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증권사인 브릿지증권의 대주주 골든브리지는 지난주 후반 "브릿지증권의 경영권을 매각한다"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해 브릿지증권을 인수할 때 빌린 자금을 갚기 위해 전체 지분에서 10% 정도를 매각한 것이 경영권 매각설로 부풀려진 것이다. 18일에는 서울증권의 강찬수 회장이 자신의 지분을 유진기업에 넘기기로 해, 대주주 변경이 가시화됐다.
최근 증권업계는 변화의 물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중소형 증권사의 매각이나 대주주 변경 같은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올해 1월에 세종증권이 농협에 인수돼 NH투자증권으로 변신한 것은 증권업 구조조정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증권사가 먼저 움직이고 있지만 선물회사, 자산운용회사 등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권오규 "올해 말 국회 통과" 다짐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정부가 추진하는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 금융투자업과 자본시장에 관한 법률)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달 29일 입법예고된 이 법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해 온 은행권에 비해 낙후한 직접금융시장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다는 취지를 갖고 있다. 이 법이 제정되면 지금처럼 고만고만한 회사가 차별성 없는 업무를 하고 있는 모습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자본금을 키우고 직원의 능력을 끌어올려 미국식 투자은행(Investment Bank)으로 가든가, 특정 업무나 산업분야에 집중해 틈새시장에서 살길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서울증권 강 회장이 밝힌 지분매각의 이유도 "대형화가 절실하지만 개인적인 자금력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판 골드만삭스, 메릴린치를 키운다'는 야심만만한 구호와 함께 자본시장통합법이 입법예고된 지 한 달이 돼 간다.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자본시장통합법안이 올해 말까지 국회를 통과해 2008년부터 시행되는 데 차질이 없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자본시장통합법은 금융회사의 기능이나 금융상품의 규제를 개선해 투자은행의 탄생을 이끌어낸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용어가 어렵고 전문적이어서 일반인들이 관심을 갖기는 어렵지만, 한국 금융에 '상전벽해'의 변화를 몰고 올 메가톤급 '태풍'이란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법 취지에 맞춰 미리 변신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고, 이 법이 갖는 맹점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삼성증권, 대우증권, 우리투자증권 등 업계 순위 5위권 내외의 대형 증권사들은 이 법의 제정을 위기이자 기회로 보고 투자은행으로의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우선은 투자의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자본금을 늘려 놓는 게 필요하다. 현재 이들 5대 증권사의 평균 자기자본은 1조6000억 원 수준으로 미국 메릴린치나 골드만삭스의 30조 원은 물론 일본 5대 증권사의 평균 4조4000억 원에도 못 미친다. 대우증권 손복조 사장은 최근 로이터 통신과의 회견에서 "투자은행으로의 변신을 위해 현재 1조8000억 원인 자기자본을 2010년까지 5조 원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중소형 증권사는 대부분 자기자본이 1000억~3000억 원에 불과해 자본확충으로 뭘 해보겠다는 꿈을 꾸기 어렵다. 특히 개인 대주주들이 대체적으로 인수합병(M&A)에 소극적이고, 임기가 2~3년에 불과한 전문경영인들 역시 장기적 비전을 갖고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다. 자기매매나 기관영업, 현금대여 등으로 아직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다는 분위기도 있다. 그렇지만 상당수 업체가 불가피하게 대형사에 인수되거나 청산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브릿지증권 강성두 부사장은 "투자은행은 인재가 핵심인데 1년 안에 실적이 나오지 않으면 바로 잘리는 증권업계의 풍토 역시 문제"라며 "장기적 안목을 갖고 특정 업무나 산업, 국가에 특화한 중소업체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투자은행 업무 가운데 M&A 중개만 하더라도 외국계나 대형사가 손대기에는 적절치 않은 일들이 많다"며 "국내 중소ㆍ중견 업체 가운데는 창업자가 나이가 들어 회사를 팔고 싶어 하는 곳이 많은데, 이런 경우의 M&A는 중소형 증권사가 특화할 수 있는 분야"라고 말했다.
"미국 제도의 국내 복제와 관련된 문제점도 주목해야" 지적도
이와 함께 최근 정부가 추진 중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자본시장통합법에 대한 새로운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미 FTA 체결로 금융서비스 시장이 개방되면, 자본시장통합법으로 자유화된 국내 금융시장은 경쟁력이 월등한 외국계 투자은행이 활개 치기에 너무 좋은 환경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증권, 선물, 자산운용, 투자자문 등 업권 간 장벽이 사라지고 어떤 금융상품도 원칙적으로 허용된다면 외국계가 국내 금융시장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가질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이는 곧 자칫 국내 투자은행 육성은 이루지 못하고 외국계 대형 투자은행에만 좋은 일 해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최근 국회에서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실 주최로 열린 '한미 FTA 금융시장 개방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토론회에서 금융경제연구소 김기준 이사장은 "금융서비스 부문 협상에서 겸업과 포괄주의 등 미국식 금융 법과 금융 시스템을 한국시장에 복제하려는 정책방향과 관련된 중요 쟁점들이 부각되지 않고 있다"며 "한국정부는 자본시장통합법과 보증보험시장 개방 등을 통해 미국 측에 핵심 쟁점이 되는 사안들을 사전에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자본시장통합법 제정을 앞두고 외국계 금융회사들이 국내 자본시장을 선점하려는 발걸음이 한층 빨라지고 있다. 지난해 7월 모건스탠리에 이어 올해 6월에는 골드만삭스가 국내 은행업 인가를 받았다. 메릴린치도 국내 은행업 진출을 준비 중이다. ING 그룹은 자산운용사 설립을 위한 예비인가를 신청했고 UBS나 JP모건 등도 자산운용사의 인수나 설립을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이들은 저출산, 고령화로 세계 6~7위권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내 연금 및 자산운용 시장을 겨냥하는 동시에 앞으로 중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목적을 갖고 한국시장으로 달려오고 있다.
아울러 자본시장통합법 자체의 미비점에 대한 지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포괄주의(Negative) 규제방식 도입이 열거주의(Positive)의 규제를 받는 기존 상품과 혼선을 빚을 우려가 있다는 점, 금융투자회사의 핵심 업무 가운데 자산운용과 보관 업무가 은행이나 보험사의 업무와 겹친다는 점, 금융투자회사에 결제기능을 부여하는 것이 금융시장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 등 자본시장통합법이 실제로 제정될 때까지 계속 논란이 될 전망이다.
자본시장통합법 제정과 대외개방 확대는 결국 오랜 논란거리인 금융산업과 산업자본의 분리 문제,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존폐 문제 등과도 연결되며 금융의 큰 틀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금융연구원 김동환 연구위원은 24일자 보고서에서 "최근 우리 금융시장은 외국자본의 국내 진출, 자본시장통합법 제정, 한미 FTA 등 주요 정책이슈의 홍수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있는 듯한 감이 있다"고 썼다. 변화는 추구하되 방향은 제대로 잡아가는 지혜가 요구된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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