현의 방식에는 당연히 규제가 있어야 한다. 일례로 테러리즘이나 방화, 인질극, 심지어 전쟁도발 등은 모두 의사표현의 방식으로서 매우 충격적인 만큼 굉장히 효과적인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애당초 반대의 권리를 포괄적으로 인정하는 이유가 평화적인 사회질서를 위해서이기 때문에, 평화 자체를 깨뜨리는 폭력이 자행된다면 반대의 권리를 인정해 줘야 할 모든 필요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한한 논쟁을 위한 일이 아니라,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대전제를 인정한 위에, 사회적 공론의 전반적인 공정성을 위한 일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행의 차원과 공론의 차원을 구분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예컨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북한에 대한 화해협력정책은 일부의 완강한 반대의견이 끈질기게 목소리를 냈지만 정부가 가는 길을 뒤집을 정도는 못 되었었다. 즉, 집행의 차원에서는 선거에 의해 위임된 권력이 주도권을 행사한 것이고, 공론의 차원에서는 선거에서 졌더라도 반대의 권리가 허용된 것이다. 한 번의 선거에서 소수로 밀린 세력이라도 공론의 차원에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공론에서 다수를 점했다고 바로 정권을 차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다음번 선거까지 기다려서 기회를 노리는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다.
물론 위임된 정권이라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너무나 뻔뻔하게 다수의 공론을 묵살하거나 억압하려든다면 모든 절차를 뛰어넘어 즉각적인 주권의 표현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인민의 봉기나 혁명은 정당성을 재가해 줄 외부 준거가 따로 필요 없다. 그 자체가 인민주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실질적인 내용이 어떻든지, 외견상으로는 쿠데타나 찬탈과 마찬가지로 무력에 의한 정부전복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압도적인 다수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는 이런 방법은 고려하지 않는 편이 신중의 미덕에 부합한다. 저항하는 다수와 정부 편의 소수 사이에 세력 차이가 엇비슷하다면 기어이 무력으로 결판을 내야 할지도 모르는데, 바로 그처럼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발가벗은 힘을 겨루기로 하면 지독한 유혈사태를 초래하기 쉽기 때문이다. 내전이란 육체적인 상해뿐만 아니라 그 후 오랫동안 계속될 정서적인 상처를 보더라도 사회평화를 건설하기에 결코 좋은 방법일 수가 없는 것이다.
▲ 2005년 멕시코시티 중심가 독립기념탑 일대에서 벌어진 야당 대권후보 지지 가두행진 시위에 등장한 체 게바라 사진. ⓒ연합뉴스 |
절차적 민주주의는 분명히 성급한 한탕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화려한 언어적 수사와도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정치와 사회에 관해서 오랫동안 깊게 숙고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받아들이려면 먼저 미래에는 정치가 나아지리라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이런 소망은 이웃에 대한 막연한 신뢰가 없으면 생길 수가 없고, 이웃에 대한 신뢰는 궁극적으로 자기 안에 내재하는 선의의 절대적인 가치와 자발성의 무한한 역량을 믿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처럼 권력이 인민의 신임을 배신한 경우가 많고, 더군다나 그때마다 악을 용서하지도 응징하지도 못한 채 안으로 원한의 응어리가 쌓여온 곳에서는 이웃에 대한 신뢰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성되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싹이 살짝 텄다가도 자라기 전에 짓밟히기가 쉽다.
노무현은 "흔히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우리 민주주의 발전과정에 불만을 가진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이 말을 잘 쓰지 않지만, 어떻든 이것은 이제 완성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통해 그가 전하려고 한 취지에는 십분 공감한다. 그러나 "완성단계"라는 문구는, 정치인의 수사라고 치부해 주더라도, 절차적 민주주의에 관해 근본적인 오해를 노정한다. 이 때문에 심상정으로부터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는 자"라는 비난을 들었고 (☞ ), 심상정으로 하여금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분리될 수 있다는 사고가 있었고 결국 그런 생각이 MB를 선택했고, 그 선택이 일반 민주주의를 짓밟았다"는 잘못된 진단을 고집하게끔 오도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입헌주의가 완성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선진국" 프레임에 갇혀서 바라보면 영국이나 미국이나 프랑스나 독일의 입헌주의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나라들은 일상적으로 헌법의 문제에 부닥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갈등을 겪는다. "선진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첫 번째로 꼽기 쉬운 미국에서 2000년 대통령 선거 결과에 관해 다툼이 발생해서 플로리다 주 대법원의 판결과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상충하는 일도 있었다. 2008년 미네소타 주 연방상원의원 선거도 10개월이 넘는 법정공방 끝에 당선자가 결정되었다. 매일 매일 진행하는 일상사에서 헌법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대개는 법원에서 위임받은 권한에 따라 처결하지만, 법원의 판결에 대해 이의나 반대나 비판이 또한 공론의 영역에서 끊이지 않는다. 그런 의견 중에서 생명력이 길고 전파력이 풍성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정치지형의 변화로 연결되어 마침내 법원의 판례를 바꾸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미국 사회의 민주적 절차는 날마다 생성되고 발전하는 현재 진행형이다.
사회적 약자, 특히 경제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사회적 자유주의는 결코 절차적 민주주의와 대척된다든지, 절차적 민주주의를 능가하는 관념이 아니다. 가령 누진세에서부터 의료보험이나 무상교육의 확대, 또는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부유세, 등등, 어떤 정책제안을 보더라도 모두가 제도와 절차에 관한 얘기지 절차를 무시하는 이야기일 수가 없는 것이다. 단 모든 정책에는 순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우선순위와 민주노동당의 우선순위가 전적으로 같을 수 없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우선순위와 진보신당의 우선순위가 전적으로 같을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라는 이름에 한국현대정치사의 굴곡 때문에 슬그머니 섞여 들어가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환상적 결벽증을 서로 차지하려는 다툼 속에서, 상당수의 자칭 진보 인사들은 절차를 어기는 데서 정치적 출세의 기반을 추구하려는 버릇이 있다. 지사흉내와 열사숭배의 풍조 안에서 단일안건정치의 선동적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이 자체는 정치인의 출세전략으로서 옆에서 가타부타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행태를 평가하여 그들 가운데 지지할 대상을 선택해야 하는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이런 점들을 분별하는 안목이 두텁게 형성되는 편이 현실의 개선을 위해서 아주 중요하다. 그래야 시민 각자가 한 점에만 집착하고 몰두하는 편협한 의식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균형감각을 나름대로 형성해서 갖춘 위에 각종 정책들을 우선순위로 분별할 수 있고, 시민들 가운데 그와 같은 독자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 수가 늘어날수록 공론의 지평에서 어떤 일이 급선무고 어떤 일이 나중인지에 관해 집단적인 합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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