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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판 좌익? 김일성 '엉터리 신년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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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판 좌익? 김일성 '엉터리 신년사'의 비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1> 해방과 분단, 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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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논란이 벌어졌을 때 이승만은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이승만은 이때(1945년 12월 말부터 1946년 정초까지)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이승만과 여운형, 두 사람만 이 시기에 그랬다. 이승만은 반탁 투쟁에서 김구의 헤게모니가 너무나도 강하게 작동하는 것에 불만이 컸던 것 같고, '반탁 투쟁이 미군정과 갈등을 초래하는 것 아니냐', 이런 우려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이 두 가지로 생각해보는데,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제대로 해명을 못하더라. 하여튼 이상하다고만 써놨다.

여운형은 (1945년 12월) 29일부터 정초까지 입을 다물고 일체 입을 열지 않는다. 여운형이 나중에 이 부분에 관해 직접 얘기한 건 없어도 (왜 그랬는지를) 알게끔 하는 것들이 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 한국에 관한 유일한 결정인 만큼 굉장히 중요하고 이걸 지키지 않으면 분단되는 것인데, 신탁 통치 조항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의심스러웠던 거다. (당시로선) 잘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만 자신이 어떤 식으로 하는 게 올바른지를 판단하고 태도를 밝힐 수 있을 것 아닌가, 이걸 굉장히 고민한 것 같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보면 제1항(임시정부 수립)이 아주 중요한 것이긴 한데, 제3항(신탁 통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나중에 하지가 여운형을 만났을 때 '상황 걱정할 것 없다. 신탁 통치 내용은 한국인을 지원하기로 돼 있는 것이지 다른 건 아닌 거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여운형 글에 쓰여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할 필요가 있다. 신탁 통치 문제는 민족 자주 정신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 이게 여운형의 기본 입장이었다.

프레시안 : 좌익이 이 당시에 취한 태도도 논란이다.

서중석 : 좌파라고 해도 여운형을 비롯한 일부 (중도)좌파는 조선공산당하고 의견이 많이 달랐다. 문제는 좌파에서 가장 조직이 강한 게 조선공산당이라는 것이었다. 이 조선공산당이 지나친 원칙주의라고 할까,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좌익이) 찬탁이란 걸 (했다고) 보수 세력이 주장하는데, 그것의 제일 중요한 근거가 '(1945년 12월) 27~29일 좌익에서도 신탁 통치 반대 지지 성명을 냈는데 나중에 돌아선 것 아니냐', 이렇게 다 쓰고 있지 않나. 그런데 사실 (1945년 12월) 28일, 29일 조선공산당 대변인 정태식이 발언한 것이라든가 인민당의 현우현이나 이여성이 발언한 걸 보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내용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신탁 통치는 반대한다', 이 내용이다.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던, (그러니까) 유엔 헌장에 있는 것처럼 주권을 침해하는 신탁 통치는 반대한다', 이런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었다.

(좌익은 1945년 12월) 29일에서 30일 사이에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한다. 그러면서 '연합국이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분열된 모습을 보여서다. 분열하면 신탁 통치를 실시하려고 할 테니 단결해야 한다. 파쇼 친일 세력을 배격하고 민주주의 세력이 모두 단결하자'고 한다. 그런데 여기엔 이승만, 한민당, 나아가 김구 세력까지 배제한다는 의미도 없지 않아 들어 있다. 조선공산당이 자기 세력을 키우려고 내세운 주장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결정적 순간, 김일성 '엉터리 신년사'에 담긴 비밀

프레시안 : '민족 분열 행위를 하고 있다'고 우익을 비판하는 동시에 신탁 통치 반대를 이야기하던 좌익이 어느 순간 태도를 바꾸면서 논란이 커졌다.

서중석 : 내가 본 자료에 의하면 (1946년) 1월 1일 오후 또는 1월 2일부터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쪽으로 돌아선다. 그러더니 1월 2일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전면) 지지한다고 나온다. 이게 바로 유명한 '찬탁으로 전환'이라고 보수 세력이 주장하는 거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이를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중석 : 소련의 지시를 받고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흥미로운 건) 김일성의 지시라고는 안 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김일성은 북조선분국 책임자이고 북조선분국은 조선공산당에 속하는 것이니까 그렇게는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소련의 지시를 받았다는 증거를 내세우는 사람을 내가 본 적은 없다. 다만 그렇게 추정하는 것이다.

(소련 지령설과 관련해) 지금으로선 어느 쪽이 더 맞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만 소련 지시설에 대립되는 얘기는 몇 가지 할 수 있다. 뭐냐 하면 (소련 지령설 중 하나는 박헌영이 평양에 가서 지령을 받았다는 건데) 그 당시 박헌영은 몸이 아파서 북행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측근이 써놓은 게 있다. 그때만 해도 교통편이 나빠서 평양까지 다녀오려면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어떻게 하루 이틀 만에 지시를 받고 남쪽에 내려와서 1월 2일에 발표할 수 있다는 건지 의문이라는 얘기다.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나는 이렇게 본다. 1월 1일에 김일성 이름으로 신년사가 나오는데, 이 신년사가 (좌익이) 사실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걸 확실히 이야기해준다.

프레시안 : 김일성 신년사엔 어떤 내용이 담겼나.

서중석 : 신년사를 보면, 신탁 통치를 실시하고 나서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소련이 1월 1일 이전에 지시했다면, 이런 엉터리 신년사가 나올 수가 없는 거다. 그러고 나서 1월 2일, 일부에선 저녁때라고 보고 있는데, 김두봉과 김일성의 이름으로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나온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1월 2일) 남과 북의 공산당이 지지하고 나왔다.

그런데 신년사에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잘못 알고 쓴 내용이 담겼다고 하지 않았나. 이런 상황인데 박헌영이 북한에 가서 소련 지시를 받고 내려와 1월 2일에 (태도를) 바꿔 발표한다? 이건 박헌영이 귀신이 아니고서야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우익과 대립하던 조선공산당이 이 무렵 보인 태도에서도 이런 점을 엿볼 수 있다.

프레시안 : 어떤 태도를 말하는 것인가.

서중석 : 소련의 <타스 통신>에서 (1946년) 1월 24일,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의 전체 과정을 다 밝혀버린다. 소련 측이 보기에는, 남쪽에서 이상한 반탁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은 이런 거다'라고 하면서 미국이 신탁 통치를 주장한 것 등 구체적인 상황을 얘기했다. 그러니까 하지가 놀라서 '이게 맞느냐'고 본국 정부에 물었다. 미국 정부에서 '그게 대부분 맞는 거다', 이렇게 답하자 하지가 사표까지 내고 그랬다. 아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거다.

하여튼 신탁 통치는 미국이 주장한 것이고 소련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했다는 건 조선공산당으로선 우익을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재료다. 우익은 중경 임정 추대 운동의 일환이자, 그와 함께 반소·반공 운동으로 반탁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신탁 통치를 주장한 게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건) 조선공산당이 우익에 반격하는 데 참 좋은 소재 아닌가. 그런데 (1946년 1월 초순에는) 그것을 일체 얘기하지 않았다. 조선공산당도 나중에 가서야 '이것(초기에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진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내용)이 거꾸로 돼 있다'는 걸 안 거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우익의 왜곡, 좌익의 패착, 사표 낸 하지

프레시안 : 친일파까지 반탁 대열에 대거 합류해 '반탁에 협력하지 않으면 민족 반역자'라는 식으로 좌익을 몰아붙이던 때였다. 친일파가 아니라 좌익이 시쳇말로 나라를 판 세력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런데도 조선공산당이 '신탁 통치를 주장한 건 우익이 의지하는 미국'이라는 반박을 곧바로 하지 않았다는 건, 지적한 대로 다른 사정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서중석 : 그렇다. 그다음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텍스트 문제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문은 텍스트가 2개다. 하나는 영어, 다른 하나는 러시아어로 돼 있다. (신탁 통치 부분이) 러시아어 텍스트에는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아뻬까'로 돼 있다. 신탁 통치(trusteeship)의 러시아어 번역은 '아뻬까'가 아니다. '아뻬까'는 우리말로는 후견으로 번역된다. 도와준다는 뜻이다.

(1946년) 1월 2일 김두봉과 김일성의 이름으로 나온 공동 성명서엔 '아뻬까'라고 돼 있다. 무슨 말이냐면, 신탁 통치라고 하지 않고 '연합국은 후견제를 실시한다고 한다. 우리를 도와준다고 하니 우리는 지지한다',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남쪽에서 조선공산당이 같은 날 낸 성명서를 읽어봐라. 거기 보면 이런 말이 한마디도 안 들어 있다. 조선공산당이 이것도 나중에 안 거다. 이렇게 그 당시는 정보에 어두운 때다.

그런 점에서도, 소련의 지시를 받고 한 것 같지는 않다. 서울에 있던 소련 영사와 상의를 했을 수는 있다. 조선공산당 정치국 위원이던 강진이라는 사람이 러시아말을 아주 잘했는데, 이 사람이 소련 영사를 만났다는 기록은 나온다. 반탁 투쟁 때 조선공산당이 되게 황당했을 것 아닌가. 우익한테 헤게모니도 뺏기고 하니까. 그러니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하고 여기저기 알아보지 않았겠나. (그러나) 나는 소련 영사도 (이 시기에는 전말을) 몰랐을 거라고 본다.

프레시안 : 조선공산당은 이 문제에 관해 태도를 바꾼 후 강도 높은 공격을 받는다.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예컨대 적잖은 사람들이 '반탁 대회'로 알고 갔던 좌익 주도 행사가 '반탁 반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절대 지지 대회'로 치러지자 당황하는 일도 발생한다(1946년 1월 3일 서울시민대회).

서중석 : (이 시기 조선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좌익이 보인 모습엔) 보수 세력이 찬탁이라고 주장하면서 막 공격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다. 사실 조선공산당 지방 간부들 중 상당수가 '신탁 통치 문제에 대해선 우리 얘기를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지 않느냐', '중앙 간부들이 한 일이 이해가 안 된다', 이렇게 들고나오는 걸 볼 수 있다. 예컨대 (1946년) 2월 중순에 열린 회의 등에서 그런 발언들이 나오는 것으로 돼 있다. 지방 간부들 중에서도 특히 경상도 간부들이 그런 게 많았다. 그쪽은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중앙의 결정이 잘못된 게 아니냐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조선공산당은 한번 결정한 걸 밀고 나갔다. 국민을 설득하려면 자신들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를 잘 설명해야 하는 문제였다. '(대다수 한국인이 반대하는) 신탁 통치는 (우리도) 반대한다'는 것을 강하게 내세우면서 '(그럼에도) 제1항(임시정부 수립)을 실천해야 하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간단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은 연합국이 우리를 도와준다고 결정한 것이니 좋은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버린 거다.

이런 걸 보면, (좌익이) 일제 시대에 너무 감옥 생활을 많이 하는 속에서 상당히 단순한 원리주의적 사고 같은 걸 강하게 갖게 됐고 그런 게 해방 후에도 많이 작용한 게 아니냐, 그래서 그런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게 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스물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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