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국가 개조 프로젝트'였던 4대강 사업, 그리고 7년. 그동안 아픈 눈으로 강과 강 주변의 변화를 지켜보았고, 그 힘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으며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지율 스님과 예술가들이 '4대강 기록관'을 지으려 합니다. 기록관은 모래강 내성천의 개발을 막기 위해 내성천의 친구들이 한평사기로 마련한 내성천 하류, 낙동강과 인접한 회룡포 강변 대지 위에 세워지게 됩니다.
이 연재는 기록관 짓기에 함께할 여러분을 초대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
강가 쪽 밭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볕이 좋았다. 모자 밑으로 드러난 목덜미가 따뜻했다. 가을걷이 끝난 논이 깔끔하게 이발을 하고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할매는 알곡 익은 벼가 가득 차 있을 때보다 요즘 논이 훤하고 반듯해 보기 좋았다. 살색이 건장한 사내 같은 땅 기운이 느껴졌다. 텔레비전에서 사흘이 멀다고 얘기하는 치매라도 오는 건가. 호미를 들고 그저 무심코 지나던 길인데 전에 없이 잡념이 많아졌다. 집에 있자니 속이 번다해서 밭으로 나서면 쓸데없는 생각들이 더 가지를 쳤다.
"어이쿠야."
할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을 다잡고 집을 나섰건만 수없이 오고 간 걸음의 습관은 고개를 들지 않겠다는 다짐을 쉽게 저버렸다. 강가 왕버드나무 군락에서 원앙이 유난하게 떼로 노닐 때나 잠깐 눈을 두었을까. 그냥 그대로 산이며 강은 계절이 바뀌듯 거기 있는 것이어서 따로 보고 말 것이 있는가 하며 살았다. 다시는 쳐다보지 않겠다고 모지락스레 마음을 먹고 나서야 할매는 번번이 건너 산을 바라보는 고약한 제 버릇을 알게 되었다.
굴삭기는 전보다 더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산에 턱 걸쳐 있는 굴삭기를 처음 본 날은 아찔하고 얼이 빠져서 걸음을 뗄 수조차 없었다. 겨울밤 한데서 오줌을 누고 난 뒤처럼 몸이 찌르르 했다. 여기저기 시끄러운 공사 소리가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 난리 통에 탱크처럼 몇 번 중장비가 움직이면 눈앞에서 삽시간에 집이 허물어지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산꼭대기에서 움직이는 굴삭기는 집을 부술 때와는 달리 곧 균형을 잃고 곤두박질 칠 것만 같았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이 막히던 처음보다야 덜했지만 감았던 눈이 침침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까짓 밭뙈기 하루 돌보지 않는다고 뭔 수가 나려나. 길에서 가까운 상길네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상길네는 어디로 간 걸까. 잘 지내는지 사는 건 어떤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굽은 허리가 시계바늘 아홉시 반과 같다고 아홉시 반 인생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던 이였다. 오십 줄에 남편을 여의고 혼자 논농사를 감당하면서도 명랑하고 바지런한 사람이었다. 마을이 어수선해지니 쾌활한 성격은 다 없어지고 몇 번이나 자식 형제간 소원한 자기 처지만 하소연하고는 했다. 이주단지로 갈 작정이 섰거나 자식들 근방으로 옮겼다면 스치는 얘기라도 있기 마련이었다. 상길이네 소식은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온다 간다 말도 없었다. 이 집마저 헐리면 상길네는 처음부터 아예 마을에 없던 사람처럼 되는 겐가. 육십 년 넘게 한 곳에서 살아온 세월이 사람들 사이로 흐르는 한 줌 바람으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얼핏 발목으로 바람이 들었다. 동생 집을 다녀온 뒤로 부쩍 심해진 증상들이 있었다. 종일 방구석에 박혀 송장처럼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기도 했다. 아플 때도 평생 반나절을 넘기면서 그런 적은 없었다. 별의별 생각이 한번 물꼬를 트면 멈추지를 않았다. 밤에도 한경 자고나면 통 다시 잠들지 못했다. 낮과 밤이 섞인 그런 날은 정말 치매인가 싶어 부리나케 자리를 털고 앉아 머리며 옷매무새를 훑어보고는 했다.
같이 살자는 동생 말을 곧이 믿은 건 아니었다. 전화기 너머로 사람 없는 마을에 혼자 있지 말고 얼른 오라는 말이 고마웠다. 내일 아침이 안녕할지 장담할 수 없는 나이였다. 십수 년 전인가 조카딸 결혼식에 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온 적이 있었다. 집도 마을도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하니 피붙이 연도 일체 끊어지는 건 아닌가 싶고 아무도 없이 혼자 죽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마을이 온전할 때는 한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그만그만하게 살았다면 서울에 가는 건 엄두 낼 일이 못 되었다. 죽기 전에 동생 사는 거라도 한 번 더 봐두자 큰맘을 먹었다.
터미널에서 겨우 지하철역까지 가는데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동생은 사람들 틈을 익숙하게 빠져나갔다. 층계며 에스컬레이터도 다부지게 잘 올랐다. 전철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동네로 들어서면서부터는 도저히 속이 매슥거려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골목이 얼마나 좁고 가파른지 버스가 뒤집히지 않고 다니는 게 용했다. 골목을 돌 때마다 몸이 휘청거리고 현기증이 일었다. 옆자리 동생 말소리조차 웅웅거릴 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울렁거리는 부대낌보다 정신이 번쩍 들게 놀라운 건 버스 안 사람들의 평온한 모습이었다. 같이 타고 있는 사람들이 영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저승길이 이만치 혼이 빠질까 싶게 맥이 떨어지고 고단했다.
딴에는 별미를 차려내는 동생 마음을 생각해서 밥술을 떠 보려 했지만 입이 쓰고 깔끄러웠다. 집에서 대충 뜯어 된장에 먹는 상추 맛만 못했다. 서울 나들이도 하고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자는 동생 말도 따르기 힘들었다. 집안에 있으면 답답했고 대문 밖은 몇 걸음 떼기가 무섭게 자가용과 마을버스에 길을 비켜야 했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신경이 곧추서서 동네 한바퀴는 언감생심이었다. 양지 바른 벽에 앉아 있으면 젊은이들이 핸드폰을 들고 앞을 가로 막아 섰다. 알고 보니 담벼락의 커다란 그림들을 보려고 사람들이 골목을 찾아온다고 했다. 보기 좋으라고 온 동네에 공들여 그려 놓은 꽃 그림이 산란한 마음 탓인지 할매는 어수선하고 요란스럽기만 했다.
꼭 동생 현순이와 살림을 합쳐 살겠다고 서울에 간 건 정말 아니었다. 그런데도 서글프고 이상하게 몸에 기운이 돌지 않았다. 죽기 전에 동기간에 어릴 적 얘기를 실컷 나누었으니 다행이고 그것으로 족했다. 옛날 고향 얘기를 어제 일 마냥 떠들 기회가 사는 동안 더는 없을 테니 일부러라도 잘한 일이었다. 나흘째 되던 날 영주 행 기차를 탔다.
점점 해가 짧아졌다. 할매는 옆으로 손을 뻗어 흙먼지 앉은 상길네 마루바닥을 두어 번 쓸었다. 호미를 들고 일어섰다. 원구댁네 길 밑으로 경작금지 현수막이 삐딱하게 펼쳐져 있었다. 원구댁 할매가 성치 못한 할배와 이주단지로 짐을 옮겼지만 어떻게 사는지 가보지 못했다. 누가 차로 데려다 주지 않으면 한번 가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오육십 년을 아침저녁으로 보고 산 세월이 건강하자는 한마디 인사 말고는 아무 기약도 남은 것도 없었다.
굴삭기는 여전히 몸통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엉덩이 큰 코끼리가 절벽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오후의 마른 바람이 고개를 숙인 채 뒷짐을 지고 걷는 할매의 등을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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