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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은 보노보와 침팬지의 전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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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은 보노보와 침팬지의 전쟁터! [월요일의 '과학 고전 50'] <내 안의 유인원>
<프레시안>이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 사이언스북스와 함께 특별한 연중 기획을 시작합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 한 권의 '과학' 고전을 뽑아서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서평 대상으로 선정된 고전 50권은 "우리에게 맞춤한 우리 시대"의 과학 고전을 과학자, 과학 담당 기자, 과학 저술가, 도서평론가 등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2015년에 새롭게 선정한 것입니다. 이번 연재는 선정된 과학 고전 각각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또 새롭게 읽어보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김상욱 부산대학교 교수(물리학자), 손승우 한양대학교 교수(물리학자), 이강영 경상대학교 교수(물리학자), 이권우 도서평론가, 이명현 박사(천문학자),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 강양구 기자 등이 돌아가면서 서평을 쓸 예정입니다. 네 번째 서평은 이권우 도서평론가가 이어갑니다.

오늘의 과학 고전은 프란스 드발의 <내 안의 유인원>입니다!

▲ <내 안의 유인원>(프란스 드발 지음, 이충호 옮김, 김영사 펴냄). ⓒ김영사
빌 게이츠가 추천해 화제가 되었다는 데이비드 브룩스의 <인간의 품격>(김희정 옮김, 부키 펴냄)은 상반된 인간 본성을 '아담Ⅰ'과 '아담Ⅱ'로 분류해 눈길을 끈다.

아담Ⅰ은 커리어를 추구하고, 야망에 충실하며, 무언가를 건설하고 창조하고 생산하고 발견하려 한다. 또한 드높은 위상과 승리를 원하며 간단 명료한 실용주의 논리를 따른다. 한마디로 이력서를 채울 덕목을 중시하니, 경제학의 논리라 보면 된다. 이에 비해 아담Ⅱ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내적 인격을 갖추고 싶어 하며,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원한다. 더불어 친밀한 사랑을 원하고 자신을 희생하려 하고, 초월적 진리에 순응하며 살길 바라며, 창조와 자신의 가능성을 귀하게 여기는, 한마디로 도덕적 논리를 따른다. 우리의 내면은 두 명의 아담이 다투는 전쟁터인 셈이다.

임건순이 쓴 <순자> 해설서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리를 간다>(시대의창 펴냄)에는 예상한 대로 성선설과 성악설이 나온다. 맹자가 말하는 성(性)은 타고날 때 부여받은 것으로 어떤 내적 성질이나 본질을 뜻한다. 순자는 성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자연 발생적으로 인간이 보이고 드러내는 욕망과 감정이거나,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보이는 경향이나 성향을 뜻한다.

본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선이고, 욕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악인데, 여기서 말한 악은 기독교적 의미가 아니라 치우치고 이치에 어긋나며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거라 한다. 성선이든 성악이든 배움으로 선을 되찾거나 선으로 바뀔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유가로 묶인다.

그런데 유독 진화 생물학에서는 인간 본성을 폭력성과 이기성만으로 규정하는 이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의를 제기할 적마다 자연 선택에는 도덕이 없다고 강변했다. 바라는 바를 바탕대로 자연을 보지 말라는 뜻이다. 프란스 드발이 쓴 <내 안의 유인원>(이충호 옮김, 김영사 펴냄)은 영장류를 거울삼아 인간 본성을 탐구한 책이다.

잘 알다시피, 유인원과 인간은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 지은이에 따르면, 판 속에 속하는 침팬지와 보노보는 250만 년 전에 갈라졌고, 인간은 550만 년 전에 판 속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 공통 조상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행동은 화석으로 남지 않는다." 그래서 영장류를 관찰하고, 그 결과를 이론화하면 인간 본성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만약 이 책도 인간 본성의 폭력성과 이기성만을 강조했다면 굳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그것을 말해버린 책들이 수두룩하니 말이다.

지은이의 주장을 살피기 전에 먼저 물어볼 게 있다. 왜 진화 생물학자들은 인간 본성의 폭력성과 이기성에 방점을 찍어 왔을까. 지은이는 "가장 문명화된 사회라 여겼던 유럽의 심장부에서 자행된 만행"에 대한 과학적 변명이라 본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벌어진 가공할 폭력을 이해하려고 동물과 인간 행동을 비교하는 연구가 빈번했는데, "문명의 얇은 단판을 뚫고 나와 인간의 고결한 성품을 밀어낸 것은 우리의 유전자 속에 숨어 있던 동물의 본성과 비슷한 무언가가 틀림없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를 펴내며 "진화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기 때문에 이기심은 우리를 끌어내리는 결점이 아니라 변화의 원동력"이라 말했을 때는 공교롭게도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사회 해체를 선언하며 극단적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던 때와 일치한다.

인간의 폭력성과 이기성을 뒷받침한 유인원은 침팬지다. 이 유인원은 폭력적이고 권력에 굶주려 있으며, 지극히 수컷 중심이다. 침팬지가 원숭이를 사냥해 두개골을 박살 낸 다음에 산 채로 잡아먹는 장면이 보고되었다. 또 자신의 세력권 경계를 벗어난 방심한 적의 뒤를 따라 가다가 포위한 뒤 잔인하게 때려죽이는 모습도 관찰되었다. 이때의 폭력은 동족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른바 도살자 유인원의 면모가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인의 후예인 셈이다.

지은이는 침팬지 집단에서 나타나는 폭력성과 이기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우리가 함께 주목해야할 유인원으로 내세운 것은 보노보였다(프란스 드발은 침팬지와 보노보를 두루 연구했다). 이 유인원은 침팬지와 전혀 달랐다. 보노보끼리는 생명을 위협하는 전쟁이나 사냥이 없었다. 또 수컷의 지배도 없었다. 오히려 암컷의 지배, 협력적인 성격, 사회 조화를 목적으로 한 섹스가 특징이었다. 침팬지가 종횡무진 서부를 누린 무법자 형이라면, 보노보는 낭만과 쾌락을 즐기는 히피 형이라 할 만하다.

꼭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진화 생물학자들은 왜 보노보에 관한 보고는 의미 있게 평가하지 않았는가라고. 지은이는 이들이 베토벤의 오류를 저질렀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 말은 과정과 결과가 서로 비슷해야 한다는 가정을 일컫는다. 베토벤 음악이 완벽하니, 그 음악을 구상하고 작곡한 공간도 정갈했으리라 믿는 것은 큰 착오다.

실제로 베토벤의 아파트는 난장판이기 일쑤였고, 베토벤은 입성이 남루해 부랑자로 오인당한 적도 있다. 과정과 결과는 서로 별개인 법이다. 그럼에도 "자연 선택은 무자비하고 가혹한 제거 과정이므로 그 결과로 잔인하고 무자비한 생물이 탄생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진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생존과 번식에 폭력과 이기성만이 유리하다고 할 수는 없다. 협력과 유대, 그리고 이타성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하나 더 있다. 버트 홀도블러와 에드워드 윌슨은 과학자를 이론가와 박물학자로 나누었다. 이론가는 특정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생명체를 찾게 마련이다. 유전학자가 초파리를 선택하는 이유를 짐작하면 된다. 박물학자는 자신이 다루는 생명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주목한다. 그 이야기에 깊이 파고들면 이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믿고 특정 동물 집단 자체에 주목한다.

그동안 침팬지를 돋을 새김한 것은 다분히 이론가적 관점에서 인간 본성을 말해온 탓이다. 나치의 만행을 설명하고 신자유주의의 장점을 설득하는 것과 침팬지의 특징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역시 과학은 현실에서 유리되어 있지 않다.

이제, 유인원을 통해 본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는 균형을 이룬다. 지은이는 말한다.

"요점은 인간이 침팬지와 보노보의 집단 간 행동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 사회의 관계가 나쁜 경우는 침팬지 집단 사이보다 훨씬 나쁘지만, 관계가 좋을 경우에는 보노보 집단들 사이보다 훨씬 좋다. 우리의 전쟁은 침팬지의 '동물적인' 폭력을 훨씬 넘어서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렇지만 이웃 간의 좋은 관계에서 주고받는 이익은 보노보 집단 사이에서보다 훨씬 크다. 인간 집단은 단순히 섞여 어울리면서 섹스를 나누는 것 이상으로 큰일들을 할 수 있다."

인간 본성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뇌 과학의 발전이 한몫했다. 도덕적 딜레마를 던져주고 실험자를 뇌 판독 장치에 집어넣었다. 실험 결과, 도덕적 결정이 확장된 신피질 표면에서 일어나지 않고 과거의 감정 중추를 활성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도덕적 결정이 수백만 년 전에 일어난 사회적 진화의 결과라는 뜻이다. 지은이는 이 사실이 다윈의 진화론과도 맞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게임 이론도 이기성과 이타성을 규명하는 데 적절히 활용되었다. 죄수의 딜레마이든 최후통첩이든 인간에게는 이기성도 이타성도 있음을 증명했다.

그런데 왠지 이런 과학 실험이 내심 불편하다. 본성, 그러니까 궁극의 그 무엇을 파헤쳐보겠다는 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유의 책을 읽을 적마다 인간은 "본성의 유전적 프로그램을 맹목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되뇌고 싶다. 빈 서판 이론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며, 더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샤르트르를 옹호하지 않는다. 분명히 우리에게는 타고난 바가 있으며, 구조에 얽매어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타고난 우연 때문에 더 많은 부와 권력을 누리는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의론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구조를 타파해 실존에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길은 무엇인지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내 안에 유인원이 있다. 그것은 두말할 바 없이 침팬지와 보노보일 터다. 그러나 나는 두 유인원을 넘어서고 싶다. 생존과 번식을 넘어서 더 영원한 그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싶다는 말이다. 결국에는 처절하게 실패하더라도. 그래서 인간이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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