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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의 의미를 망각한 빈볼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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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의 의미를 망각한 빈볼 지시 [베이스볼 Lab.] 언제나 팬을 생각하라
‘프로야구’는 선수와 팬 중심의 스포츠 산업입니다. 돈을 받고 플레이하는 선수와 돈을 내고 경기를 보러 오는 팬이 있기에 프로야구가 성립합니다. 선수들은 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경기를 보여주고, 관중은 수준 높고 재미있는 야구를 보기 위해 기꺼이 돈을 내고 소비 행위를 합니다. 그래서 프로야구의 주연은 감독이나 구단 고위층이 아닌, 야구를 하는 선수와 보는 관중입니다.

그냥 야구가 아닌 ‘프로’ 야구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선수들은 끊임없이 기량을 갈고닦아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줄 의무를 갖습니다. 돈을 받고 뛰는 프로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연습할 시간을 쪼개어 미디어와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하는 것도 프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팀은 물론 상대 팀 선수도 다치지 않게 배려하는 건, 몸이 재산인 프로라는 사실을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 선수들은 장차 프로가 될 아마추어 야구 선수들의 롤모델이자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아마추어 선수들은 밤마다 프로 경기가 담긴 동영상을 보고 또 보면서 배웁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보고 따라 하듯, 프로 선배들의 기술적인 부분부터 사소한 행동까지 고스란히 모방하곤 합니다. 그래서 프로 선수들은 필드 위에서 최상의 플레이를 보여줘야 합니다. 단지 야구 기술만이 아니라 야구를 대하는 자세, 매너에서도 어린 후배들이 보고 따를 만한 모범이 되어야 하죠.

프로야구는 ‘프로’기에 항상 지켜보는 관중을 전제로 합니다. 경기 전날 미리 선발투수를 예고하는 건, 찾아오는 관중들을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경기를 앞두고 이런저런 행사와 시구 등을 하는 것도 관중들을 위해서죠. 시즌이나 큰 경기를 앞두고 미디어데이 행사를 개최하는 것도 ‘프로’이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돈 내고 찾아온 관중들이 보고 있기에, 크게 뒤지고 있는 경기에서도 선수들은 최선을 다합니다. 시간 내서 찾아온 팬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있기에, 프로팀이라면 정당한 방법으로 승리를 추구하고 지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패배를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죠. 그러니까 ‘프로’ 야구인 겁니다.

KBO가 올 시즌 마련한 ‘선데이나이트 베이스볼’도 프로야구가 왜 ‘프로’인지 보여주는 이벤트입니다. 사실 구단 직원, 방송사와 미디어 관계자들 입장에선 경기가 늦게 끝나서 좋을 게 없죠. 이런 건 어디까지나 야구 흥행을 위한, 팬과 선수를 위한 이벤트입니다. 1경기만 시간대를 따로 편성해서 보다 많은 팬이 야구를 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선수들에게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도록 하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이런 경기는 해당 팀 팬들만이 아니라 모든 야구팬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서울, 대구, 광주, 부산의 어느 터미널을 가도 이 시간에는 같은 경기를 틀어놓고 봅니다. ‘선데이나이트 베이스볼’은 그날 KBO리그를 대표하는 경기인 셈입니다. 당연히 그 어떤 경기보다도 최상의 실력을 발휘하고, 수준 있는 야구를 선보이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12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선데이나이트 베이스볼은 ‘프로’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경기였습니다. 15-3의 큰 점수차 때문은 아닙니다. 점수차가 크게 벌어졌어도 끝까지 온 힘을 다한 경기를 펼친다면 프로입니다. 일찌감치 승패가 갈린 경기라도 멋진 호수비나 홈런포로 관중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면 프로다운 야구라고 할 수 있죠. 문제는 이 경기 5회말 롯데 공격에서, 프로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 연출됐다는 겁니다. 롯데 황재균의 몸에 날아든 빈볼과 벤치 클리어링, 그리고 한화 벤치의 군색한 항의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한화 김성근 감독은 “빈볼이 아니라 제구가 잘 안 돼서 맞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빈볼이 날아들면 누구보다도 공을 맞은 타자와 정면에서 본 심판이 잘 압니다. 황재균은 자신이 맞은 공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고, 심판들도 빈볼임을 확신했기에 1차 경고 없이 바로 퇴장을 지시했습니다. 이날 경기를 중계한 해설진도 고의성이 명백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사실 프로에서 뛰는 투수가 15-1의 점수차에서 공 3개가 모두 제구가 안 되고 타자 몸을 맞힌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죠. 그 정도 점수차면 오해를 피하기 위해 애초에 몸쪽 공을 연달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황재균의 몸에 맞는 볼은, 명백한 빈볼입니다.

빈볼을 던진 한화 투수 이동걸이 프로답지 못했던 걸까요?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동걸 투수는 이날이 이번 시즌 1군 무대 첫 등판이었습니다. 통산 9시즌 동안 1군에서는 단 22경기에 등판한 만년 2군 투수에게, 1군에서 던지는 공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할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든 최상의 공을 던져 자신을 증명하고 기회를 잡으려고 할 겁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1군 마운드 기회를 빈볼과 퇴장으로 날려버릴 리가 없습니다.

거의 모든 팀이 그렇지만, 볼배합은 벤치의 사인에 따라 이뤄집니다. 황재균에 몸맞는 볼을 던질 때도 포수 허도환은 벤치를 쳐다본 뒤 투수에게 사인을 전달했습니다. 1구째는 몸쪽 바짝 붙은 볼이었습니다. 2구째는 거의 맞힐 뻔했습니다. 3구째 사인이 전달된 순간, 방송사 화면에는 한쪽 얼굴을 눈에 띄게 찡그리는 이동걸의 표정이 잡혔습니다. 누구라도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 지을 법한 표정입니다. 그리고 바로 몸에 맞는 볼이 황재균의 엉덩이로 향했습니다.

ⓒMBC스포츠 화면 캡처

빈볼은 거부할 수 없는 지시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이동걸에게는 시키는 대로 빈볼을 던지고 소중한 1군 등판 기회를 퇴장으로 날리거나, 지시를 거부하고 2군으로 내려가는 복불복의 선택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이동걸 투수를 탓할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한화 선수들을 탓할 일도 아닙니다. 피해자인 황재균이 한 매체와 한 인터뷰에 따르면 한화 선수들은 벤치 클리어링을 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사실 올 시즌 전까지만 해도 한화 선수단이 그라운드 위에의 플레이 때문에 논란을 사거나 비난을 받은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사태에 대해 한화 김성근 감독의 생각은 어떨까요. 김 감독은 지난 2010년 5월초 두산전을 앞두고 기자들과 인터뷰에서 스포츠 정신을 역설했습니다. 김 감독은 전날 경기에서 톱타자 정근우가 몸에 맞는 볼로 교체된 일을 언급하면서 “스포츠는 공정한 경쟁 속에 발전할 수 있다”, “상대를 맞히는 행위는 경쟁이 아니다”라고 일갈했습니다. “야구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빈볼을 3개나 던지는 건 몰상식한 것”이라는 비판도 했습니다. 공정한 경쟁을 중시하는 김성근 감독이 12일의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한 대목입니다.

프로야구에서 몸에 맞는 볼이나 벤치 클리어링이 절대악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몸에 맞는 볼은 타자의 숙명이고 위협구는 투수의 생명입니다. 벤치 클리어링이 이따금 관중들에 볼거리 기능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몸에 맞는 볼과 벤치 클리어링이 정당화되려면 그럴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심판들은 난투극이 벌어질 때면 항상 ‘스토리’가 있게 마련이며, 그래서 불상사를 막기 위해 경고와 퇴장 조치를 적절히 사용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야구의 불문율을 총정리한 [The Code]라는 책에서는 욕설과 야유 등 상대를 모욕하는 행위, 정직하지 못한 플레이, 팀 동료에 대한 보호, 점수차가 큰 경기 후반 도루와 번트 등 빈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상황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2일 한화-롯데전의 빈볼시비는 개연성 있는 ‘스토리’가 없었습니다. 굳이 스토리가 있다 치면 기승전 없이 바로 결말로 연결되는, 임성한 드라마 같은 전개였습니다. 황재균과 롯데의 플레이 중 어떤 부분이 몸쪽으로 공이 날아들게 했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큰 점수차에 도루를 했기 때문에? 10일 경기에서 롯데는 8-2로 앞서고 있던 경기를 역전당했습니다. 12일 경기에서 황재균의 도루는 1회에 나왔습니다.

게다가 김성근 감독이야말로 야구의 불문율을 파괴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온 지도자입니다. 김 감독은 SK 시절 큰 점수차로 앞선 경기 후반에도 자유롭게 번트와 도루를 감행했습니다. 9회에는 아웃카운트 별로 투수를 교체하면서 맞은편 덕아웃을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일도 잦았습니다. 그런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팀이 불문율 때문에 빈볼을 던졌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대체 왜 빈볼을 던졌는지는, 빈볼을 지시한 당사자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퇴장당해야 할 사람은 빈볼을 던진 이동걸이 아니라 지시한 사람이겠죠. 빈볼 지시자는 힘 없는 선수를 방패막이로 삼아 뒤에 숨어 모르는 척 할 게 아니라, 잘못을 시인하고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리더는 선수를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리더는 선수 탓을 하지도 않습니다. 리더는 책임을 집니다. 제가 어느 강연에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이날 경기는 모두가 피해자였습니다. 두 번이나 빈볼을 맞은 황재균과 어쩔 수 없는 지시 때문에 소중한 1군 등판 기회에 퇴장을 당해야 했던 이동걸 모두 피해자입니다. 멋진 타격쇼가 논란에 묻혀 버린 롯데 선수들도, 끝까지 홈런포로 추격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가해자가 되어버린 한화 선수들도 피해자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이날 경기를 지켜본 야구팬입니다. 프로다운 멋진 경기를 기대하며 돈 내고 시간 내어 경기장을 찾은 사직 관중들은, 납득하기 힘든 빈볼과 맥빠진 경기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일요일 저녁 시간에 부푼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본 시청자들 역시 보기 흉한 빈볼 사태에 기분을 망쳤습니다. 야구 흥행을 위해 정성껏 ‘선데이나이트 베이스볼’ 이벤트를 마련하고 홍보한 KBO도 경기가 빈볼로 얼룩지면서 손해를 입었습니다.

다시 한 번 프로야구가 왜 ‘프로’인지 생각할 때입니다. 프로야구에는 양팀 선수와 감독만 있는 게 아닙니다. 돈 내고 시간 내서 찾아온 관중과 시청자가 있고 아마추어 선수들이 지켜봅니다. 항상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는 팬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선수들은 자신의 플레이가 팬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생각해야 하고, 감독도 단순 승패만이 아니라 팬들과 프로야구판 전체를 생각하면서 팀을 이끌어야 합니다. 팬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단지 이기고 지는 것만 중시하는, 야구만 잘하고 성적만 내면 그만인 선수나 감독은 프로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선수들이 중심이 되고 팬들이 즐거워야 진짜 프로다운 프로 야구입니다. 프로의 의미를 망각하는 지도자는 프로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12일 롯데 이종운 감독은 진정한 프로의 가치를 보여줬습니다. 이종운 감독은 아마추어 감독을 오래 지내다 올해 처음 프로 사령탑에 오른 ‘초보’ 감독입니다. 이 감독이 이끈 롯데는 잇단 몸에 맞는 볼에도 빈볼로 맞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선수 보호를 위해서는 빈볼로 맞대응하는 게 야구 코드에 부합하지만, 경기장을 찾은 관중과 팬들을 위해 자제했습니다. 팬들을 생각하는 프로다운 대응이었습니다.

또 이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를 통해 “앞으로 우리 선수를 가해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는 똑같이 위해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날의 빈볼로 마음이 상했을 롯데 선수들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이 감독은 “야구로 승부하자”며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대결하자는 메시지도 전했습니다. 야구 팬과 롯데 선수들, 그리고 야구 자체를 중심에 둔 이종운 감독의 말은 ‘프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젊은 감독들이 이끄는 앞으로의 프로야구는 위장오더, 경기지연, 빈볼 등이 난무하던 과거의 구태와 결별하고 보다 ‘프로’다운 모습으로 발전해 나갈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프로야구는 선수가 하고, 팬들이 보는 스포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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