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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쩌다 '자살 공화국'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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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쩌다 '자살 공화국'이 됐나? [백년포럼] "'국가 대 시장'에서 '자본 대 사회'로"

"이건 불온한 사상이다. 공부하면 취업이 안 된다. 이 분야 대가는 교수 임용이 안 돼서 택시를 몬다. 그런데 세상을 바꾸는 혁명은 불온한 사상에서 비롯된다."

박인규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이사장이 한 말이다. 그런데 무슨 사상 이야기일까? 박형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부소장이 전공한 '권력자본론'이다. 과거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했던 이들에게는 낯선 사상이다. 그들은 대개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린 마르크스경제학을 공부했다. '권력자본론'은 접근방식이 마르크스경제학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불온한 성격'은 마찬가지, 아니 더하다. 진보 지식인도 보수와 공유하는 통념이 있다. '권력자본론'은 그것까지 깨부순다.

깽판 치는 자본, 생산성엔 관심 없다


마르크스경제학은 가치를 노동과 생산으로 설명한다. 우리 통념과도 대체로 겹친다. 하지만 '권력자본론'은 가치가 '남을 배제할 수 있는 힘에서 나온다'라고 설명한다. '전략적 사보타주'라는 개념이다. '권력자본론'에 이념적 젖줄을 댄 소스타인 베블런은 사보타주를 "생산 현장에서 효율성을 의도적으로 퇴보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풀어 쓰자면 '깽판'을 칠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으로 남을 배제하고 이익을 사유화 한다.

예컨대 어떤 천재가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 소프트웨어를 쓸 수 있다면, 사회 전체가 풍요로워진다. 그런데 이 소프트웨어에 소유권이 설정됐다. 비싼 값을 치러야만 쓸 수 있다. 이런 질서가 생기기 전과 비교하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은 오히려 떨어진다. 사회 전체의 이익이란 관점에선, 배타적인 소유권을 강제하는 게 일종의 '사보타주'인 셈이다. 이런 식으로 사회가 손해를 감수하게끔 하는 힘, 사회의 이익과 무관한 질서를 강제하는 힘, '비싼 값'이라는 기준을 제멋대로 설정하고, 거기에 미달하는 이들을 강제로 배제하는 힘. 자본이 만들어낸 가치는 이런 권력에서 비롯됐다.

'권력자본론'의 일부인데, 한국에서 '불온한 사상'의 대표 격으로 통했던 마르크스경제학과는 확실히 다르다. 마르크스경제학이 묘사한 자본은, 비록 비인간적이지만 생산성 극대화라는 목표에 대해선 의심이 없다. 반면 '권력자본론'은 자본에게 생산성이 부차적인 문제라고 한다. 중요한 건 사보타주다. '권력자본론'이 어쩌면 더 불온할 수 있는 건, 자본이 생산을 위해서조차 별 도움이 안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 지식인에게도 생소했던 '권력자본론'. 그걸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귀한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 1월 2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제4회 백년포럼이다. 박형준 부소장이 "한국 사회, 경로를 바꿔라: '국가 대 시장'에서 '자본 대 사회'로"라는 주제로 발제를 했다. 그는 '권력자본론'의 대가인 조너선 닛잔 캐나다 요크대학교 교수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날 포럼에서 최상명 우석대학교 교수가 지정토론자로 나섰다. 박인규 이사장이 사회를 봤다.


▲ 박형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부소장. ⓒ프레시안(김봉규)

강하고 작은 국가, 자본의 동반자

발제문 주제가 곧 핵심이다. 박 부소장은 '국가 대 시장'이라는 도식을 거부한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렇다.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관료와 기업인은 대립 관계가 아니다. 관료들은 시장 원리를 신념으로 삼는다. 관료가 앞장서서 공공 부문을 민간에 넘긴다. 기업도 마찬가지.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원하는 기업은 없다. 경쟁 대신 독점을 원한다. 경쟁 기업을 배제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등에 업는다. 국가와 결탁하지 않은 자본은 시장에서 퇴출된다. 정부와 몸을 섞은 자본만 살아남는다. '국가 대 시장'이라는 도식이 한국 현실에서 통했던 적은 없다.

하지만 그간 한국 사회 성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대부분 '국가 대 시장'이라는 도식 위에서 진행됐다. 국가를 상징하는 건 박정희였다. 국가 주도로 경제 성장이 이뤄졌다고 보는 쪽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여를 인정한다.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인권을 짓밟은 잘못과 경제를 성장시킨 공로를 저울질 하곤 했다.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독재를 한 잘못이 더 크다거나 혹은 그 반대라는 식이다.

그러나 '권력자본론' 입장에선 이런 이항 대립 자체가 잘못이다. 따라서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가 이야기하는 발전국가 노선과도 거리를 둔다. 장 교수는 정부의 산업정책 기능을 강력히 지지한다.

박 부소장은 국가가 적당한 자율성을 누리면서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는 전제 자체가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본다. 강한 국가였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작은 국가였다. 공공성은 매우 낮았다. 결국 약자를 보듬는 국가의 책임은 방기됐다. 정부 관료가 기업 경영진보다 더 공공성이 강한 시각을 택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정부는 재벌 기업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특혜를 줬다. 국가 보증, 외국 차관 배분, 수탈적인 노동 정책 및 보호무역 정책 수립 등이다. 요컨대 재벌의 성장에 드는 비용은 사회가 떠안았다. 이익은 재벌이 사유화 했다. '권력자본론'이 가르치는 대로다. 자본은 국가와 손잡고 경쟁자 진입을 막는 울타리를 쳤다. 산업 활동으로 생겨난 이익이 공유지가 아닌 재벌의 사유지로 흐르도록 유도했다. 국가와 자본은 같은 목표를 좇는 동반자였다.

경제성장? 재벌의 성장!


이런 성장을 정부 산업정책의 순기능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경제 전체가 아닌, 소수 재벌의 성장이었기 때문이다. 발전국가 노선과 갈라지는 대목이다. 중요한 건 성장 그 자체가 아니다. 어떤 성장인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성장은 이 대목에서 문제가 있었다.

박 부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 간 삼성의 자산과 이윤은 국민경제의 발전 속도보다 20배나 빠르게 성장했다. 약자를 배제하고, 재벌에게 이익을 몰아준 성장이었다는 게 통계로 증명된다.

이런 경향은 1987년 민주화, 1994년의 세계화 선언, 1997년의 IMF 외환위기 등을 거치면서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더 견고해졌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IMF 외환위기 이전 10년간 기업 전체 이윤 대비 재벌 평균 이윤을 보면 30대 그룹이 14.7%, 4대 그룹이 10.7%, 그리고 삼성그룹이 4.4%였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지나간 뒤인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간 이 비율은 각각 55%, 34.2%, 17.1%로 높아졌다.

이는 같은 시기를 다룬 다른 통계와 함께 살피면, 의미가 도드라진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10년 동안 GDP(국내 총생산) 성장률은 연 평균 8.7%였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 동안은 이 수치가 4.2%였다. 그런데 국민가처분소득 대비 법인기업 이윤을 보면, 1987년부터 1996년까지 10년 동안은 GDP 성장률과 같은 방향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반면, 2001년부터 2010년까지는 GDP 성장률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국민가처분소득 대비 법인기업 이윤은 2000년 4.2%였지만, 2010년 13.8%로 늘었다. 같은 기간, GDP 성장률은 꾸준히 하락했다.

비용의 사회화, 이익의 사유화

기업 이윤과 GDP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건, 기업이 성장한 만큼 다른 누군가가 손해를 본다는 뜻이다. 실제로 국민총소득에서 가계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73.6%였으나, 2010년에는 63%가 됐다. 가계소득 비중이 줄어드는 동시에 가계 내의 소득 불평등은 더 심해졌다. 이는 가계소득이 낮은 집단은 전보다 형편이 나빠졌다는 뜻이다.

그와 짝을 이루는 게 재벌 총수들의 소득이다. 10대 그룹 총수들이 보유한 주식가치는 2000년 9370억 원에서 2011년 28조3560억 원으로 서른 배 가까이 늘었다. 그들이 받는 배당 소득 역시 2001년 310억 원에서 2011년 1780억 원으로 여섯 배 가까이 늘었다.

박 부소장은 이런 통계를 기초로 "'투기적 외국자본'과 '생산적 국내자본'이라는 이분법적 접근 방식이 허구적"이라고 지적했다. 국내자본 역시 생산적이지 않다. 그들은 국민경제를 희생시키면서 성장했다. 재벌과 국민경제가 함께 성장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비용의 사회화, 이익의 사유화'를 달성하는 구조는 견고하게 정착됐다. 국제 투기자본의 공격으로부터 국내 산업자본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이 없다고 보는 이유다.

'자살 친화적 성장', 경로 바꿔야 산다

숙주를 희생하며 성장하는 기생충처럼, 재벌은 성장에 드는 비용을 사회에 떠넘겨 왔다. 박 부소장이 소개한 통계는 한국의 경제 성장이 지닌 이런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른바 '자살 친화적 성장'이다. 다른 나라에선 1인당 GDP가 성장하면, 대체로 자살률이 떨어진다. 그런데 한국은 1인당 GDP와 자살률이 함께 움직인다. 둘 사이의 상관계수는 매우 높다. 주요 국가 가운데 한국과 미국이 이런 경우다.

사회 안에서 재벌이 울타리를 친 사유지가 꾸준히 늘어났다. 재벌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희생시킨 대가로 성장했다. 재벌 사유지를 둘러싼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은 계속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결국 경제가 성장할수록 시민 다수의 삶은 불행해진다. 그 결과가 '자살 친화적 성장'이다.

박 부소장, 그리고 백년포럼 주최 측이 "한국 사회, 경로를 바꿔라"라고 하는 건 그래서다. 우리는 지금껏 경제만 성장하면 우리 삶도 행복해진다고 믿어왔다. 경제 성장을 위해 다른 가치가 희생돼도 좋다는 믿음은 그래서 견고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 근거가 없다는 게 드러났다. 경제가 성장하면, 사회가 망가지고,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경로 변경의 장애물

▲ 박형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부소장. ⓒ프레시안(김봉규)
그렇다면, 경로를 어떻게 바꿔야 하나. 뚜렷한 정답은 없다. 다만 분명한 건, 국가-자본 동맹에 맞서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국가와 자본이 서로 한 몸을 이룬 채 만들어낸 결과가 '자살 친화적 성장'이었다. 노동 및 시민사회가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신뢰를 쌓아야 한다. 신뢰가 있어야만 복지도 가능하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머지않아 내 문제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처지가 달라도 함께 어깨를 걸어야 한다는 믿음. 그게 있어야 국가-자본 동맹의 탐욕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세금을 더 내서 복지를 강화하려는 시도 역시 신뢰가 쌓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정부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정부를 감시하는 정치권과 시민사회에 대한 신뢰와 맞물려 있다. 하지만 한국은 정부에 대한 신뢰, 사회적 신뢰 모두 최하위 그룹에 속한다. 경로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난관은 이밖에도 많다. 세계 주요 국가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인구 고령화 역시 경로 변경의 발목을 잡는다.

'자살 친화적 성장'과 다른 길을 가려면, 복지를 늘려야 하는데 인구 고령화는 이를 어렵게 한다. 지금은 경제활동 인구 6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한다면, 2040년에는 경제활동 인구 2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한다. 복지 수준을 높이는데 따르는 부담이 대폭 커진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복지 수준을 낮춘다면, '자살 친화적 성장'에는 가속이 붙는다. 어려운 숙제다. 유난히 높은 자영업 비율 역시 골칫거리다. 한국의 전통 때문이라면,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경제 위기 및 대기업 노동자의 조기 퇴출 탓에 자영업 비율이 늘어났으므로 문제다. 이들 자영업자는 대부분 비슷한 사업을 하는 탓에 경쟁이 갈수록 심해진다. 채산성 악화가 필연적인데, 대책은 잘 안 보인다.

서비스업의 낮은 생산성 역시 문제다. 한국의 사회경제 모델은 제조업 중심의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잉태됐다. 그런데 제조업 비중이 줄고 있다. 빈자리를 메운 서비스업의 생산성은 매우 낮다. 이는 기존 사회경제 모델의 위기인 동시에, 새로운 모델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대목이다. 복지와 성장이 선순환을 이루는 구조가 되려면,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대폭 높아져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서비스에 돈을 쓰지 않는 구조와 문화가 견고하다. 이는 서비스업의 부가가치를 떨어뜨린다. 당연히 생산성도 함께 떨어진다. 그러니까 더욱 서비스에 돈을 쓰지 않는다. 이런 악순환을 깨야, 기존과 다른 사회경제 모델이 정착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가 뭔가요?"

기존 성장 모델은 그 성과가 두드러졌던 만큼, 거기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박 부소장 역시 앞서 거론한 것 외에도 다양한 난관이 있으리라고 봤다. 다만 분명한 건, 우리와 다른 경로를 따르는 자본주의 모델도 많다는 점, 그리고 이들 모델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독일, 스웨덴 등인데, 이들은 모두 민주주의적인 사회적 조정기제를 갖고 있다. 한국 역시 답은 민주주의에서 찾아야 한다. 자본의 전략적 사보타주는, 사회를 병들게 한다. 이를 막는 건 국가가 아닌 사회다. 앞서 거론한 것처럼, 국가는 이미 자본과 한 몸이므로. 따라서 사회에 민주주의를 심는 것이야말로, 다른 경로를 찾아나서는 첫 걸음이다.

▲ 최상명 우석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성현석)
이런 결론을 놓고, 최상명 우석대학교 교수가 질문을 던졌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그는 "대체 '사회'가 뭐냐"라고 했다. 박 부소장의 발제는 '국가 대 시장'이라는 흔한 구도 대신 '자본 대 사회'라는 대립을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여기서 국가, 시장, 자본 등은 나름대로 개념이 정리돼 있다. 하지만 '사회'는 좀 막연하다.

우선 박 부소장은 국가와 시장의 공통점에 대해 설명했다. '국가 대 시장' 구도의 양 쪽에 있는 항인데, 둘 다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다. 예컨대 국가는 옛 소련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독립적으로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라고 보기 어렵다. 대개는 사회 전체의 힘의 관계를 반영해서 진로를 정한다. 지배적 자본이 원하는 방향에 편승한다. 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시장은 다양한 주체의 힘이 반영돼 있는 공간이다. 시장, 그 자체가 사회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시장 원리 역시 투명하고 공정한 원칙이 아니다. 지배적 자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규칙이 정해지곤 한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사회가 자신을 드러냈다


국가와 시장이 모두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므로, 이들의 대립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건 한계가 있다는 게 박 부소장의 생각이다. 그가 '자본 대 사회'라는 대립 구도를 지지하는 한 이유다.

이 가운데 자본은, '전략적 사보타주'를 통해 권력을 행사한다. 나름의 독립적인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주체인 셈. 그렇다면, '사회'는 뭔가?

박 부소장은 '사회' 개념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개념 정의가 아니라 실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회'가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하면, '사회'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게다. 전근대 시대엔 권력자의 폭정에 맞서는 민중 봉기가 종종 일어났다. 근대 이후에도 시민의 자발적 시위가 벌어진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엔, 금융자본의 횡포에 맞서는 '아큐파이 운동(Occupy movement)'이 벌어졌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시위다. 모두 국가 또는 자본의 기획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국가, 자본 등과는 다른, '사회'가 자신을 드러낸 사례로 봐야 한다는 게 박 부소장의 설명이다.

국가의 정책 자율성, 어느 정도인가?

최상명 교수 역시 국가, 시장, 자본 등의 개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다고 본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건강한 사회의 중요성에도 공감한다. 그러나 최 교수와 박 부소장의 의견에는 미묘한 차이도 있었다. 국가가 누리는 정책 자율성의 폭에 대한 생각이다. 최 교수는 이런 자율성이 제법 있다고 보는 편이다. 예컨대 토빈세(단기성 외환거래에 부과하는 세금, 국제 투기 자본 규제 방안이다) 도입이 그렇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가 자본을 규제하고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반면, 박 부소장은 국가의 자율성이 훨씬 적다고 보는 편이다. 투기 자본에 대한 규제 역시 외국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단일 국가가 자율적으로 하기엔 무리라는 게다. 그리고 외국과의 협력을 끌어내는 논리에는 대체로 지배적 자본의 요구가 반영돼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한국 역시 위기를 겪었는데,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서로 다른 통화를 미리 약정된 환율에 따라 일정한 시점에 상호 교환하는 외환거래, 급격한 환율 변동 위험에 대한 대책이다)를 통해 해결했다. 이 역시 위기 상황에서 단일 국가가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박 부소장은 국가의 자율성이 적다고 보므로, 국가를 도구로 쓰자는 입장에 대해서도 거리를 둔다. 국가 권력을 잡기만 하면, 그걸 도구로 삼아 사회를 바꿔갈 수 있다는 생각이 비현실적이라는 게다.

예고된 논쟁 : 집권 위한 타협,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나

국가의 정책 자율성이 그보다는 크다고 본다면, 국가 권력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이 더 커진다. 따라서 최 교수와 박 부소장의 미묘한 의견 차이는, 진보 진영의 정권 장악에 대한 절박함의 차이로 드러날 수 있다. 이날 포럼에서 이런 차이가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향후 대선 국면, 또는 야권의 집권 이후엔 진보 성향 사회과학 연구자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야권, 혹은 진보 후보에게 어느 정도 힘을 실어줘야 하느냐, 자본과의 타협에 대해 어느 정도 용인해야 하느냐를 둘러싼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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