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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죽을 수 없어 공장에 들어갔고, 공장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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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들은 죽을 수 없어 공장에 들어갔고, 공장서 나왔다" [쌍용차 사태, 파장은⑤] 77일간 평택 공장에선 무슨 일이?
"상황실에서 알려 드립니다. 지금 복지동 1층 의무실에 의료진이 도착하였으니, 마음 다치신 분 빼고 아프신 분은 의무실로 내려오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상황실에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7월 30일 오후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노조 사무실의 조용하던 무전기를 타고 웃음일지 아픔일지 모를 무전이 흘러나왔다.

경찰 병력이 본격적으로 평택공장에 투입된 지 7일, 물과 음식물, 의료품 반입이 금지된 지 11일 만에 간신히 의료진이 들어온 것이다. 수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노사가 '끝장 교섭'을 하던 그 사흘의 기간 동안만 한해서 의료진의 출입은 '허가'됐다. 오랜만에 만난 의사 선생님들에게 조합원들은 팔과 다리, 허리 등을 내밀었다. 그곳의 77일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기에, 안 아픈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귀가 찢어진 이들도 있었다.

▲ 경찰 병력이 본격적으로 평택공장에 투입 된 지 7일, 물과 음식물, 의료품 반입이 금지된 지 11일 만에 간신히 의료진이 들어온 것이다. ⓒ이명익

만약 생채기난 마음에 붙이는 파스 같은 것이 있었다면, 의료진이 파업 조합원 숫자만큼 파스를 들고 왔어도 모자라지 않았을까. 7월 21일 이후 그들과 마찬가지로 공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 나 역시 그런 파스가 있다면 당장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에도 밖에도 마음 놓을 곳은 없었던 그 곳에 인권은 없었다

▲ 공장 안과 밖 어디에도 지친 몸과 마음을 놓을 곳은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명익
'전쟁터'라는 말은 그저 수사가 아니었다. 공장 안과 밖 어디에도 지친 몸과 마음을 놓을 곳이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경찰이 수시로 공장 옥상을 향해 퍼부었던 최루액은 여름 한낮 뜨거운 태양과 함께 공장 위 조합원들의 숨을 파고들었다. 용역 경비원이 수시로 쏘아대는 새총을 피하는 것은 결코 오락 게임이 아니었다. 채증을 위해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는 얼굴을 위협했다.

공장 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최루액과 뙤약볕, 하늘을 가르는 볼트와 너트를 피해 도장공장 안으로 들어와도 24시간 끊기지 않던 선무방송과 경찰 헬리콥터 소리는 5분의 단잠을 취할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옷으로 가리지 못한 몸 곳곳에 얇은 코팅 막처럼 입혀진 최루액은 씻지도 못하던 조합원들의 몸에 수포와 고름을 만들어냈다.

조합원들은 시도 때도 없이 마음으로 '기우제'를 지냈다. 모두가 "비라도 왔으면…"을 되뇌였다. 그런데 공장 안에 물이 끊긴 후부터는 하늘은 얄궂게도 한 방울의 비도 내려주지 않았다. 나도 비만 오면 오래도록 감지 못한 머리에 샴푸를 잔뜩 부어 옥상 위로 올라가리라 작정을 했는데, 기다리던 그 비는 파업이 모두 끝나고 공장 밖을 나오던 6일에야 기적처럼 쏟아졌다.

정말이지, 그 곳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권리란 없었다. 아니, 단 하나 있었다. 똑같은 주먹밥을 매끼 딱 하나씩 먹을 수 있는 권리, 한 여름 최소한의 물을 마실 수 있는 권리.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마저도 8월 3일, 공장 안 전기가 끊기면서 위협을 받았지만.

"야, 니가 기자냐?"…'연합작전' 벌이는 그들의 거짓말과 마주하다

기자라는 이유로 특별한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사 측이 고용한 용역 경비원과 직원들에게 파업 조합원보다 기자들이 더 얄미웠을지 모른다. 그들이 기자들을 향해 퍼붓는 볼트와 너트 세례가 말해주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가장 격렬한 대치가 이어지는 곳은 공장 안의 사람이 아니면 절대 볼 수 없는, 정문과 정반대편에 있던 TRE동(완성차 최종 성능 검사장)과 조립3, 4팀 공장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은 그들이 공격의 주체가 '사 측이 고용한 용역 경비원'이라는 것은 오직 내부에 있는 기자들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언론 접촉면이 노조보다 훨씬 넓었던 사 측은 계속 노조의 폭력만을 주장했다. 그러나 누구든 단 한 시간만 그 안에 들어와 있으면 그 뻔한 거짓말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경찰도 직원도 아닌, 용역 경비원이 노조를 향해 새총을 쏘았다. 아무리 널찍한 판자를 이용해 가려봐도 사진으로도 분명한 새총이 보였다. 회사가 계속 새총 사용을 부인하고 있을 때였다.

▲ 경찰도 직원도 아닌, 용역 경비원이 노조를 향해 새총을 쏘았다. 아무리 널찍한 판자를 이용해 가려봐도 사진으로도 분명한 새총이 보였다. ⓒ이명익

▲이런 사진들이 보도되면서 용역 경비원은 노골적으로 기자들을 겨냥했다. ⓒ이명익

이런 사진들이 보도되면서 용역 경비원은 노골적으로 기자들을 겨냥했다. 보도 완장과 '프레스(press)'라는 글자가 적힌 헬멧을 착용하고 옥상 위에 올라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욕설이 쏟아졌다.

"야, 니가 기자냐?"

그리곤 날아오는 엄지손가락보다 훨씬 크고 굵은 볼트와 너트들. 그러면서 강희락 경찰청장은 저 멀리에서 "진압 작전은 경찰만 한다"고 버젓이 말하고 있었으니, 안에 있는 사람들은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사실 그 곳이 전쟁터였다면, 파업 노동자들에게 '아군'은 하나인데, '적군'은 일종의 '연합군'이었다. 사 측과 경찰은 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조합원들과 용역 경비원의 새총 전쟁이 거세지면,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살수차와 헬기를 통해 땅에서 하늘에서 최루액을 뿌려댔다. 물론, 노조가 점거하고 있는 옥상 위에만 최루액이 쏟아졌다.

▲파업 노동자들에게 '아군'은 하나인데, '적군'은 일종의 '연합군'이었다. 사 측과 경찰은 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명익

"좋은 소식 있어요?"…절실한 질문, 그것은 기도였다

파업 조합원들이나 기자들이나 공장 안에 갇힌 상황은 똑같았지만, 기자라서 더 힘들었던 것은 "오늘 좀 좋은 소식 있냐"는 조합원들의 질문을 받을 때였다.

경찰이 도장1공장 옥상 장악에 성공했던 5일 전까지는 복지동의 노조 사무실은 노조의 상황실이자 기자들의 '프레스룸'이었다. 노조 사무실 밖 휴게실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는 조합원이 세상과 소통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는데, 뉴스에는 나오지 않는 소식을 조합원들은 참 궁금해 했다.

"어떻게 오늘은 좀 좋은 소식 있어요?"
"오늘 밖에서 집회한다던데 몇 명이나 온데요?"
"밖에 여론은 어때요?"


그러나 기자들도 조합원들과 마찬가지로 안에 갇힌 처지. 딱히 많은 정보가 있을리 없었지만, 좋은 소식을 바라는 기대에 찬 눈망울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설문조사를 했는데 공권력 투입에 반대한다는 여론이 52%가 나왔네요. 좋은 소식 있겠죠."

절실한 질문에 대한 뻔한 대답. 분명하지 못한 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참 답답했다. 아마 그들도 물으면서 이미 답은 알았을 것이다. 기자들에게 명확하고 특별한 답을 기대했던 것이라기보다, 그들은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기도였다.

▲기자들에게 명확하고 특별한 답을 기대했던 것이라기보다, 그들은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기도였다. ⓒ이명익

"명익아, 나 어떻게 해야 되냐?"…뭐라고 답해야 했던 것일까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마음 속 기도는 5일 경찰의 진압 작전을 전후로 불안감으로 급속하게 바뀌었다. 공장 안에 들어와 친해진 한 조합원이 내게 물었다.

"명익아, 어떻게 하냐. 나 여기서 나가야 되냐 말아야 되냐. 계속 싸워야하는 거냐? 너 기자잖아. 잘 알 거 아냐…. 좀 말해봐라, 가족들은 자꾸 나오라고 하는데 어쩌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모르겠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떨리고 있었다. 눈빛은 애원하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뭐라고 얘기했어야 했을까? 그때도 그랬지만, 파업이 끝난 뒤 일주일 여가 흐른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에게 뭐라고 얘기했어야 했을까? 그때도 그랬지만, 파업이 끝난 뒤 일주일 여가 흐른 지금도 잘 모르겠다. ⓒ이명익

술렁이는 것은 그 조합원만이 아니었다. 5일 있었던 경찰의 도장2공장 고립작전은 그런 의미에서 성공이었는지 모른다. 이미 2일 교섭이 결렬된 뒤 한 차례 흔들렸던 조합원들은 누구나 '올 것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립3,4팀 공장과 도장1공장이 경찰과 사 측의 손에 넘어간 뒤, 조합원들에게는 정말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도망칠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곳에서 제일 위험했던 것은 신나 수천리터가 아니었다. 신나와 페인트 등 인화성 물질보다 600여 개의 마음 속에 있던 불안감이 더 위태로워보였다.

▲ 5일 있었던 경찰의 진압 작전. 경찰은 이날 도장2공장 외의 모든 건물을 장악했다. ⓒ이명익

▲ 조립3,4팀 공장과 도장1공장이 경찰과 사 측의 손에 넘어간 뒤, 조합원들에게는 정말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도망칠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명익

사 측과 정부는 이들에게 백기투항이냐 목숨을 내놓을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투사'는 커녕 제대로 된 파업 한 번 해본 경험이 없는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이 갈림길은 마음을 옥죄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5일 밤은 참으로 지독하게도 길었고, 도장2공장 안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 사 측과 정부는 이들에게 백기투항이냐 목숨을 내놓을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투사'는 커녕 제대로 된 파업 한 번 해본 경험이 없는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이 갈림길은 마음을 옥죄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이명익

기뻐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던 합의

6일 나온 노사의 최종 합의안은 지도부가 조합원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자, 최대한의 선물이었다. 그 누구도 기쁨의 환호성을 지를 수 없고, 그렇다고 그 누구도 거부할 수는 없었던 합의. 한 가정의 평범한 남편이자 아빠였던 그들은 그 합의안을 숙명인 듯 받아들였다.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듯 보였다.

아마, 77일 전 그들이 '함께 살자, 정리해고 철회 총고용 보장'을 요구하며 처음 옷가지 등 짐을 싸 공장 안으로 들어올 때도 그랬을 것이다. 파업 막바지, 백기항복이냐, 죽음이냐의 갈림길에서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지 못했던 것처럼, 77일전에도 그들은 죽을 수는 없어 파업을 시작했을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 여기며.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 일하고 싶다는 욕심을 지키기 위한 길에 마주해야 하는 운명이란 생각보다 잔인하다. 20여 일 동안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며 느낀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그 운명의 그늘은 그들에게도, 또 다른 공장의 노동자에게도 끝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기쁨의 환호성을 지를 수 없고, 그렇다고 그 누구도 거부할 수는 없었던 합의. 한 가정의 평범한 남편이자 아빠였던 그들은 그 합의안을 숙명인 듯 받아들였다.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듯 보였다. ⓒ이명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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