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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대 사태, 사형도 고려" 못 말리는 전두환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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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건대 사태, 사형도 고려" 못 말리는 전두환 정권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28> 6월항쟁, 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프레시안 : 1986년 하반기에 전두환 정권은 개헌 움직임을 분쇄하기 위해 다양한 공세를 취했다고 전에 이야기했다. 그 부분을 짚어봤으면 한다.

서중석 : 1986년 봄 개헌 열기가 높아졌다. 또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이 초원의 불길처럼 시민 사회에 번지고 부천서 성고문 사건도 시민들의 분노를 사면서 시민 의식이 고양됐다. 모두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는 걸 절감하게 한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개헌 열기를 무산시키고 전두환·신군부 헌법에 의해 권력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기 위한 전두환의 총공세를 저지하기는, 그 필요성은 절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전두환은 전두환·신군부 헌법에 의해 권력이 계승돼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퇴임 후 자신의 안전 문제 때문이었다. 전두환은 5·3 인천 사태 이후 총공세를 폈는데, 그걸 살펴보기 전에 잠깐 아시안게임을 언급하고 넘어가자.

1986년 9월 20일부터 16일간 계속된 제10회 아시안게임은 서울에서 처음으로 열린 중요한 국제 대회였다고 볼 수 있다. 27개 국가, 선수·임원 4839명이 참가했는데 한국 선수들은 금메달 93개, 은메달 55개, 동메달 76개라는 빼어난 성적을 올리며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86아시안게임은 2년 후에 열릴 서울올림픽 예비 대회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이 아시안게임은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유치할 때부터 정권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이 강했는데, 1986년 하반기에 전두환이 총공세를 펴는 데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전두환의 1986년 하반기 총공세 또는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초토화 작전은 여러 형태로 전개됐다. 하나는 아시안게임이 한창이던 9월 하순부터 끊임없이 비상 조치 계획을 작성하면서 그와 관련된 활동을 편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신민당 유성환 의원의 원내 발언을 국시 사건으로 만들고 건국대(건대) 사태 등을 통해 극우 반공 체제를 다진 것이었다. 1970년대에 유신 정권이 총력 안보 태세를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유신 체제 지키기에 최대한 활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두환 정권은 유성환 의원의 국시 발언 사건, 건대 사태 등을 극우 반공 체제를 강화하고 개헌 투쟁을 무력화하는 데 최대한 활용했다. 똑같은 방식으로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을 금강산댐 사건으로 이용했고, 김일성 사망설도 같은 방식으로 이용했다. 전두환 정권은 5·3 인천 사태 직후부터 민통련을 비롯한 재야 운동권 그리고 학생 운동권 등을 탄압하는 한편 야당을 탄압하고 분열시키는 책동을 더욱 강화해나갔다.

"국시는 반공 아닌 통일" 유성환 발언에 '잘 걸렸다' 쾌재 부른 전두환

ⓒ오월의봄
프레시안 : 유성환 의원의 국시 발언 사건,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1986년 10월 13일 신민당 김현규 의원이 국회에서 강경 발언을 했다. 김 의원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스포츠 방송을 통한 대중 조작, 영동 일대의 호화 유흥업소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황색주의 등 정부의 3S(스포츠, 섹스, 스크린) 정책, 우민 정책이 범람하고 있다고 신랄히 규탄했다. 그뿐 아니라 "생사여탈권을 어느 한쪽이 쥐고", "존속할 가치와 자격이 없는 정권", "군사 정권 종식을 위한 국민과의 연대 투쟁" 등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다.

민정당은 발끈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민정당이 퇴장하는 것으로 끝났다. 민정당은 발언 취소 및 사과를 요구했다가 그 부분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김현규 발언 문제는 일단락됐다.

그런데 큰 문제가 되는 발언이 그다음 날 나왔다. 10월 14일 유성환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총리,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입니까? 반공을 국시로 하면서 올림픽 때에는 동구 공산권 나라들도 참가시킬 것입니까? 나는 반공 정책을 없애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것에 이어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며, 어떤 체제도 민족에 우선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유 의원은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반문명적, 반인간적, 천인공노할 범죄며 이미 자식을 교육하고 있는 모든 학부모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살아갈 희망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런 발언도 했다. "부정, 사기 공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한국독립기념관에 와 보십시오."

그야말로 전두환 정권의 아픈 곳을 콕콕 찔러댔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이었다. 따라서 신민당 역시 유성환 의원의 발언은 당의 의견이라고 옹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15일) 정부는 유성환 의원 체포 동의 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프레시안 : 현직 국회의원이, 상식에 부합하는 발언을, 그것도 국회 본회의에서 했는데 왜 문제가 된 것인가. 전두환 정권의 속내는 무엇이었나.

서중석 : 1986년 봄에 개헌 정국이 조성되지 않았나. 전두환 머릿속에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걸 뒤집어엎고 1987년에 있을 차기 대선을 자기 복안대로 끌고 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 들어 있었다. 유성환 발언을 듣는 순간 전두환은 유성환이 자신의 그물에 걸려들었다며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상식선에서 보면 '그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고 하겠지만, <전두환 육성 증언>에 그대로 나온다. 유성환 발언 이틀 후인 10월 16일 전두환은 청와대 회의에서 "이번에 신민당이 잘 걸려들었어요. (…) 내가 정국을 주도해서 긴장시킬 방안이 없겠느냐 생각해오던 참이었는데 유성환이가 들어서 도와주는 셈"이라고 말했다.

전두환이 이 얘기를 한 16일 그날 밤 국회의장 이재형은 본회의 장소를 바꾸고 경호권을 발동, 800여 명의 사복 경찰을 동원해 야당 의원들의 출입을 봉쇄했다. 민정당은 유 의원 발언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체포 동의안을 단독으로 기습 통과시켰다. 17일 새벽 유 의원은 전격적으로 체포, 구속됐다.

발표할 원고를 대정부 질문 직전에 기자들에게 배포한 건 당연히 면책특권에 포함된 행위였고, 40년 동안의 관행이기도 했다. (10월 15일 서울지검은 유성환 의원의 국회 본회의 발언 및 대정부 질문 원고 내용을 문제 삼아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 검찰은 유 의원의 대정부 질문 원고가 본회의 발언 전에 국회 기자실에 배포돼 국회 밖으로 유출됐기 때문에 면책특권 대상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편집자') 그러나 전두환에게는 기다리던 차에 잘 터진 사건으로 보였다. 전두환의 폭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건대 사태로 나타났다.

그물에 걸려든 큰 사건으로 전두환에게 보였을 건대 사태

프레시안 : 젊은 독자들 중에는 건대 사태가 생소한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건대 사태는 10월 28일 애학투(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결성식부터 10월 31일 경찰의 육·해·공 작전에 의해 해방 후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인원을 체포, 구속한 것까지를 가리킨다. 전두환이 예기하지 않았던 건대 집회 사건을 계기로 학생 운동에 대한 초토화 작전 또는 총공세를 편 것, 그게 건대 사태다. 그 점에서 유성환 의원의 국시 발언 사건과 비슷하게 전두환한테는 그물에 걸려든 큰 사건으로 보일 수 있었다.

10월 28일 건국대에서 27개 대학 학생 약 2000명이 참가해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결성식 및 친미 독재 타도와 분단 이데올로기 분쇄를 위한 실천 대회'가 열렸다. 학생 운동 쪽 대회에 긴 이름이 많지만, 이것처럼 이름이 긴 건 드물다. 이 집회를 이해하려면 대학가의 운동권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이 시기에 학생 운동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1986년 3월 18일 서울대에서 반전 반핵 투위(반전 반핵 평화 옹호 투쟁위원회)가 발족했고, 3월 29일에는 구학련(구국학생연맹)이 비밀리에 조직됐으며 4월에는 그 행동 단체로 자민투(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가 발족했다고 지난번에 얘기하지 않았나. 자민투가 탄생한 그 4월에 민민투(반제 반파쇼 민족 민주 투쟁위원회)가 조직됐다. 민민투는 기관지로 <민족 민주 선언>을 발간했다. 4월 29일에는 각 대학 민민투의 연합 조직으로 '전국 반제 반파쇼 민족 민주 학생연맹', 약칭 전민학련 또는 민민학련이 연세대에서 결성됐다. 전민학련은 자신들이 1985년에 조직된 전학련(전국학생총연합), 삼민투(민족 통일 민주 쟁취 민중 해방 투쟁위원회)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임했다.

자민투가 처음에 조직됐을 때 서울대에서는 자민투가 우세했다. 그렇지만 다른 대학들에는 민민투만 있었다. 자민투는 다른 대학에 조직을 심기 위해 유인물을 보내는 등 각종 선전 활동을 진행했다. 전민학련, 그러니까 민민투 쪽의 두꺼운 벽을 뚫기 어려워 보였는데도 자민투의 조직 확대 작업은 성과를 거뒀다. 여름 방학을 거치면서 많은 대학이 자민투 노선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면서 고려대에서는 애국학생회, 연세대에서는 반미구국학생동맹이 출범하는 등 구학련과 같은 성격의 조직이 다른 대학에서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10월에 들어와 반제 투쟁론 계열, 즉 자민투 쪽은 큰 시련에 부닥쳤다. 10월 13일 서울대 대자보 사건이 터진 것이다. 북한에서 나온 <민주 조선> 사설을 그대로 옮겨 적은 대자보를 일반 학생이 다니는 곳(서울대 인문대 5동 건물 벽)에 붙였다는 것 자체가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지금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당시만 해도 그랬다. 구학련에서는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의 첫 시도로 반공 이데올로기에 충격 요법으로 대응해보자는 의미에서 그러한 대자보 작업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대자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탄압할 만한 큰 사건을 찾고 있었던 전두환 정권에 좋은 빌미가 됐다. 구학련 관계자들은 이미 5월부터 계속 체포되고 있었는데, 서울대 대자보 사건으로 구학련 조직은 매우 약화됐다.

그런 속에서도 여름 방학 중에 많은 대학의 운동권이 자민투 노선으로 기울자, 구학련은 민민투 조직을 끌어들여 전민학련을 대신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새 조직을 만드는 문제는 10월에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그 결과 새 단체 이름을 애학투로 정하고 10월 28일 건국대에서 결성식을 열기로 했다. 대회 장소를 건국대로 정한 건 당국이 눈치를 채기 어렵고 평지인 데다가 출입구도 많아서 드나들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애학투 발족 선언문에 서명한 대학은 자민투보다 민민투 쪽이 더 많았고 부산대 자민투, 인천대 민민투 등 지방 대학에서도 가담했다.

건대에 가둬놓고 초토화 작전…언론은 입맛대로 과장 보도

프레시안 : 건대 사태, 어떻게 시작됐나.

서중석 : 10월 28일 건대에서 아주 긴 이름의 학생 집회가 진행되고 나서 전두환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수상,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 대사 등의 허수아비 화형식이 열렸다. 마지막으로 구국 행진이 선포된 순간 경찰 병력이 정문과 후문 등 여러 곳에서 들이닥쳤다. 그때까지 경찰은 건국대에 들어오는 여러 대학 학생들에 대해 검문검색을 하지 않았다. 자유스럽게 들어가게 한 다음에 구국 행진이 선포된 순간 일망타진하려고 일시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런데 저녁이 됐는데도 에워싼 병력을 철수시키려 하지 않았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학생들은 이날 농성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집회에 나왔다. 경찰이 포위하자 일부 학생은 담을 넘거나 해서 피신했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이 건물, 저 건물에 들어갔다. 계획에 없던 농성에 돌입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전두환 정권의 1단계 작전은 성공했다.

2단계 작전은 정권에서 따로 시키지 않아도 잘돼갔다. TV뿐만 아니라 신문들도 '과격 용공분자의 난동 사건'이라며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본의 아니게 농성에 참여하게 된 학생들은 '건대 농성은 미리 계획된 공산 혁명분자들의 점거 농성'이라고 보도하는 TV 화면을 두 눈으로 봐야 했다. 그렇지만 마땅히 항의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농성장에서 손나발을 만들어 "애국 시민 여러분,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꿈꾸는 애국 학생들입니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언론은 계속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만 과장해서 보도했다. 그런데 애학투의 유인물 가운데에는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이었나.

서중석 : '전두환 일당 장기 집권 음모 분쇄와 민주 제 권리 쟁취 투쟁 선언문'에서 학생들은 "직선제 쟁취 투쟁을 올바로 수용해야 합니다. 직선제 쟁취 투쟁은 지금 대중 운동의 수준에 있어서 대중 투쟁을 행동화시키기에 유용한 슬로건인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해서도 "신민당의 직선제 쟁취 투쟁에 지지를 보내며 …… 함께 뭉쳐 투쟁의 횃불을 높이 올립시다"라고 호소했다. 민주 대연합 논리의 틀이 학생 운동 주류에서 나온 것이다. 학생들은 올림픽을 남북이 공동으로 개최하자는 제안도 했다.

그런 가운데 전두환 정권은 3단계, 즉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10월 29일 일부 농성장에서 물도, 전기도, 외부와 연결된 전화도 끊겼다. 식량도 문제였다. 사전에 농성을 계획하고, 음식을 비롯한 생필품을 구비하고 들어간 게 아니지 않았나.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공포감에 휩싸이는 학생도 일부 있었다.

10월 31일 무장한 경찰 병력 7950명이 육·해·공 진압 작전을 펼쳤다. 먼저 헬기 2대가, 학생 시위 진압에 최초로 등장한 헬기라고 하는데, 중앙도서관 위에서 사과탄과 소이탄을 퍼부었다. 밑에서는 소방차가 물을 뿌렸다. 그것에 이어 전경들이 진입했다. 일부 학생들은 의자 등에 불을 지르고 화염병을 던지며 완강히 저항했다. 그런 가운데 헬기가 학생회관 건물에 투항을 권유하는 전단을 뿌리며 방송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지칠 대로 지친 일부 학생들은 백기를 흔들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 발사와 몽둥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애가 탄 학부모들은 전경들에게 자녀들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자고 고함을 쳤지만, 최루탄 세례를 받았을 뿐이다.

이 같은 아수라장 속에서도 학교에서 염려하던 본관 4층 컴퓨터실과 1층 학적과 사무실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건물 안벽에는 '반공 이데올로기 깨부수고 남북 통일 이룩하자' 등의 구호가 여기저기, 어지러이 적혀 있었다. 오전 10시 20분경 작전은 끝났다. 집회가 시작된 지 3일 만이었다.


▲ 건대 농성 진압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986년 10월 31일 자 11면. ⓒ경향신문

1288명, 단일 사건 최대 구속…장세동 "한두 명 사형 선고 고려"

프레시안 : 구상대로 일망타진한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에게 어떤 처분을 내렸나. 그리고 이 사건은 대학가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황소 30'으로 명명된 이 작전에서 여학생 513명을 포함해 무려 1525명이 연행됐다. 그런데 애학투와 관련이 없는 건국대 학생들 또는 학생이 아닌 시민이 연행된 경우도 있었다. 연행자 중 53명은 이런저런 부상으로 경찰병원에 후송됐다. 연행자 1525명 중 1288명(1265명은 현장 구속, 23명은 나중에 추가 구속)은 구속됐다. 이건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를 통틀어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구속이라고 당시 얘기됐다. 구속된 1288명 중 893명은 기소 유예로 풀려났고 395명이 기소됐는데, 어느 것이나 말 그대로 기록적이었다. 한편 건대 사태가 일어났을 때 서울대 등 19개 대학 학생 8000여 명은 강제 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건대에서 학생들이 대거 연행, 구속된 지 3일 만인 11월 3일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은 '공산 혁명분자 폭력 난동 사건'으로 이 사건 명칭을 통일해서 쓰겠다고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학생들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로 걸지 말고 방화, 파괴, 침입 등의 죄목을 학생들에게 적용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집시법을 적용하면 정치범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것에 이어 11월 15일 장세동 안기부장은 안기부 간부 회의에서 "건국대 사태와 관련해 한두 명 정도에게는 사형 선고까지 고려하라"고 지시했다.

건대 사태는 학생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정권 수뇌부의 지휘 아래 헬기까지 동원되고 최루 가스가 하늘을 뒤덮고 소방차에서는 물을 뿜어대지 않았나. 그러한 육·해·공 작전과 연행, 구속은 학생들에게는 너무나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이 일로 많은 학생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구속되지 않은 학생들은 수배자로 쫓기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육·해·공 진압 작전 모습은 TV에 그대로 나와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두려움을 줬다. 전두환 정권이 건대 사태 관련 학생들을 용공 좌경 세력으로 몰아세운 것이 학생들과 각 대학의 학생 운동 조직에 준 타격도 컸다. 그렇게 된 데에는 학생들이 내세운 반미와 연북(聯北) 주장이 일반 시민들에게는 너무나 급진적인 것으로 다가간 점도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애학투 집회에서 직선제 쟁취 투쟁을 내세우고 "신민당의 직선제 쟁취 투쟁에 지지를 보내며 (…) 함께 뭉쳐 투쟁의 횃불을 높이 올립시다"라고 호소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6월항쟁에서 직선제 쟁취라는 단일 구호 아래 민주 대연합이 이뤄지게 되는데, 그건 바로 학생 운동 주류가 직선제 쟁취를 지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대 사태로 자민투와 민민투, 곧 NL과 CA는 또다시 첨예한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11월에 일부 대학에서 학생회장 선거가 치러졌다. NL 노선을 표방한 총학생회 후보들은 비폭력 평화 투쟁, 학원 민주화, 민주 정권 수립 등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그와 달리 CA 노선을 내세운 총학생회 후보들은 1987년 대선 기간을 혁명적 시기로 규정하고 제헌 의회 소집 투쟁 및 그와 연결된 폭력 투쟁도 불사한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투표 결과 NL 쪽 후보들이 대거 당선됐다. 그렇게 해서 학생들이 민주 대연합에 중요한 한 축으로 동참할 수 있게 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스물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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