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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청구회 추억' 육필 원고
인간 신영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 '청구회 추억'
신영복 교수의 영결식(1월 18일) 다음 날, 프레시안의 이근성 상임고문이 다음과 같은 사연을 보내 왔다. “고 신영복 교수의 옥중 서한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으로 선보이고, 얼마 후 신 교수로부터 당시 중앙일보에 근무하던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이 20년 전 사형선고를 받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생의 마감을 앞두고 남몰래 그간의 삶을 돌아보며
신영복의 '사색'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담론>까지
"20년의 옥고를 치르고 우리들 앞에 나타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그의 변함없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서 출판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을 때 그의 조용하면서도 견고한 정신의 영역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 긴 암묵의 세월을 견디게 하고 지탱해준 것은
신영복 교수 마지막 인터뷰 "먼 길 함께 걸었으면…"
햇볕 못 쪼이면 발병하는 '흑색종암'에 "담담합니다"
고(故)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지난 15일 밤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가르침은 여전히 우리에게 일깨움과 감흥을 주고 있습니다.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웹진 다들은 지난해 10월투병 중이던 신영복 교수와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고인의 마지막 인터뷰입니다.인터뷰는 웹진 다들(바로가기)의 발행인인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김영철 원장이 진
"우리라는 땅이 신영복이라는 산을 품었다"
[현장] 고(故) 신영복 교수 영결식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의 아들 신지용 씨가 오열하는 어머니 유영순 여사 손을 꼭 쥐고 아버지 영정 뒤를 좇았다. 이들 뒤로는 운구 행렬이 뒤따랐다. 발인식에 참석한 시민들은 신영복 교수가 떠나는 마지막 길에 헌화했다. 하얀 국화꽃이었다. 18일 성공회대 대학성당에서 진행된 고 신영복 교수 영결식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이날 영결식에는 영하의 날
신영복 "우직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다시 보는 강연] 고집 센 한국 사회, 바꾸는 힘은…"하방연대"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지난 15일 밤 지병으로 별세했다. 평소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지식인인 신 교수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그가 남긴 많은 가르침과 서예 작품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됐다. 프레시안도 초대 고문이자 필자로서 생전에 신 교수와 깊은 인연을 맺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신 교수는 지난 2006년 본지 창간 5주년 기념 강연을 하기도 했다
고(故) 쇠귀(牛耳) 신영복 선생님 영전에
[추도사] 꽃처럼, 바람처럼 가버린 선생께
찬바람 몰아치는 이 겨울의 한 가운데, 갑자기 불어온 한 줄기 삭풍이 우리의 귓전을 세차게 때리고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대의 큰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고, 이 사회의 모든 힘든 영혼들, 춥고 외로워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따듯하게 달래주던 신영복 선생님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2년 전 무렵 선생님이 몹쓸 병에 걸렸다는
신영복, 다시 처음처럼…
[손문상의 그림세상] 신영복 선생님을 추모하며
신영복의 일생을 사색한다
[기고] 한홍구 교수가 돌아본 신영복 선생의 삶
2016년 1월 15일 오후 9시 30분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가 서울 목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타계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성공회대학교 후배 동료인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지난 2006년 신 교수의 정년퇴임을 맞아 그의 삶을 회고하며 쓴 글을 '추모의 글'로 싣습니다.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 어느새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될 정도로 숨가쁘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처음처럼' 신영복 타계
장기수 출신 진보 원로…15일 자택에서 지병으로 숨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담론 등의 저서로 유명한 신영복(75)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가 15일 오후 9시 30분께 서울 목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다. 1941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난 신영복 교수는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무기 징역을 선고 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