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하루아침에 노동자서 사장된 구두공 노영 씨의 사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하루아침에 노동자서 사장된 구두공 노영 씨의 사연 [광장편지] 2월 10일~11일 박근혜 이후 다른 세상을 위해 행진합니다
박근혜 탄핵을 앞두고 마지막 신문이 될 <광장신문> 4호를 만들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시끌벅적한 곳, 조금 취한 목소리의 한 남자. 1년 전 서울 성수동의 후미진 구두공장에서 만난 제화공 홍노영(55) 씨였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들 떠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승소했다고, 큰 기업인 '텐디(TENDY)'를 상대로 고등법원에서도 이겨 동료들과 술 한 잔 먹고 있다고 했습니다. 토요일 밤까지 신발 만드느라, 촛불집회에도 잘 나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조만간 술 한 잔 하자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홍노영 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8년 동안 수제 구두를 만든 구두장이입니다. 서울 명동에서 시작해 지금 성수동 공장까지 금강제화, 엘칸토, 에스콰이어, 소다, 텐디, 리소페와 같은 유명 구두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갔습니다.

1970년대 구두장이는 남들의 부러움을 받을 정도로 벌이가 좋았고,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먹고살 만 했습니다. 하지만 기업들은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같은 공장, 같은 자리에서 같은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을 하루아침에 노동자에게 '사장님'으로, 정규직에서 하청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노동자에서 사장님이 된 사연

노영 씨는 낙성대에 있는 유명 구두회사 텐디 공장에서 백화점에 납품하는 구두를 만드는 정규직 노동자였습니다. 어느 날 회사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음날부터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망치와 가위로 구두를 만들었는데, 월급 대신 신발 한 족당 금액을 계산해 도급비를 받았습니다. 4대 보험과 퇴직금은 사라졌고, 개인사업자로 세금까지 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아무 것도 몰랐던 노영 씨는 제화노조의 도움을 받아 동료들과 함께 법원에 퇴직금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냈습니다. 지난해 2월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는 "강제적이고 형식적으로 소사장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라며 홍 씨를 비롯해 텐디에서 퇴직한 노동자 9명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이어 1월26일 서울고등법원 민사1부 역시 사측의 항소를 기각하고, 제화공들을 비정규직 소사장이 아닌 정규직으로 인정해 퇴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서울고등법원은 ①사용자의 지휘·감독 여부 ②사용자가 근무시간과 장소를 정하는지 ③원자재․작업도구․비품 제공 여부 ④이윤 창출과 손실 초래 등 위험을 누가 안고 있는지 ⑤지급받은 보수의 성격이 근로 자체인지 ⑥다른 구두회사 작업도 할 수 있는지 ⑦사업자등록을 스스로 했는지 등 7가지를 놓고 봤을 때 제화공들은 도급이 아니라 모두 텐디의 정규직이라고 봤습니다.

이에 앞서 지난해 9월 2심 재판부인 서울동부지법 민사1부도 기쁨제화와 베라슈에서 일한 노동자 3명에 대해 "처음부터 도급계약을 맺고 일했기 때문에 근로자로 볼 수 없다"는 1심 판결을 뒤집고, 사용자가 지휘감독을 하고 작업량과 근로시간을 통제했기 때문에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이번 판결로 정규직으로 일하다 소사장이나 하청으로 바뀐 제화공들이 정규직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기업을 상대로 집단 소송도 추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구두 대기업들의 불법 고용을 방관하고, 근로감독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법원에서 7차례나 불법으로 파견노동자를 사용했다고 판결 받은 현대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집에 가면 곯아떨어져 뉴스도 보지 못하고, 촛불집회에도 나가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법원의 판결을 알기 어렵습니다. 기업들은 법을 피해 또 다른 비정규직 제화공들을 만들어내겠지요. 가난한 구두장이 신세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법원에서 정규직 인정받은 제화공들

설 연휴가 끝난 첫 촛불시위는 전국에서 42만 명이 모여 촛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을 구속하라는 법원 앞 집회와 행진에도 많은 시민이 모였습니다. 이재용 구속영장 재청구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지고, 촛불 민심이 부자 동네 강남을 흔들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의 비아니마 총재는 "한국의 촛불시위는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표출된 경제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라는 정치사건이 아니라 못살겠다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불평등이 아닌 평등한 사회, 특권이 아닌 공정한 사회에 대한 바람입니다.

한국사회 불평등의 핵심에는 비정규직 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규직으로 분류되는 사내하청 노동자와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특수고용 노동자를 포함하면 한국의 비정규직은 1100만에 달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가장 비율이 높은 자영업자도 비정규직 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1100만 촛불이 타오른 광장에서 불평등의 근간인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라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습니다. 뇌물을 갖다 바치고 수 백 배 이윤을 챙긴 재벌에 대한 분노는 커졌지만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았습니다. 삼성 이재용과 현대차 정몽구의 뇌물 대가가 '노조 문제 해결'과 '노동법 개정'이었지만 해고를 쉽게 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박근혜표 노동개혁'을 되돌리라는 요구는 크지 않았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불평등의 핵심인 비정규직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에 입주한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머리를 맞댔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현대기아차, 에스케이브로드밴드, 쌍용차, 기륭전자, 유성기업, 콜트콜텍 등 자본의 탐욕에 맞서 싸워온 노동자들이 앞장서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기아자동차에서 14년째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김수억 분회장은 "정경유착과 재벌체제를 끝내야만 노동자 서민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며 "이재용, 정몽구를 비롯한 재벌총수들의 구속이 새로운 사회를 여는 첫 출발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촛불 민심이 불평등한 나라를 평등한 세상으로 바꾸라는 것이라면, 야당이 170석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국회에서 불평등을 양산했던 정리해고와 파견법을 폐기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입법을 제정하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들이 모여 '새로운 세상, 길을 걷자. 박근혜-재벌총수를 감옥으로!'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 정리해고, 노조탄압 없는 세상 만드는 1박2일 대행진'을 진행합니다.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과 시민들, 학생들이 함께 모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1박2일’입니다.

2월10일 오후3시 특검 앞에서는 '재벌의 추억-노동자연쇄살인극'이 펼쳐집니다. 황유미, 한광호, 최종범, 염호석, 윤주형, 박정식, 배재형, 양우권… 일터에서 재벌에게 죽임을 당한 노동자들의 신발이 무대 위에 오릅니다.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구속영장 청구서'를 특검에 전달합니다.

특검에서 삼성까지 '재벌총수 호송차 행렬'을 마친 노동자들은 삼성 앞에서 특별한 행사를 엽니다.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의 가족에게 줄 돈이 500만 원밖에 없다던 삼성이 최순실 일당에게 500억 원을 바친 사건을 상징하는 모형을 만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한 끼 식사인 500원짜리 컵라면을 먹고, 빈 그릇으로 상징물을 만듭니다.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신발

법원에 도착해 저녁 7시부터는 '사법살인, 법이 죽인 사람들을 기억하는 촛불문화제'를 엽니다. 법원이 이재용에게만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올 지도 모를 '경영상의 필요'로 튼튼한 기업이 정리해고를 한 것이 정당하다고 판결한 곳이 대한민국 법원입니다. 노동자에게 90억 원이라는 손해배상을 청구해도, 사진에 신발을 던졌다는 이유로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해도, '돈'의 손을 잡아준 곳이 바로 법원입니다.

정규직 지위가 확실한 '빼박' 사건이나 깡패를 동원해 노조파괴를 한 사건은 재판을 미루고 또 미룹니다. 법원 판결을 기다리다 정년퇴직 나이가 지나버리고, 병에 걸리고, 선고를 빨리 하라고 법원 앞에서 노숙농성을 해야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노동자들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전당에서 촛불을 높이 들고 '사법개혁'을 요구합니다.

22일 낮 12시에는 국회로 모여 '잠자는 국회를 청소하자'는 행사를 엽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신한국당의 장기집권 개헌을 막아내기 위해 개헌저지선(100석)을 달라고 했습니다. 새누리당은 국회 과반 의석으로도 국정원을 괴물로 만드는 ‘테러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런데 170석이 넘는 의석을 가진 야당은 단 한 건의 개혁법안도 처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국회의 힘만으로도 박근혜-최순실-재벌총수 일당이 벌인 노동개악, 사드, 국정교과서, 테러법 등을 바로 잡을 수 있고, 청년, 알바노동자들의 바람인 최저임금 1만 원을 법제화하고 정리해고제와 비정규직법을 없앨 수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들이 앞 다퉈 노동공약을 내놓습니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칼퇴근법을 만들고, 중학교 때부터 근로기준법을 교육하겠다고 합니다. 촛불이 만든 힘입니다. 대선 이후가 아니라 국회가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만약 지금 박근혜 일당과 새누리당이 170석을 가졌다면 무슨 일을 저질렀겠습니까?

38년 동안 손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명품 구두를 만든 홍노영 씨는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만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임금을 착취하는 대기업의 횡포를 정치가 막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박근혜 이후의 세상이 단지 권력자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를 평등한 세상으로, 특권이 지배하는 사회를 공정한 세상으로 바꾸는 것이어야 합니다. 노동자 시민들, 예술가들이 함께 국회에서 청와대까지 행진하는 이유입니다.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 길을 걷지 않으실래요?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박점규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서 선전홍보, 단체교섭, 비정규직 사업을 담당했습니다. 2008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사회적 기구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2010년 11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25일 점거파업에 함께 했고, 이후 한진중공업, 현대차 비정규직, 밀양 희망버스에 함께했습니다. 저서로는 <25일>, <노동여지도> 가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