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교과서에서 '5.16'은 언제 '군사 정변'이 됐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교과서에서 '5.16'은 언제 '군사 정변'이 됐나? [기고] 역사교과서, 역사인식, 그리고 시민의식 ②

정부, 여당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으로 이제 온 국민이 한국에서 교과서 편찬 제도의 변천사를 꿰게 되었다.

익히 알려졌듯이 1895년 처음 근대 교과서가 발행된 이래 검인정 제도가 줄곧 유지되다가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들어선 뒤, 이듬해인 1973년 국정제로 바뀌어 1974년 국정 국사 교과서가 배포됐다. 그러나 국정 교과서 폐해에 대한 지적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2007년 다시 검인정 체제로 바뀌었다. 교과서 명칭도 "국사"에서 "한국사"로 바뀌었다. 국정제에서 검정제로 한국사 교과서 편찬 제도가 바뀐 것은 학계와 역사교육계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문화적 역량의 성장 덕분이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체제 수립 직후 "민족 주체성의 확립을 위한 국사 교육 강화 방침에 따라" 초·중·고등학교 국사 과목을 독립시키고, 그 일환으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국정제로 발행했다. 박정희 정권기에는 1974년에 처음 국정 국사 교과서가 나왔고, 1979년에 다시 개정판이 나왔다. 1974년 12월 고시된 제3차 교육 과정의 고등학교 교육 과정 일반 목표에는 "국사 교육을 통하여 올바른 민족사관을 확립시킨다"는 내용이 첫 번째로 제시되었고, 교육 과정에서 강조된 민족사의 주체성과 정통성의 강조, 민족사관의 확립 등은 교과서 내용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979년에 나온 개정판 고등학교 국정 교과서는 302쪽으로 1974년 교과서 232쪽에 비하면 분량이 크게 증가했다.


분량 증가를 주도한 것은 근현대사 부분이었고, 근현대 82쪽 가운데 개항기 41쪽, 식민지기 이후 41쪽으로 근현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27.2%였다. 근현대 가운데 식민지기 27쪽, 해방 이후 14쪽으로 각각 9%, 4.6%, 모두 13.6%의 비중을 차지했다. 이 교과서는 5.16 군사 쿠데타를 "혁명"이라 표현했고, 박정희 정권의 탄생과 정책에 대한 예찬도 4쪽에 걸쳐 길게 서술했다. 한국사 교과서가 유신을 정당화하고 정권 홍보를 담당하는 역할을 했던 셈이다.

전두환 정권기인 1981년 12월 제4차 교육 과정이 고시되었고, 1982년판 국사 교과서부터 상, 하 두 권으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전근대와 근현대가 각각 178쪽으로 근현대사가 전근대사와 같은 비중을 가진 한 권의 책으로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부터 근대로 시기 구분을 해서 개항기 이후를 사실상 근대로 기술한 1979년 교과서와 바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근현대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본문 356쪽 가운데 식민지기 이후가 58쪽으로 16.3%를 차지했고, 그중 식민지기 36쪽, 해방 이후 22쪽으로 각각 10.1%, 6.2%의 비중을 점했다. 현대 부분에는 "제5공화국의 성립" 항목이 추가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적 징후" 때문에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10.26 사태를 맞았다"는 서술이 눈길을 끈다. 또 "제5공화국은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모든 비능률, 모순, 비리를 척결하며, 국민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민주 복지 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있다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용비어천가가 이 교과서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1988년 3월 고시된 제5차 고등학교 교육 과정은 "역사적 사고력의 함양"을 이전 교육 과정에 비해 중시했다. 교과 목표를 "한국의 역사를 구조적으로 파악하여 그 발전의 특성을 이해하고, 역사 학습 과정을 통해 탐구 기능과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며, 올바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새 문화 창조와 민주 사회 발전에 기여하게 한다"고 제시했듯이 민족사관 교육뿐 아니라 민주 교육의 지향을 내걸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1990년에 간행된 고등학교 국사는 상, 하 두 권으로 전근대사 196쪽, 근현대사 202쪽이었고, 식민지기 이후가 74쪽으로 18.6%, 그 가운데 식민지기 42쪽, 해방 이후 32쪽으로 각각 10.6%, 8%의 비중을 차지했다. 이전에 비해 근현대 부분이 분량, 비율 모두 약간씩 늘었다. "북한의 공산화"라는 북한에 대한 소항목이 처음 설정되었으며, "6.25 남침"이 "6.25 전쟁"으로 바뀌었고, "5월 혁명"이 "5월 군사 혁명"으로 바뀌었다.

분단 체제와 당시 집권 체제를 합리화하는 논리가 반영되었으나, 학계의 근현대사 연구 성과를 수용하려 어느 정도 노력하고,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 의식한 흔적이 보인다.

1992년에 고시된 제6차 교육 과정에 따라 1996년에 간행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상, 하 두 권으로 전근대사 224쪽, 근현대사 230쪽이었고, 식민지기 이후가 104쪽으로 22.9%, 그 가운데 식민지기 60쪽, 해방 이후 44쪽으로 각각 13.2%, 9.7%의 비중을 차지했다. 1990년 교과서에 비해 근현대 부분이 분량, 비율 모두 증가했다. 이 교과서는 근현대사의 역사 용어를 새로 정리했다. "4.19 의거"를 "4.19 혁명"으로, "5.16 군사 혁명"을 "5.16 군사 정변"으로 바꾸었다. 박정희 정부나 전두환 정부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서술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5.18 민주화 운동"으로 바꾸어 기술했다. 5.18을 특정 지역의 민주화 운동으로 한정하지 않고, 전체적 맥락에서 해석한 것이다. 현대사에서 경제 영역과 통일 논의와 관련된 내용도 이전 교과서에 비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는 등 역사학계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1997년에 고시된 제7차 교육 과정에 따라 간행된 2006년 <고등학교 국사>는 4·6배판 판형에 6개 장으로 구성된 분류사 체제로, 모두 435쪽 분량이다. 이전 교과서와 달리 현직 교사가 대거 참여했고, 대학 교수와 고등학교 교사가 거의 같은 비율로 집필에 참여했다.


이 교과서는 일본 교과서 왜곡의 영향을 받아 근현대 부분이 확대되었고, 근현대사는 선택 과목으로 분리되어 2003년에 검정제로 간행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들과 체계나 내용이 비슷했다. 검정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의 근현대사 교육을 선도하는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국정제에서 다시 검정제로 바뀌기까지 한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동시대사 인식의 변화를 살펴보면 이 시기에 한국사 교과서의 수준이 향상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의 확대와 심화가 두드러진다. 근현대사 서술의 양적 비중이 확대되었고, 서술 내용도 확장되었다. 1979년 교과서만 해도 근현대로 분류된 개항기 이후의 서술이 30%를 밑돌았으나 1982년 이후 교과서들은 조선 후기로 근대의 기점이 올라가긴 했지만 전근대와 근현대가 상, 하 양권으로 분리됐고, 근현대의 서술 분량이 50%, 또는 50%를 근소하게 상회하는 비율을 유지했다. 교과서 편찬 시기가 내려올수록 서술 내용이 많아진다는 측면도 감안해야겠지만 어쨌든 일제 식민지기와 해방 이후에 대한 서술 분량과 비중이 꾸준히 증가했다. 또 교과서의 역사 인식이 사회나 학계의 역사 인식의 변화보다 늦는 것이 일반적이고, 사실은 가장 늦게 바뀌는 경향이지만 "5.16 혁명", "5.16 군사 혁명", "5.16 군사 정변"으로의 용어 변화에 상징적으로 드러나듯 사회적 인식을 반영하고, 학계 의견을 수렴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1974년 국정 체제하에 처음 등장한 고등학교 국사를 시작으로 1979년판, 1982년판 국정 교과서 모두 반공주의를 강조하고 경제 성장의 성과를 내세우며 독재 또는 권위주의 체제를 옹호하려는 역사관을 주입하는 정치적 이념 교육의 장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1990년대 국정 교과서부터는 민주화의 대세와 현대사 연구 붐에 힘입어 이념 교육적 색채가 약화되고, 유엔 인권이사회 특별조사관 보고서도 인정하듯 "역사 교육은 학문적 훈련으로서의 역사 이해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역사 교육의 본령을 관철하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이 시기 한국사 교과서들은 국정제의 틀 안에서지만 역사학계의 학문적 성과를 반영해서 객관성을 제고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동시대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수용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이 글은 <내일을 여는 역사> 2015년 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