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민주당 대표 경선을 흔든 바블러 바람
오스트리아 ―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미국, 소련 등 연합국의 분할 통치 아래 놓였고, 그래서 분단될 위험이 높았던 나라. 그러나 한반도와는 달리 좌우를 각각 대표하던 두 정당, 사회민주당과 국민당의 지혜로운 대처로 분단을 피하고 오랫동안 냉전 양 진영으로부터 중립국으로 인정받던 나라. 오스트리아 현대사가 이렇게 동시대 다른 많은 국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된 것처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도 특이한 데가 있다. 이 당은 19세기 말에 '사회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할 때부터 독일 사회민주당과 자매 사이였지만, 오스트리아 당은 독일 당에 비해 늘 이념상으로 더 좌파적이었고 정치적으로 더 유능했다. 양차 대전 사이에 수도 빈에서 사회민주노동당 시 정부가 펼친 정책들만 봐도 그렇다('붉은 빈'). 비록 1930년대에 오스트리아에도 파시스트 정부가 들어서면서 '붉은 빈'은 단명하고 말았지만, 이는 전후에 등장할 복지국가의 원형을 제시한 위대한 실험이었다. 전후에 가까스로 분단을 피하고 나서도 사회민주당(이 무렵에는 당명이 '사회당'이었다)이 걸어온 길은 다른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는 구별되었다. 전후 초기에 사회당은 국민당이 주도하는 대연정에 참여하여 핵심 산업 국유화와 노동권 강화를 밀어붙였고, 뜻밖에도 당시 오스트리아 우파는 이를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는 유럽 내에서 공공부문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다. 신자유주의가 한창 첫 걸음을 뗄 무렵이던 1970년대에도 오스트리아만은 분위기가 달랐다. 이때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빌리 브란트, 올로프 팔메와 함께 사회민주주의가 배출한 마지막(?) 거인 정치가였던 브루노 크라이스키의 주도 아래 드디어 단독 집권에 성공했다. 영국에서 케인스주의가 무너지고 스웨덴 복지국가조차 흔들리던 시기인데도 크라이스키 정부는 임기 내내 복지국가를 확대했고,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를 강화했다. 비서구권의 미래에도 열띤 관심을 보인 크라이스키 총리는 남한과 북한의 대화 중재에 발 벗고 나서기까지 했다. 이런 독특한 이력 때문인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1991년에 새로 정한 당명)은 한 동안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로부터 비켜나 있었다. 사실 이 당도 1990년대 말부터는 집권 중에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과 유사한 정책을 펼쳤다. 복지 예산을 줄이기 시작했고, 공공부문도 야금야금 사유화했다. 그럼에도 그간의 후광 덕분에 좌파의 유일 대변자 지위를 굳건히 유지하는 듯 보였다. 가령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전 대표 오스카 라퐁텐이 다수 당원들과 함께 탈당해 좌파당 창당에 합류한 것과 같은 일은 오스트리아에서는 꿈도 꿀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 대표 경선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렌디-바그너와 도스코질의 양강 대결 구도를 뒤흔든 바블러 시장 도스코질과 마찬가지로 이민 정책을 통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정책 방향은 도스코질 주지사와 정반대였다. 도스코질이 국경 통제를 강화하고 이민 장벽을 높인 데 반해 바블러는 이런 이민 통제 조치의 비인간성을 매섭게 비판하면서 트라이스키르헨에 정착하려는 난민을 환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1973년생인 바블러는 16살 때 사회민주당 청년조직인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고, 1995년에 처음으로 트라이스키르헨 시의원이 되기 전까지는 정비공으로 일했다. 바블러가 2014년에 마침내 트라이스키르헨 시장에 당선되기까지 지역 정치가로 성장하던 시기는 신자유주의와 그 아류인 '제3의 길' 물결이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온 세상을 휩쓸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바블러는 처음 입당하던 때의 신념, 즉 사회당(당시 당명)이 진짜 '사회주의'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건히 견지했다. 바블러의 대표 선거 공약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바블러 후보는 트라이스키르헨의 이민-난민 정책을 전국으로 확대하겠다고 약속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적 재분배 정책을 다시 강화하겠다고 천명했다. 여성 종업원의 임금을 차별하는 기업에 벌금을 부과하고, 당장 요금을 내지 못하는 가정이라 할지라도 전기나 가스 공급을 끊지 못하도록 보편적 에너지 이용권을 보장하며, 아동수당을 신설하고, 저소득 가정 자녀에게 무상급식을 실시하며, 노인 돌봄 예산을 증액하겠다고 공약했다. 또한 에너지 기업의 과도한 수익을 제한하고, 부동산 투기를 금지하며, 오스트리아판 그린 뉴딜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Fabian Lehr, "Will a Socialist Lead Austria's Social Democrats Again?", <Jacobin>, 2023. 4. 21) 바블러가 이런 공약을 내걸며 대표 경선에 뛰어들자 사회민주당에는 모처럼 당원 가입이 쇄도했다. 투표권을 갖기 위해 부랴부랴 입당한 이들이 대략 1만 명이었는데, 사회민주당 당원이 총 14만 명 가량임(오스트리아 총인구는 약 900만 명)을 감안하면 상당한 숫자다. 그 중 다수는 그간 사회민주당에 거리를 두다가 바블러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지기 위해 입당을 결행한 좌파 성향 유권자들이다. 말하자면, 바블러를 지지한 3만 3000여 명은 오랜만에 존재감을 드러낸 사회민주당 내 좌파일 뿐만 아니라 사회민주당 안팎에 걸쳐 재구성되고 있는 새로운 오스트리아 좌파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자유당의 극우화 말고는 바깥 세상에 알릴 정치 뉴스가 별로 없었던 나라가 갑자기 들썩이기 시작한 것이다.스티리아를 중심으로 성장 중인 오스트리아 공산당
사실 '갑자기'라는 말은 잘못됐다. 얼마간 조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정부 수준이기는 하지만, 사회민주당 왼쪽에서 이미 변화의 신호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 주역은 2000년대부터 슈타이어마르크 주를 중심으로 괄목성장 중인 오스트리아 공산당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공산당은 오랫동안 사회민주당의 헤게모니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신세였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에 실망한 소수 운동가나 지식인이 모여드는 피난처에 가까웠다. 게다가 소비에트연방 붕괴 후에는 다른 나라 공산당들처럼 정체성 위기와 노선 논쟁에 휩쓸려 분당 일보 직전까지 갔다. 총선 때마다 득표율은 1%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당의 한 지역조직만은 이런 혼란과 침체 속에서도 착실히 일상 활동을 이어갔다. '스티리아'라고도 불리는 슈타이어마르크 주의 지역조직이었다. 스티리아 공산당 지부는 오스트리아에서 빈 다음으로 큰 도시인 스티리아의 주도(州都) 그라츠를 중심으로 끈질기게 지지 기반을 다졌다. 이를 위해 스티리아 공산당 지부는 1988년에 당선시킨 단 한 명의 그라츠 시의원 에르네스트 칼테네거를 통해 주택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임대료 통제가 필요하다는 캠페인을 벌였고, 집 주인과 문제가 생긴 세입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임차인들을 조직했다. 그 결과, 공공임대주택 임대료가 세입자 수입의 1/3을 넘지 못하게 제한하는 조례를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런 성과가 쌓여 그라츠 시의회에서 공산당 의석이 꾸준히 증가했고, 급기야 2000년대 초에는 시의회 선거에서 득표율이 20%까지 치솟았다. 공산당은 이렇게 신장한 당세를 다시 주택 문제 해결에 쏟아 부었다. 2004년에 공공임대주택 민간 분양 계획에 맞서 주민투표 청원 서명을 이끌고 결국 주민투표에서 96%의 반대로 공공주택 사유화를 막아낸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1년 뒤인 2005년에 공산당은 드디어 슈타이어마르크 주의회에도 당당히 진출했다. 일단 주의회와 시의회에 입성한 공산당 소속 공직자들은 당 방침에 따라 노동자 평균임금만큼만 세비로 수령하고, 남은 금액은 모두 각종 사회운동 단체에 기부했다. 공산당 소속 공직자가 급격히 늘어난 지금까지도 이 원칙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사실 기부 액수로만 따지면 실질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인 행동에 가깝지만, 소수정당으로서 당장 입법 성과를 내기 힘든 처지인 공산당에게는 대중에게 당을 선전하는 효과적인 수단임에 틀림없다. 2021년 그라츠에서는 결국 공산당이 시의회 선거에서 최대 다수당으로 부상하면서, 주택 문제 전문가이기도 한 공산당 소속 여성 시의원 엘케 카어가 시장이 되었다. 28.8%를 득표한 공산당이 녹색당, 사회민주당과 좌파 연립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이로써 그라츠는 현재 유럽에서 유일하게 공산당이 집권한 대도시가 됐다. 최근에는 공산당의 성장세가 슈타이어마르크 주를 넘어 다른 지방으로까지 확산하는 양상이다. 올해 4월에 실시된 잘츠부르크 주의회 선거에서 공산당은 11.7%를 득표하여, 17.9%를 얻은 사회민주당을 바짝 뒤쫓았다. 잘츠부르크에서는 녹색당의 우경화에 실망해 공산당에 집단 입당한 전 녹색당 청년조직이 성장의 지렛대가 되었다. 그 중심에는, '녹색당 청년단'이었다가 '좌파 청년단'으로 이름을 바꾸며 공산당으로 이적한 이 조직의 지도자 카이-미카엘 당클(1988년생)이 있다. 2019년에 잘츠부르크 시의원에 당선된 당클 역시 임대료가 비싸기로 유명한 이 도시의 주택 문제 해소에 앞장섰다. 이런 공산당의 예기치 않은 잇단 성과는 올해에 사회민주당이 받아 든 실망스러운 선거 결과들과 선명히 대비되었다. 사회민주당이 당원 참여 대표 경선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선택을 감행한 것도, 때 아닌 바블러 좌파 바람이 분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8% 수준까지 지지율을 높이며 사회민주당을 압박하기에 이른 공산당의 약진이 좌파정치 전체가 재구성되도록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한 것이다.사회민주당 임시당대회 결과를 넘어설 변화의 도도한 흐름
사실 6월 3일에 열릴 사회민주당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바블러 후보가 대표로 최종 선출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바블러 측도 이를 잘 알기에 끝까지 당원 참여 결선투표를 요구했을 것이다. 당원 투표와 달리 대의원대회에서는 기존 당 내 주류의 입김이 더 강하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뜻밖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바블러를 둘러싼 세력은 두 차례 미국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 돌풍이 맞았던 운명을 반복할지 모른다. 그러나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미 물꼬가 트인 변화의 도도한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 새로운 사회를 바라는 오스트리아 민중에게는 무기가 사회민주당만 있는 게 아니다. 또한 무대 역시 중앙정치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특히 유념하여 바라볼 대목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