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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베트남의 횡포, 붉은 라오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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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베트남의 횡포, 붉은 라오스의 탄생 [유라시아 견문] 붉은 라오스 : 베트남의 서진(西進)
1975 : 도미노

4월 30일, '사이공'에 있었다. 정식 명칭은 호치민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이공이 익숙하다. 이곳 사람들도 그렇다. 호치민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쓰인다. 일상과 유리된 이름이다. 사이공을 다시 찾은 것은 올해가 통일 40주년이었기 때문이다. 현장을 지켜보고, 기운을 느끼고 싶었다.

무더위 탓에 기념행사는 아침 7시부터 시작되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TV 생중계를 보는 만 못했다. 사전에 확인된 사람들로 참여가 제한되어 있었다. 주변으로 차량도 통제되고, 보행로마저 막아두었다. 하노이에서 총출동한 국가 지도자들이 사이공 시민들과는 아무런 교감도 없이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공보다는 하노이에 어울릴법한 각종 선전 포스터들만이 통일 40주년을 상기시켰다.

작년(2014년) 한 사진작가를 만난 일이 떠올랐다. 사이공 토박이였고, 1975년생이었다. '통일둥이'였다. 호치민 영묘에 있는 박물관을 둘러보고 내뱉는 일성이 의외였다. 순 거짓말~이란다. 내심 놀랬다. 통일 이후에 학창 시절을 났을 텐데도, 북에 대한 감정이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공식 서사와는 다른 얘기들을 주변에서 일상에서 많이 들었던 탓이리라. 통일둥이가 마흔이 되도록 남북 간 마음의 통합은 여전히 멀었다.

실제로 1975년 4월 30일을 '통일'이 아니라 '병합'이라고 보는 견해가 여럿이다. 특히 남베트남 출신들의 회고록이 그렇다. 미국이나 프랑스로 망명한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들의 처지와 입장으로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호앙반안(Hoang van an)같은 예외적인 인물도 있다. 내가 읽었던 회고록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경우였다. 그는 북베트남 출신이었다. 그것도 호치민의 최측근이었다. 초대 중국대사를 역임하며 북조선과 몽골 업무도 담당했다. 동아시아 통이었다. 그런 고위 인사가 1979년 통일 베트남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했던 것이다.

미국과 프랑스로 떠난 이들이 통일의 실상을 '병합'이라고 여겼다면, 호앙반안은 통일로 말미암아 베트남은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친소파가 득세함으로써 중국과 적대하고 동남아시아의 분열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친중파'의 치우친 독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실상과 부합하는 점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서는 베트남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1975년 이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1945~1975년의 '민족 해방 전쟁'이라는 베트남의 주류 서사를 답습하는 편이다. 물론 한국 현대사 최대의 오점 중 하나인 베트남전 참전과 양민 학살을 반성하는 일은 소중한 작업이다. 나라의 양심을 일깨우고 나라의 품격을 세우는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접근이라는 점이 아쉽다. 정작 베트남에는 내재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의 20세기를 꿰차기 위해서는 1975년 이후의 사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도차이나의 지평에서 1975~1989년의 궤적을 함께 살펴야 한다.

우선 도미노 이론부터 전혀 틀리지가 않았다. 사이공이 무너지자, 인도차이나 전체가 적화(赤化)되었다. 베트남이 통일되던 1975년, 캄보디아(4월)도, 라오스(12월)도 공산 국가가 들어섰다. 1972년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악수로 상징되는 탈냉전의 흐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오류는 그 다음부터였다. 도미노 이후의 사태가 예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민족 해방 운동'의 상징이었던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10년이나 점령했다. 중국과 베트남은 국경 전쟁까지 벌였다. 자중지란으로 사회주의 국제주의는 산산이 깨어졌다.

무엇보다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는 주체가 중국이 아니었다. 베트남이었다. 중국 위협론과 중국 봉쇄론에 입각해서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던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중국은 동남아시아의 '중립주의'를 부추기는 편이었다. 아세안과 협력하여 베트남/인도차이나와 적대했다.

북조선이 신중국의 위성국이 아니었듯, 북베트남 또한 신중국의 괴뢰국이 아니었다. 커녕 매우 능동적이고 야심찬 역사의 주체였다. 본디 월남과 조선은 기질이 달랐다. 소중화에 자족하는 동방예의지국과는 달리, 월남은 남쪽의 중화 제국을 자처했다. 자그만 치 1000년 전 대당제국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부터 줄곧 그러했다.

하노이 근방에는 짱안(Trang An)이라는 아름다운 휴양지가 있다. 동양화풍의 절경을 감상하며 뱃놀이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그런데 알파벳을 지우면 '長安' 이라는 한자가 드러난다. 장안이 어디인가. 현재의 시안(西安)이다. 대당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즉, 대당제국이 무너지나 그 수도의 이름을 남쪽에다 옮겨다 둔 것이다.

그만큼 호방했다. 실로 월남은 1000년을 그치지 않고 제국 건설을 추진했다. 20세기도 다르지 않았다. 끝끝내 라오스인민공화국이라는 세계 유일의 불교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1975년 12월, 20세기 최후의 공산 국가였다.

▲ 베트남 전쟁을 승리한 통일 베트남은 소련의 위성 국가이자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자를 자처했다. 베트남은 라오스를 20세기 최후의 공산 국가로 만들었다. ⓒtvN

인도차이나 : 국제주의와 제국주의

19세기부터 그랬다. 현재의 베트남 영토를 최초로 통일한 응우옌 왕조가 들어서자 '문명화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동남아시아의 유일하고 예외적인 유교 국가, 중화 문명 국가로서의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통일 이후에는 남쪽의 크메르, 서쪽의 라오스로 눈을 돌렸다. 양국을 '夷(오랑캐)'로 여기고 황제의 교화와 감화로써 개조하려 들었다.

1834년 크메르를 복속시킨 이가 민망 황제이다. 허나 대남제국은 대청제국과도 달랐다. 불교 국가의 자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식 관료제를 곧장 적용했다. 의복과 언어, 사상, 종교까지 바꾸려 했다. 일종의 '체제 전환(Regime Change)'을 꾀한 것이다.

오래 가지는 못했다. 크메르에서 철수한 것은 1847년이다. 야심은 넘쳤으되 힘이 모자랐다. 실제로 월남은 시암과 버마에 견주어도 압도적이지 못했다. 대청제국과 같은 보편 제국에는 못 미쳤다. 동남아의 다중심 가운데 하나, 만달라 세계 질서의 일부였다.

제국 건설의 물질적 토대를 닦아준 것은 역설적으로 프랑스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아래서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진출했다. 프랑스의 '문명화 사업'이 월남의 문명 의식과 묘하게 공명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5~1954년)에서도 프랑스와 베트남은 적수였으되, 각기 서로 다른 인도차이나 건설의 책무를 자임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북베트남 지도자들은 한국 전쟁 발발도 기회로 여겼다. 인도차이나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전체로 혁명을 확산시킬 수 있는 호기로 삼았다. 그들은 이것을 '국제적 임무(Nhiem Vu Quoc Te)'라고 불렀다. 베트남이 동남아에서 가장 근대적이고 혁명적인 국가임을 자부했다.

인도와 버마, 인도네시아 등은 이런 (북)베트남을 우려했다. 베트남의 공산화를 수용할 수는 있지만, 베트남이 주도하는 인도차이나 및 동남아시아의 공산화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아니 결단코 반대했다. 총대를 멘 것은 인도의 네루였다.

네루는 버마의 우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와 의견을 나눈 뒤, 중국의 저우언라이에게 의견을 전했다. 1954년 6월, 뉴델리 회동에서였다. 중국이 영향력을 발휘하여 인도차이나 서부에서 (북)베트남군을 철수시키라고 요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우언라이는 인도차이나 사정에 어두웠다. 베트남과 인도차이나의 차이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네루는 인도와 버마에 비유했다. 영국령 식민지라는 공통점은 있었으되 양국이 엄연히 별개의 국가이듯,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또한 별개의 국가라고 했다. 인도차이나는 어디까지나 식민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네루의 견해는 명쾌했다. 남/북 베트남의 통일은 지지하되,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중립주의 또한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베트남의 반제국주의 운동에는 성원을 보내되, 베트남의 제국주의적 행보 또한 제어하겠다는 뜻이다.

저우언라이는 설복되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독립 및 중립을 지지하기로 했다. 양국이 버마처럼 비동맹 노선을 걷는 '신형 동남아 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동남아에서 가능한 많은 중립 국가들이 등장하는 것이 미/소의 개입을 방지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다고도 여겼다. 이듬해 반둥회의(1955년)로 가는 길목이었다.

호치민도 수긍했다. 그래서 제네바 조약(1954년)이 타결된 것이다. 프랑스군과 더불어 베트남군도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호치민보다 한 세대 아래는 불만이 컸다. 혁명적 열정에 불타오르는 '신청년'들이었다. 인도차이나 혁명의 꿈을 버릴 수 없었다. 호치민을 '민족주의자'로 깎아내렸다. 호시탐탐 기회도 엿봤다.

2004년 출판된 쭈휘만(Chu Huy Man)의 회고가 흥미롭다. 라오스 혁명에 깊숙이 개입한 베트남 고문단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라오스로 파견되기 전 호치민과의 독대 장면이 나온다. 호치민이 이렇게 말했단다.

"우리의 친구인 라오스인들의 주권을 존중하고, 그 친구들이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는데 도움을 베풀어라. 결국은 그들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하라. 당신이 그들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 또한 '자력갱생'해야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쭈휘만은 호치민의 충고를 그 자리에서 받아 적고, 현장서도 따르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과연 호가 그런 말을 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호에 대해서는 원체 사후 각색과 윤색이 많기 때문이다. 설령 했다 하더라도, 그의 뜻이 실제로 옮겨진 것 같지도 않다. 당장 쭈 본인의 회고만 보더라도 베트남의 주도성이 너무나 역력하기 때문이다. '국제적 임무'와 최종적 승리에 대한 자부심 때문인지, 기층 단위에서 전개되었던 실천 양상까지 매우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헌신적인 베트남 혁명가들의 기록을 보노라면 마치 19세기 프랑스의 선교사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들은 혁명 사상을 전수하기 위하여 라오스 언어를 직접 배우고, 산간에 사는 소수민족 언어까지 학습했다. 어학 교재를 출판하고, 특수 학교도 세웠다. 라오스에서 '국어'가 전국 곳곳, 고산지대까지 보급될 수 있었던 것도 열정적인 베트남 혁명가들 덕분이었다.

철저한 '하방'을 실천하는 이들도 있었다. 현지인들처럼 머리를 길게 기르고, 피부를 더 검게 태우고, 라오스 식이나 소수 민족 식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지인과 결혼을 하거나, 마을 촌장의 양아들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진정성을 보임으로써 라오스인들을 '붉은 복음'으로 인도하고 자 했던 것이다. 실로 베트남은 식민모국에 맞서 군사적으로 승리한 세계 유일의 국가였다. '베트남의 길'이 곧 라오스의 미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뜻 한 세기 전 대남제국의 문명화 사업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민망 황제가 도모했던 '교화'의 반복이고 심화처럼도 보인다. 문명화가 근대화, 혹은 혁명화로 바뀌었을 뿐이다. 100년 전과 달리 물리력도 갖추어졌다. 프랑스가 건설한 교통망이 있었고, 소련과 중국에서 전수받은 군사력도 있었다. 평지에서 산지까지 더 높이, 더 깊이, 더 널리 베트남의 영향력이 침투한 것이다.

여기에 선교사적 혁명가들의 열정이 결합하여 '붉은 라오스'가 탄생했다. 라오스는 전통적으로 시암과 월남 사이에서 이중 조공을 하며 균형을 취했다.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불교 국가인 시암에 더 가까웠다. 라오스의 근대화 또한 입헌 군주제에 바탕을 둔 태국(타이)식 모델을 따랐다. 그러나 베트남 혁명가들의 '국제적 임무'로 말미암아 역사상 처음으로 베트남의 단독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이다. 20세기 동남아시아사의 획기적인 변화였다.

베트남과 라오스 간의 '특별한 우의(Tình Hữu Nghị Dặc Biệt Việt-Lào)'를 체현한 인물이 카이손 폼비한(Kaysone Phoumvihan)이다. 라오스 인민혁명당 첫 총서기이자, 라오스인민공화국 초대 수상이 되었다. 1920년생으로 어머니가 라오스인, 아버지가 베트남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하노이에서 유학하여 베트남어도 유창했다. 이처럼 인민혁명당의 주요 간부들이 혈연과 학연으로 하노이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1975년 이후에도 사상 및 이론 학습을 담당하는 당 간부 교육은 하노이에 있는 응우옌 아이 꾸억(호치민의 아명)학교에서 이루어졌다. 북의 군사 물자를 남으로 이송했던 호치민 루트가 괜히 라오스를 지났던 것이 아니다. 호치민 루트는 통일의 길이자 혁명의 길이었고, 또 제국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즉, 베트남은 미국이 그러했듯이 라오스의 운명을 라오스인의 손에 맡겨둘 의사가 거의 없었다.

미국은 라오스 왕정을 도와 국군을 양성했고, 베트남은 인민혁명당을 지원하여 혁명군을 양성했다. 제네바 조약을 어기면서까지 전개된 이 북베트남의 비밀공작이 당시 소련과 중국에 얼마나 알려졌는지는 미지수이다. 내 판단으로는 베트남의 독자 행보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사회주의 국제주의'의 실천보다는 '대남제국'의 현대적 계승에 가까웠다.

1977년 통일 베트남과 '붉은 라오스' 간 조약이 체결된다. 소련과 동유럽에 방불한 비대칭적 동맹이 공식화되었다. 따라서 국가 간 체제의 확립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왕년의 조공국을 내부로 편입시킨 것에 가깝다. 이로써 베트남은 라오스의 외교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 등 내정에도 깊숙하게 개입할 수 있었다. 5만 명의 베트남군이 주둔하며 사회주의적 개조를 진두지휘 했다.

1979년 베트남은 캄보디아까지 점령했다. 이로써 베트남이 축이 되어 라오스/캄보디아를 하위 파트너로 거느리는 허브 앤 스포크(Hub and Spokes)도 완성되었다. 라오스도 캄보디아도 '속국의 근대화'를 경험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한 것은 소련이었다. 1979년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해이기도 하다.

미군이 떠난 남베트남에도 소련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통일 베트남이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어간 것만큼이나, 인도차이나에도 동구형 질서가 이식된 것이다. 차이라면 프랑스/베트남(우파) 연합의 인도차이나에서 소련/베트남(좌파) 연합의 인도차이나로 전환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 '붉은 대남제국'을 저지하고자 동남아 국가들이 합심하여 등장한 조직이 바로 아세안이었다. 인도차이나 대 아세안, 1980년대 동남아의 '신냉전' 구도였다.

아세안 : 우정의 다리

동유럽과 동남아의 탈냉전은 동시적이었다. 소련이 동유럽에서 철수할 무렵, 베트남도 캄보디아/라오스에서 철군했다.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유럽연합(EU)이 확대되어간 것처럼, '인도차이나연방'이 해소됨으로써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도 확산되었다. 동유럽의 위성 국가들이 독립 국가로 전환되었듯, 라오스와 캄보디아 또한 속국의 지위에서 벗어났다. 베트남이 아세안에 가입한 것은 1995년이다. 1945년 독립으로부터 반세기가 흘렀다. 마침내 제국 건설의 기획을 접고 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라오스 또한 해방 공간으로 돌아갔다. 10년간 탄압받았던 소승 불교가 되살아났고, 독립 초기에 추구했던 비동맹 중립 노선을 복구했다. 중국과 베트남, 태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취하고 있다. 아세안에 가입한 것은 1997년이다. 중국, 베트남, 북조선과 함께 현존하는 마지막 '사회주의 국가'들로서의 연대를 지속하되, 아세안의 구성원으로서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1994년 태국과 라오스를 가르는 메콩 강에 '우정의 다리'가 세워졌다. 1980년대 양국의 국경은 신냉전의 최전선이었다. 인도차이나와 아세안이 메콩 강을 사이로 길항했다. 이제는 딴 판이고 새 판이 열렸다. 동남아에서 바다를 면하지 않은 유일한 내륙 국가라는 특성이 라오스를 동남아 교통망의 허브로 변화시키고 있다.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과 모두 국경을 접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그래서 어떠한 통신망과 교통망도 라오스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중국의 운남성과도 국경이 닿는다. "5국 1성(五國一省)"으로 부상하고 있는 광역 경제권에서 중차대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운남성 쿤밍에서 출발하여 싱가포르까지 가닿는 고속철 또한 루앙푸라방과 비엔티엔 등 라오스의 주요 도시를 거친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메콩 강은 티베트 동부에서 발원한다. 운남성을 지나 동남아 주요 국가를 돌고 돌아 남중국해로 흘러나간다. 길이로는 세계 12번째, 수량으로는 세계 10번째에 꼽힌다. 20세기 메콩 강은 식민과 전쟁의 상징이었다.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의 분단선이기도 했다. 21세기는 동남아를 통합하고 중국 남부까지 잇는 평화의 물줄기가 되고 있다.

'우정의 다리' 건설은 20년째 이어지고 있다. 미얀마와 태국 사이, 태국과 캄보디아 사이, 캄보디아와 베트남 사이에도 '우정의 다리'가 생겼다. 그리고 이 다리들은 다시 아세안 하이웨이 프로젝트와 연결된다. 중국 남부와 동남아 내륙을 종횡으로 엮는 '1일 생활권'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남중국해가 부쩍 소란해졌다고는 하지만, 메콩 강에서 일고 있는 이 도저한 변화의 물결이 쉬이 꺾일 성 싶지는 않다. 강물이 흘러 바닷물이 될 것이다.

제국과 속국

몽골은 소련의 위성국에서 벗어나 동북아의 일원이 되었다. 라오스는 베트남의 속국에서 벗어나 동남아의 일국이 되었다. 동아시아의 남과 북에서 전개된 탈냉전의 양상이다.

동아시아 냉전은 양분이 아니라 삼분이었다. 미국-동맹국, 소련-위성국, 중국-주변국의 삼분 세계였다. 서구와 동구, 동방으로 나눌 수도 있겠다. 동구와 서구는 다른 듯 닮은 구석이 있었다. 공히 '속국의 근대화'가 전개되었다. 조공국이 식민지를 지나 동맹국/위성국으로 낙착되었다. 주권 국가, 독립 국가에 미달했다.

반면 속국을 해소해가는 역사 운동도 있었다. 중화 세계의 상/하국 관계를 대/소국 관계로 재편시켜가는 또 다른 근대화였다. 제국을 근대화하여 국가 간 체제에 적응시킴으로써 속국의 자립과 자결을 확보해간 것이다. 소수 민족에게는 자치권이, 주변 민족에게는 자결권이 부여되었다. 나는 이 100년의 역사 운동을 '중화 세계의 근대화'라고 표현한다.

즉, 동아시아의 20세기를 '중화 체제에서 국가 간 체제로의 전환', '전통 질서에서 근대 질서로의 전환'이라고 갈음하는 것은 몹시도 미흡한 진술이다. 명과 실이 부합하지 않는다. 실사구시에 어긋난다. 올바른 이름이 아니다. 동북아의 중화 세계와 동남아의 만달라 세계를 구성하는 복합계의 일부로서 국가 간 체제를 포용/포섭해간 과정이었다고 보는 편이 한층 적실하다.

그 과정에서 실로 다양한 발상들이 제출되었다. 두 사람만 꼽는다. 청말 사상가 장삥린은 몽골과 신장, 티베트, 만주는 독립시켜도 무방하다고 했다. 애당초 중원과는 문명이 다른 지역이었다. 반해 조선과 월남, 류큐를 편입시키고자 했다. 유교 문명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즉, 중화 문명을 계승한 국가끼리 협동하여 '대중국'을 이룸으로써 국가 간 체제에 들어가고자 했다. 번부를 독립국으로, 조공국을 제국의 내부로 삼는 기획이었다.

반면 민국 초기, 청년 마오쩌둥은 각 성들이 모두 독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동국, 산동국, 복건국 등 소중국으로 자립자강 하자고 했다. 각자도생, 자력갱생하여 차후에 '중화연방공화국'으로 합치자는 것이다. 전자는 '대국주의적 발상'이고, 후자는 '소국주의적 발상'일까.

쉬이 단정하기 어렵다. 각자 그 나름으로 국가 간 체제에 어떻게 적응해 갈 것인가에 대한 상이한 판단이 있었을 뿐이다. 즉, 만국공법으로 전수된 유럽형 세계 질서를 중화 세계의 어느 단위에서 어떤 수준으로 관철시킬 것인가에 대한 집합적 과제가 있었다.

21세기 하고도 1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완수되지 않은 숙제이기도 하다. 나는 이 못다 이룬 과제가 목하 동아시아를 짓누르는 '신냉전'의 망령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여긴다.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의 핵심 모순도 여기에 있다. 좌우 체제 대결도, 미중 패권 경쟁도 아니다. '미국식 조공 체제'와 '중국식 국가 간 체제'가 길항하고 있다. 신형 상-하국 관계와 신형 대-소국 관계가 충돌하고 있다.

동과 서가 뒤집어졌다. 서구가 '봉건적'이고, 동방이 '근대적'이다. 역사의 커다란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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