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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왜 치마를 벗고 레깅스를 입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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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왜 치마를 벗고 레깅스를 입었나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53>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탈것
이번 연재는 독자들에 대한 퀴즈 문제로 시작 하겠다.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탈 것은 무엇일까? 이 연재 코너가 철도를 주제로 하기에 아마도 정답은 철도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철도는 2위다. 그렇다면 영예의 1위는 어떤 것일 까? 두구두구두구두구…. 바로 자전거다. 그렇다면 이 순위는 누가 정한 것일까? 유엔 국제환경자문기구나 국내외 자전거 생산업체연합, 대한사이클연맹 같은 단체와는 아무 상관없다. 내 맘대로 정했다. 혹시 다른 의견이 제시되더라도 30년간 세계 주류 무료 음주권 같은 것이 제시되지 않는 한 순위를 바꿀 생각은 없다. 자전거는 철도와 비슷한 생의 역정을 겪었다.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개량을 거듭해 번듯한 이동 수단이 되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은둔이 미덕이었던 여성을 햇빛 아래로 끌어낸 것도 철도와 자전거였다. 이로서 세계 인류의 절반은 가정의 울타리를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여성에게 주어졌던 전통적인 역할은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균열이 생겼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초과이익을 위해 언제라도 하찮은 대우를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는 산업예비군, 즉 실업자들이 많아야 했다. 이런 면에서 가정에서 해방된 여성은 좋은 착취 대상이었다. 남성보다 훨씬 적은 임금으로 부릴 수 있었고 도박에 빠져 결근을 하거나 대낮부터 술에 취해 공장장에 대들지 않았다. 어느 사회나 자리 잡고 있는 전통적 여성상이라는 족쇄가 노동자가 된 여성에게 2중의 고통으로 작용했다. 오랜 시간 권력을 행사한 가부장이라는 판사에 의해 여성이라는 형틀을 목에 건 소녀들과 엄마들은 자전거와 철도를 이용해 출근을 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부르주아지 여성들 역시 전통적 여성상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는데, 근대 계몽주의가 이 굴레를 깨는 정신적 요소로 작용했다면, 자전거와 철도는 물리적 요소로 작용했다. 숙녀들은 자전거나 열차를 타고 남편의 품을 떠나 다른 세계를 경험했다. 자전거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근대 산업사회의 중심 풍경이 되었다. 특히 우체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비가 되었다. 경찰은 순찰용으로 요긴하게 써먹었다. 안장 뒤로 머리 높이까지 생선궤짝을 싣고 달리는 시장 상인에게는 돈을 더 많이 벌게 해주는 복덩이였다. 아이들은 체형에 맞춰진 소형 자전거로 골목을 누볐다. 도로의 주인공은 자전거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전거는 도로에서 밀려났다. 이어서 철도가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 위대한 두 탈것을 몰아낸 주인공은 자동차였다. 자동차 산업의 폭발은 도로의 확장을 불렀고 이것은 더 많은 자동차를 끌어들였으며 다시 새 도로를 요구하는 순환운동이 되었다. 자전거는 자동차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완벽한 개인적 교통수단인 자전거에 비해 훨씬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자동차의 효율성은 독보적이었다. 전국적인 고속도로의 확장은 철도도 한물 간 교통수단으로 만들었다. 현관문만 열고 나가면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는 장거리 여행을 위해 역까지 가야하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자동차는 자본주의와 인류가 가장 크게 의지하는 산업이자 교통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자동차 천년왕국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류는 어쩌면 자동차로 인해 종말을 가속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동차는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대신 많은 것을 요구했다. 결국은 고갈될 화석연료인 석유와 가스를 쉴 새 없이 먹어치우는 대식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배기가스는 지구의 온실효과에 톡톡히 기여하고 있다. 조만간 북극해에서 얼음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꽉 막힌 도로에서 사람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은 정신적 문제지만, 혼잡비용으로 초래되는 부담은 사회적 비용으로 전가되고 있다. 교통사고에 따른 인명의 손실과 처리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인간의 편익을 위해 자동차에 지불해야 하는 것들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유지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대안을 찾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할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철도였다. 자전거 또한 훌륭한 마무리 투수가 되었다. 근대 초기 등장해 인류의 벗이 되었던 탈것들이었다.


▲ 벨로시패드

벨로시페드, 획기적인 이동 수단을 타라!

자전거가 걸어온 발자취에 대해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해보자. 인류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진보의 장을 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효율 100%를 숭상하는 현대사회, 특히 한국 사회는 수백만 명의 유치원생부터 취업준비생까지 학원에 강제 수감시키는 것 보다 쓸데없이 놀게 하는 것이 훨씬 더 '국익'이라는 우상화된 가치에 보탬이 될 것이다. 근대 산업사회로 접어들던 어떤 시기, 약 300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일부 사람들이 황당한 생각을 했다. '말을 타지 않고도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탈것'에 대한 상상이 그것이다. 이 탈것은 바람이나 증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인간의 힘을 동력원으로 한다면 가장 풍부하면서도 소멸되지 않는 자생적 연료를 갖게 된다. 그야말로 이동의 혁명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구상을 현실로 가능케 할 것인가? 걷는 것이 아니라 이동 수단으로서의 탈것이라면 최소한 마차와 대등하거나 뛰어나야 했다. 보통 사람들이 허황된 망상이라고 비아냥대기에 딱 좋은 생각들이었다. 1696년 프랑스의 수학자 자크 오자낭(Jacques Ozanam)은 <수학과 물리학의 재현>이란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요즘도 어린이 대상 신문이나 방송이 흥밋거리로 다루곤 했던 '곧 다가올 신기한 미래' 같은, 아직 실현되진 않았지만 상상이 가능한 것들을 다뤘다. 책은 유용하고 흥미로운 50개의 문제를 제시했는데 그 중 23번 째로 다룬 것이 "스스로 움직이는 탈 것"이었다. 여기에는 자전거의 기원적 형태를 담고 있었다. 결국 이런 시도들은 나중에 자전거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을 탄생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된다. 초기 '인간 동력 탈것'을 구상했던 사람들의 출발점은 마차였다.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탈것에 대한 최초의 장거리 이동 기록은 1779년 파리의 루이 15세 광장에서 베르사유까지 19킬로미터(Km)를 달린 것이다. 발명가 장 피에르 블랑샤르(Jean Pierre Blanchard)와 그의 하인 마슈리에(M, Masurier)가 스프링, 도르래, 밧줄 등이 연결된 발판을 열나게 밟아, 말이 없는 마차를 몰았다. 군중들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몰려들었고 신문에도 소개되었지만 사업적 성공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모든 분야의 선지자들에게 실패란 운명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자 한 명의 괴짜가 또 등장한다. 카를 폰 드라이스(Karl von Drais)는 독일 명문가 출신의 귀족으로 바덴 대공국의 산림청 책임자였다. 드라이스는 자신이 책임진 관할지를 정기적으로 순찰할 때 손쉬운 이동 수단을 갖길 원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드라이스는 한 명은 크랭크 축을 돌려 바퀴에 동력을 전달하고, 한 명은 방향 축을 조절하는 4인승 기계식 4륜 마차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마차역시 동료들을 황당하게 하는 데만 기여했을 뿐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드라이스는 잠망경 같은 다른 발명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다시 스스로 움직이는 탈것 개발의 길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해결책을 들고 왔다. 드라이스가 제안한 것은 '달리는 기계(running machine)'라는 것이었다. 달리는 기계의 모습은 기존의 네 바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하면서 새로운 진보의 길을 열었다. 달리는 기계는 마차 바퀴 두 개를 작게 만들어 앞뒤로 나란히 놓았다. 이 바퀴는 목재로 만든 프레임 아래에 장착되었다. 프레임 가운데에는 말안장을 얹었다. 비로소 두 바퀴로 달리는 탈것, 자전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벨로시페드(velocipede)"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다. 속도를 뜻하는 'velox'와 발을 나타내는 'pes'의 합성어였다. 벨로시페드의 운전자는 프레임 위의 안장에 앉은 채로 두발로 땅을 굴러 움직였다. 이 같은 방식을 도입한 결과 걷거나 뛰는 것에 비해 훨씬 빠르고 힘을 적게 소모하게 되었다. 내리막길에서는 전혀 힘이 들지 않았고 속도도 상당히 빨랐다. 벨로시페드 라이더는 바퀴가 굴러가지 않을 때만 바닥을 두 발로 밀고 달리기 시작하면 발을 들고 주행을 즐기면 되었다. 벨로시페드는 유럽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의 기계공들은 모조품을 만들어 냈다. 벨로시페드는 보행기의 원리와 같았다. 유아들이 장치에 몸을 의지한 채 발을 굴러 움직이듯 벨로시페드의 운전자는 발을 굴러 "보행을 돕는 장치"의 도움을 받았다. 진보의 가능성을 가득 담고 있는 이 이동수단은 유럽 곳곳에서 반짝 인기를 누리긴 했지만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아직 부족한 그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선뜻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1860년대 프랑스에서 새로운 형태의 벨로시페드가 등장했다. 아주 작은 변화였는데 거대한 장벽이 조그만 돌 하나를 제거함으로써 무너져 내린 것과 비슷했다. 작은 변화란 벨로시페드의 앞바퀴에 페달을 단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간단한 것을 그동안 왜 생각지 못했는지 의아해 했다. 벨로시페드 탑승자는 두 발로 땅을 구를 필요 없이 앞바퀴에 부착된 페달을 밟으면 되었다. 훨씬 편리하고 무엇보다 처음 가속을 할 때 프레임위에서 일정구간을 달려야 하는 우스운 모양을 벗어날 수 있었다. 벨로시페드는 독일의 발명가 드라이스가 고안해냈지만 영국에서 꾸준히 개량되고 이용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기술적 진전이 인간의 이동문제에 대해 영국보다 관심이 적었던 프랑스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 역사학자 데이비드 V. 헐리히(David v. Herlihy)는 놀라움을 표시했다. 영국에서 벨로시페드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이 사라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철도 붐으로 발명가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직업의 사람들이 철도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발명가나 기술자들은 새로 등장한 철도와 관련한 여러 분야에 자신들의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또 영국 사람들의 대부분은 철도 주식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달콤한 꿈에 빠져있었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 근처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기계공 피에르 미쇼(Pierre Michaux)는 곧 자전거라고 불리게 될 "페달식 벨로시페드"를 만들었다. 이때에만 해도 미쇼와 세상 사람들은 새롭게 탄생한 벨로시페드가 세계를 뒤흔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미쇼의 벨로시페드는 앞바퀴 허브에 연결된 페달과 크랭크로 추진되는 최신형 탈것이었다. 보행보조기의 모습을 탈피했다. 프레임은 목재 대신 곡선형으로 주조한 철제품이 사용되었다. 고가이긴 했지만 미쇼의 자전거는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초창기 자전거 타기 바람을 일으킨 것은 페달식 벨로시페드를 살 수 있었던 부르주아지 청년들이었다. 청년들은 저녁마다 불로뉴 숲에 모여 색다른 곡예 기술을 연마했다. 불로뉴 숲은 파리 서부에 위치한 대형 공원으로 인근에 미쇼의 매장이 있었다. 한 때 인라인 붐이 일어나 서울의 올림픽 공원에 인라이너들이 몰려들어 광장을 점령하고 공원 주변을 따라 인라인숍이 성황을 이뤘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청년들은 "벨로시페드에 올라타라!"고 외치며 파리의 만국 박람회장을 질주했다. <뉴욕 타임즈> 파리 통신원은 "이동의 혁신"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파리의 자전거를 극찬했다. 통신원은 "도로를 지나다니기 위해 집채만 한 탈것을 이용해야만 한다면, 이 발명의 시대에 불명예이자 부조리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는 벨로시페드를 타야한다"라는 말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던 말이 끄는 마차 시대의 종말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마차의 종말은 철도와 자전거에 의해서 도래했다. 1800년대 하루에 340여 편에 달했던 영국 각지로 떠나는 런던 발 우편마차는, 철도의 등장으로 소멸해버린다. 장거리 노선에서 마차가 철도를 당해낼 수 없었다. 마차는 단거리 이동수단의 역할로 재조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전거의 보급은 그나마 존재했던 마차의 유용성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말의 가격도 비쌌지만 만만치 않게 들어가는 사료 값과 도시의 거리들을 뒤덮는 배설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되면서, 마차의 몰락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미쇼사의 자전거는 몰려드는 주문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자전거 강습소가 생기고 전국 각지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자전거 산업을 홍보하는 최고의 방법인 경주대회도 열렸다. 자전거의 효용성을 입증하는 것은 말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초기의 자전거는 자주 말과의 경주에 나섰다. 1868년 벨로시페드 선수 카르코나드(A. Carconade)는 72킬로미터 거리의 울퉁불퉁한 시골길에서 경주마와 대결을 벌였다. 6시간이 걸린 경주마에 비해 25분 늦게 결승선을 통과한 카르코나드는 패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카르코나드의 투혼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페달 달린 벨로시페드의 별명은 '본 쉐이커'였다. 마차 바퀴를 차용한 목재 바퀴와 철제 프레임은 땅의 진동을 그대로 탑승자에게 전달했다. 말 그대로 뼈를 흔들어대는 차체를 타고 말과 경쟁해 6시간 이상 달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자전거의 확산은 고무적이었지만 몇 가지 한계가 있었다. 너무도 비싼 가격 탓에 부자들의 전유물이 되었던 것이다. 민영화된 영국철도를 부르는 별칭이 있다. 영국에서 지난 10여년 간 철도요금은 최대 90% 올랐는데, 그동안 임금은 20% 올랐다. 민간철도회사, 투자은행, 회계법인, 법률대행 로펌 등이 엄청난 돈을 챙기는 동안 영국인들은 다른 유럽인들보다 많게는 10배가 넘는 요금을 내고 있다. 전 교통부장관 필립 해먼드는 "영국철도는 부자들을 위한 장난감이다"라며 민영화의 폐해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부자들의 장난감"이라는 말의 기원을 따라가 보면 벨로시페드, 즉 자전거를 일컫는 말이었다. 자전거가 단명할 것인지 인류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인지의 운명은 부자들의 전유로부터 벗어나는 것의 여부에 달려있었다. 자전거뿐만 아니라 권력이든, 투표권이든, 교육의 기회든, 정보 든 그것이 부자들에 의해 독점될 때, 그 사회는 병든 사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은 자전거가 단명하는 "부자의 장난감"이 아니라 꼭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의 마차"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성, 치마를 벗어던지고 레깅스를 입다

자전거의 등장으로 삶이 바뀐 것은 여성이었다. 벨로시페드 시대의 여성 라이더들은 훨씬 더 주목 받았다. 인류가 오래도록 간직해온 여성들에 대한 편견이 한 몫을 했다. 감히 여성들이 버젓이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 여행을 즐기는 것을 보고, 말세가 다가왔다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성들은 자전거를 타기 위해 편한 복장을 준비하기도 했는데 짧은 치마와 레깅스는 시대의 벽을 뚫는 전위적인 것이었다. 엉덩이를 강조하고 허리를 잘록하게 보이게 해 강제로 여성성을 극대화한 코르셋같은 옷을 입고는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인 '전통적인 여성상'을 목소리 높여 말하는 보수적 '꼰대'들이 보기에 자전거 타는 여성들은 불경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여성들이 애인과 자전거를 타고 한적한 시골로 떠나 은밀하고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는 것은 사회를 더욱 타락시킬 것이라고 떠들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공공장소에 여성들이 자전거를 몰고 나타나기 위해서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여성들이 무릎을 드러낸 레깅스 차림으로 시내 광장을 질주하는 모습은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이런 신기한 광경이 벌어지면 평소에 여성라이더의 불경함을 외치던 이들도 눈꼬리를 슬쩍 돌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달려가는 여성들의 뒤를 쫓았다. 워싱턴에 있던 여성구조연맹(Woman's Rescue League) 같은 이상한 이름의 단체는 자전거가 불임을 유발하고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을 조장하며 남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안장과의 마찰이 부도덕한 성적 충동을 야기한다고 말했다. 이런 말들은 터무니없는 억지였다. 자전거가 확산되는 것도 여성라이더가 증가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자전거 타기는 남녀 모두에게 있어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운동이라는 상식적 사실이 의사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어쨌든 여성들은 늘 당해왔듯 자전거를 타는 과정에서도 부당한 대우를 기꺼이 감수해야 했다.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여자들이 가랑이를 벌리고 양 다리로 페달을 밟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말을 탈 때 하듯이 두 발을 한쪽으로 모으고 옆으로 타는 것이 규범에 맞는 일이었다. 이렇게 탈 경우에는 여성스러운 긴 드레스를 입어도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한국 영화 졸작선 작품 중에는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자전거 뒤 안장에 탄 여성이 나오는 장면들이 있다. 규범적인 여성성을 정형화한 컷이다. 이런 장면들은 영화 후반부 회상 씬에 자주 재등장 한다. 애틋했던 과거의 연애는 '순결하고 청초했던 그녀'라는 프레임 안에 여성들을 가둬놓아야 했다. 남자들이 내면적으로 이상화한 후 사회적으로 주입시켜놓은 공식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맛을 알아버린 여성들의 입장에서 빅토리아풍의 드레스를 입고 다리를 모은 채 안장 뒤의 연결의자에 앉아 남자의 허리를 잡는 것은 고리타분한 일이었다. 과감하게 치마 단을 자르고 종아리와 발목이 훤히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었다. 이런 복장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여 양손으로 핸들을 잡고 세상과 맞서는 일이 훨씬 짜릿한 일이었다. 자전거는 그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혼자 타야만 하기 때문에 탑승자가 누구이든 독립적인 운전자여야 했다.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들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는데 이처럼 속이 후련한 일을 경험하는 것은 자전거와 철도의 등장 이전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이휠 자전거
벨로시페드는 계속 개량을 거듭해 '하이 휠 시대'를 맞이한다. 근대의 모습을 담은 기록영화나 그림 같은 데서 확인할 수 있는 데, 일부 기종은 앞바퀴가 성인 남자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자전거다. 앞바퀴의 직경이 커짐에 따라 동력효율이 증가했다. 각종 주행기록이 경신 되었고 이용자도 빠르게 증가했다. 이제 도심에서 거대한 바퀴 위에 앉아 주행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이 휠은 그 바퀴 높이만큼이나 커다란 진입 장벽을 갖고 있었다. 하이 휠은 운동성이 강한 젊은 남성들 위주로 퍼져나갔다. 일단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일 자체가 공포에 맞서는 일이었다. 그 누구라도 초보자는 반드시 굴러 떨어지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전거였다. 타고 내리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또 일단 타기 시작하면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아야 했다. 달리는 중에도 여러 원인으로 인해 땅바닥에 곤두박질 당할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개량의 끝판 왕' 같이 보였던 하이 휠 시대는 여러 엔지니어들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새로운 자전거가 도입되면서 막을 내린다. 현대의 자전거와 거의 유사한 이른바 '세이프티 자전거'의 등장이다. 세이프티 자전거는 사람들이 타고 내리기 적당한 높이를 가진 직경의 바퀴를 적용함으로서 승하차의 편의성을 대폭 높였다. 여기에 더해진 혁명적인 진화였던 고무타이어의 적용은 승차감과 속도를 대폭 높였다. 또 하나의 획기적인 개량은 체인의 도입이었다. 프레임 아래 커다란 체인 휠을 장착하고 여기에 페달을 달았다. 페달과 연결된 휠은 체인으로 뒷바퀴 축에 장착된 스프라켓에 연결되었는데 이로서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자전거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하이 휠 자전거는 앞바퀴 축에 연결된 페달을 밟는 것으로 전륜 구동이었는데 체인을 사용하게 되면서 후륜 구동 식으로 바뀌었다. 이 후륜 구동 식은 자전거의 발전을 크게 이끌게 된다. 뒷바퀴에 체인으로 연결된 스프라켓의 구경비를 다르게 해 견인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자전거의 최대 난제였던 경사로 등판능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됐고 속도 유지 능력도 향상됐다. 새로 등장한 세이프티 자전거는 반짝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다 말 것이라는 평가를 뒤엎고 하이 휠 자전거를 도로에서 몰아냈다. 마침내 자전거가 꿈꾸었던 최초의 이상, 즉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탈것이 실현되고 있었다. 자전거의 효용성이 증가하자 사회 여기저기에서 자전거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우편, 상품배달, 치안유지, 군대까지, 다양한 분야로 확장됐다. 철도노동자들은 선로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자전거를 개량하여 수고를 덜었다. 자전거는 젊은이들에게는 속도감을, 여성들에게는 자유를, 서민들에게는 큰 즐거움과 실용성을 주었다. 비로소 부자의 장난감에서 가난하고 평범한 시민들의 탈것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자전거의 보급이 확대되자 젊은 남녀가 자전거를 타고 교외로 나가는 도덕적 타락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요일 주행이 확대됨에 따라 수입이 줄어들게 된 목사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은 깊은 근심에 빠졌다. 현저하게 줄어드는 교회 출석률은 신도들이 자전거라는 이름의 사탄에게 유혹된 결과였다. 목사들은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더 잘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기도했다. 그러나 자전거가 거룩한 주일을 훼손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목사들의 고발은 하나님의 귀에까지 전달되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자전거는 예루살렘은 물론 사마리아 땅 끝조차 뛰어넘어 전 세계에 퍼지는 놀라운 행진을 거듭하게 된다.


이 글에서 다룬 자전거에 대한 내용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 바퀴 탈 것>(데이비드 V, 헐리히, 알마출판사)를 참조했음을 밝힙니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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