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로시페드, 획기적인 이동 수단을 타라!
자전거가 걸어온 발자취에 대해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해보자. 인류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진보의 장을 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효율 100%를 숭상하는 현대사회, 특히 한국 사회는 수백만 명의 유치원생부터 취업준비생까지 학원에 강제 수감시키는 것 보다 쓸데없이 놀게 하는 것이 훨씬 더 '국익'이라는 우상화된 가치에 보탬이 될 것이다. 근대 산업사회로 접어들던 어떤 시기, 약 300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일부 사람들이 황당한 생각을 했다. '말을 타지 않고도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탈것'에 대한 상상이 그것이다. 이 탈것은 바람이나 증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인간의 힘을 동력원으로 한다면 가장 풍부하면서도 소멸되지 않는 자생적 연료를 갖게 된다. 그야말로 이동의 혁명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구상을 현실로 가능케 할 것인가? 걷는 것이 아니라 이동 수단으로서의 탈것이라면 최소한 마차와 대등하거나 뛰어나야 했다. 보통 사람들이 허황된 망상이라고 비아냥대기에 딱 좋은 생각들이었다. 1696년 프랑스의 수학자 자크 오자낭(Jacques Ozanam)은 <수학과 물리학의 재현>이란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요즘도 어린이 대상 신문이나 방송이 흥밋거리로 다루곤 했던 '곧 다가올 신기한 미래' 같은, 아직 실현되진 않았지만 상상이 가능한 것들을 다뤘다. 책은 유용하고 흥미로운 50개의 문제를 제시했는데 그 중 23번 째로 다룬 것이 "스스로 움직이는 탈 것"이었다. 여기에는 자전거의 기원적 형태를 담고 있었다. 결국 이런 시도들은 나중에 자전거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을 탄생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된다. 초기 '인간 동력 탈것'을 구상했던 사람들의 출발점은 마차였다.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탈것에 대한 최초의 장거리 이동 기록은 1779년 파리의 루이 15세 광장에서 베르사유까지 19킬로미터(Km)를 달린 것이다. 발명가 장 피에르 블랑샤르(Jean Pierre Blanchard)와 그의 하인 마슈리에(M, Masurier)가 스프링, 도르래, 밧줄 등이 연결된 발판을 열나게 밟아, 말이 없는 마차를 몰았다. 군중들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몰려들었고 신문에도 소개되었지만 사업적 성공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모든 분야의 선지자들에게 실패란 운명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자 한 명의 괴짜가 또 등장한다. 카를 폰 드라이스(Karl von Drais)는 독일 명문가 출신의 귀족으로 바덴 대공국의 산림청 책임자였다. 드라이스는 자신이 책임진 관할지를 정기적으로 순찰할 때 손쉬운 이동 수단을 갖길 원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드라이스는 한 명은 크랭크 축을 돌려 바퀴에 동력을 전달하고, 한 명은 방향 축을 조절하는 4인승 기계식 4륜 마차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마차역시 동료들을 황당하게 하는 데만 기여했을 뿐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드라이스는 잠망경 같은 다른 발명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다시 스스로 움직이는 탈것 개발의 길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해결책을 들고 왔다. 드라이스가 제안한 것은 '달리는 기계(running machine)'라는 것이었다. 달리는 기계의 모습은 기존의 네 바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하면서 새로운 진보의 길을 열었다. 달리는 기계는 마차 바퀴 두 개를 작게 만들어 앞뒤로 나란히 놓았다. 이 바퀴는 목재로 만든 프레임 아래에 장착되었다. 프레임 가운데에는 말안장을 얹었다. 비로소 두 바퀴로 달리는 탈것, 자전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벨로시페드(velocipede)"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다. 속도를 뜻하는 'velox'와 발을 나타내는 'pes'의 합성어였다. 벨로시페드의 운전자는 프레임 위의 안장에 앉은 채로 두발로 땅을 굴러 움직였다. 이 같은 방식을 도입한 결과 걷거나 뛰는 것에 비해 훨씬 빠르고 힘을 적게 소모하게 되었다. 내리막길에서는 전혀 힘이 들지 않았고 속도도 상당히 빨랐다. 벨로시페드 라이더는 바퀴가 굴러가지 않을 때만 바닥을 두 발로 밀고 달리기 시작하면 발을 들고 주행을 즐기면 되었다. 벨로시페드는 유럽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의 기계공들은 모조품을 만들어 냈다. 벨로시페드는 보행기의 원리와 같았다. 유아들이 장치에 몸을 의지한 채 발을 굴러 움직이듯 벨로시페드의 운전자는 발을 굴러 "보행을 돕는 장치"의 도움을 받았다. 진보의 가능성을 가득 담고 있는 이 이동수단은 유럽 곳곳에서 반짝 인기를 누리긴 했지만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아직 부족한 그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선뜻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1860년대 프랑스에서 새로운 형태의 벨로시페드가 등장했다. 아주 작은 변화였는데 거대한 장벽이 조그만 돌 하나를 제거함으로써 무너져 내린 것과 비슷했다. 작은 변화란 벨로시페드의 앞바퀴에 페달을 단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간단한 것을 그동안 왜 생각지 못했는지 의아해 했다. 벨로시페드 탑승자는 두 발로 땅을 구를 필요 없이 앞바퀴에 부착된 페달을 밟으면 되었다. 훨씬 편리하고 무엇보다 처음 가속을 할 때 프레임위에서 일정구간을 달려야 하는 우스운 모양을 벗어날 수 있었다. 벨로시페드는 독일의 발명가 드라이스가 고안해냈지만 영국에서 꾸준히 개량되고 이용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기술적 진전이 인간의 이동문제에 대해 영국보다 관심이 적었던 프랑스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 역사학자 데이비드 V. 헐리히(David v. Herlihy)는 놀라움을 표시했다. 영국에서 벨로시페드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이 사라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철도 붐으로 발명가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직업의 사람들이 철도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발명가나 기술자들은 새로 등장한 철도와 관련한 여러 분야에 자신들의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또 영국 사람들의 대부분은 철도 주식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달콤한 꿈에 빠져있었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 근처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기계공 피에르 미쇼(Pierre Michaux)는 곧 자전거라고 불리게 될 "페달식 벨로시페드"를 만들었다. 이때에만 해도 미쇼와 세상 사람들은 새롭게 탄생한 벨로시페드가 세계를 뒤흔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미쇼의 벨로시페드는 앞바퀴 허브에 연결된 페달과 크랭크로 추진되는 최신형 탈것이었다. 보행보조기의 모습을 탈피했다. 프레임은 목재 대신 곡선형으로 주조한 철제품이 사용되었다. 고가이긴 했지만 미쇼의 자전거는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초창기 자전거 타기 바람을 일으킨 것은 페달식 벨로시페드를 살 수 있었던 부르주아지 청년들이었다. 청년들은 저녁마다 불로뉴 숲에 모여 색다른 곡예 기술을 연마했다. 불로뉴 숲은 파리 서부에 위치한 대형 공원으로 인근에 미쇼의 매장이 있었다. 한 때 인라인 붐이 일어나 서울의 올림픽 공원에 인라이너들이 몰려들어 광장을 점령하고 공원 주변을 따라 인라인숍이 성황을 이뤘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청년들은 "벨로시페드에 올라타라!"고 외치며 파리의 만국 박람회장을 질주했다. <뉴욕 타임즈> 파리 통신원은 "이동의 혁신"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파리의 자전거를 극찬했다. 통신원은 "도로를 지나다니기 위해 집채만 한 탈것을 이용해야만 한다면, 이 발명의 시대에 불명예이자 부조리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는 벨로시페드를 타야한다"라는 말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던 말이 끄는 마차 시대의 종말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마차의 종말은 철도와 자전거에 의해서 도래했다. 1800년대 하루에 340여 편에 달했던 영국 각지로 떠나는 런던 발 우편마차는, 철도의 등장으로 소멸해버린다. 장거리 노선에서 마차가 철도를 당해낼 수 없었다. 마차는 단거리 이동수단의 역할로 재조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전거의 보급은 그나마 존재했던 마차의 유용성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말의 가격도 비쌌지만 만만치 않게 들어가는 사료 값과 도시의 거리들을 뒤덮는 배설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되면서, 마차의 몰락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미쇼사의 자전거는 몰려드는 주문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자전거 강습소가 생기고 전국 각지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자전거 산업을 홍보하는 최고의 방법인 경주대회도 열렸다. 자전거의 효용성을 입증하는 것은 말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초기의 자전거는 자주 말과의 경주에 나섰다. 1868년 벨로시페드 선수 카르코나드(A. Carconade)는 72킬로미터 거리의 울퉁불퉁한 시골길에서 경주마와 대결을 벌였다. 6시간이 걸린 경주마에 비해 25분 늦게 결승선을 통과한 카르코나드는 패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카르코나드의 투혼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페달 달린 벨로시페드의 별명은 '본 쉐이커'였다. 마차 바퀴를 차용한 목재 바퀴와 철제 프레임은 땅의 진동을 그대로 탑승자에게 전달했다. 말 그대로 뼈를 흔들어대는 차체를 타고 말과 경쟁해 6시간 이상 달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자전거의 확산은 고무적이었지만 몇 가지 한계가 있었다. 너무도 비싼 가격 탓에 부자들의 전유물이 되었던 것이다. 민영화된 영국철도를 부르는 별칭이 있다. 영국에서 지난 10여년 간 철도요금은 최대 90% 올랐는데, 그동안 임금은 20% 올랐다. 민간철도회사, 투자은행, 회계법인, 법률대행 로펌 등이 엄청난 돈을 챙기는 동안 영국인들은 다른 유럽인들보다 많게는 10배가 넘는 요금을 내고 있다. 전 교통부장관 필립 해먼드는 "영국철도는 부자들을 위한 장난감이다"라며 민영화의 폐해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부자들의 장난감"이라는 말의 기원을 따라가 보면 벨로시페드, 즉 자전거를 일컫는 말이었다. 자전거가 단명할 것인지 인류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인지의 운명은 부자들의 전유로부터 벗어나는 것의 여부에 달려있었다. 자전거뿐만 아니라 권력이든, 투표권이든, 교육의 기회든, 정보 든 그것이 부자들에 의해 독점될 때, 그 사회는 병든 사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은 자전거가 단명하는 "부자의 장난감"이 아니라 꼭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의 마차"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여성, 치마를 벗어던지고 레깅스를 입다
자전거의 등장으로 삶이 바뀐 것은 여성이었다. 벨로시페드 시대의 여성 라이더들은 훨씬 더 주목 받았다. 인류가 오래도록 간직해온 여성들에 대한 편견이 한 몫을 했다. 감히 여성들이 버젓이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 여행을 즐기는 것을 보고, 말세가 다가왔다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성들은 자전거를 타기 위해 편한 복장을 준비하기도 했는데 짧은 치마와 레깅스는 시대의 벽을 뚫는 전위적인 것이었다. 엉덩이를 강조하고 허리를 잘록하게 보이게 해 강제로 여성성을 극대화한 코르셋같은 옷을 입고는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인 '전통적인 여성상'을 목소리 높여 말하는 보수적 '꼰대'들이 보기에 자전거 타는 여성들은 불경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여성들이 애인과 자전거를 타고 한적한 시골로 떠나 은밀하고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는 것은 사회를 더욱 타락시킬 것이라고 떠들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공공장소에 여성들이 자전거를 몰고 나타나기 위해서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여성들이 무릎을 드러낸 레깅스 차림으로 시내 광장을 질주하는 모습은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이런 신기한 광경이 벌어지면 평소에 여성라이더의 불경함을 외치던 이들도 눈꼬리를 슬쩍 돌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달려가는 여성들의 뒤를 쫓았다. 워싱턴에 있던 여성구조연맹(Woman's Rescue League) 같은 이상한 이름의 단체는 자전거가 불임을 유발하고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을 조장하며 남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안장과의 마찰이 부도덕한 성적 충동을 야기한다고 말했다. 이런 말들은 터무니없는 억지였다. 자전거가 확산되는 것도 여성라이더가 증가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자전거 타기는 남녀 모두에게 있어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운동이라는 상식적 사실이 의사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어쨌든 여성들은 늘 당해왔듯 자전거를 타는 과정에서도 부당한 대우를 기꺼이 감수해야 했다.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여자들이 가랑이를 벌리고 양 다리로 페달을 밟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말을 탈 때 하듯이 두 발을 한쪽으로 모으고 옆으로 타는 것이 규범에 맞는 일이었다. 이렇게 탈 경우에는 여성스러운 긴 드레스를 입어도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한국 영화 졸작선 작품 중에는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자전거 뒤 안장에 탄 여성이 나오는 장면들이 있다. 규범적인 여성성을 정형화한 컷이다. 이런 장면들은 영화 후반부 회상 씬에 자주 재등장 한다. 애틋했던 과거의 연애는 '순결하고 청초했던 그녀'라는 프레임 안에 여성들을 가둬놓아야 했다. 남자들이 내면적으로 이상화한 후 사회적으로 주입시켜놓은 공식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맛을 알아버린 여성들의 입장에서 빅토리아풍의 드레스를 입고 다리를 모은 채 안장 뒤의 연결의자에 앉아 남자의 허리를 잡는 것은 고리타분한 일이었다. 과감하게 치마 단을 자르고 종아리와 발목이 훤히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었다. 이런 복장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여 양손으로 핸들을 잡고 세상과 맞서는 일이 훨씬 짜릿한 일이었다. 자전거는 그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혼자 타야만 하기 때문에 탑승자가 누구이든 독립적인 운전자여야 했다.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들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는데 이처럼 속이 후련한 일을 경험하는 것은 자전거와 철도의 등장 이전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이 글에서 다룬 자전거에 대한 내용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 바퀴 탈 것>(데이비드 V, 헐리히, 알마출판사)를 참조했음을 밝힙니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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