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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군 미국, 친일파로 한국교육 뼈대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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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군 미국, 친일파로 한국교육 뼈대 세워” [기획] EBS 한국교육사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미리보기②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은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36년 동안 한반도를 수탈해온 일본의 패망 이후 ‘해방군’으로 상륙하는 미군을 향한 열렬한 환영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UN기와 성조기를 들고 해방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난데없이 총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많은 환영 인파 가운데 서 있던 권평근 씨가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이 발견됐다. 일제 시절 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던 그였지만 그토록 기쁜 해방의 공간에서 일본군의 총에 피살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날 사망한 사람은 권 씨 이외에도 보안대원이었던 이서구 씨가 있었다. 이들은 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사망해야 했던 것일까. 조선민중이 해방군이라 믿었던 미군은 조선 사람들보다 일본군을 더 믿는 ‘점령군’에 다름 아니었다.

***학교에 ‘해방군’이 ‘진출’하다**

1945년 9월 2일. 동경 앞바다에 정박한 미 항공모함 선상에서 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겨진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임을 인정하고 미국의 점령을 받아들이는 공식절차였다. 하지만 이날 항복문서에 서명을 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던 일왕이 아니라 시게스미 수상이었다. 일본은 세계가 지켜보는 굴욕적인 항복현장에서 자신들의 왕을 제외시킴으로써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전쟁 이후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미국이 아니었다. 바로 일본의 노동자계급과 대중에 의한 혁명이었다. 일왕은 이를 우려해 오히려 미국의 우산 밑에 들어가 지배시스템을 유지하려 했고, 미국은 이를 이용해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거머쥐려 했다.

이와 관련해 전진호 광운대 일본학과 교수는 “일본은 종전 직후 미국의 점령 아래 있으면서 당시 일본 안에 반전이라든가 평화주의에 대한 국민여론이 강하게 일자 안보는 미·일 동맹에 철저히 의존하고 그 여력으로 경제성장에 치중한다는 이른바 ‘요시다 독트린’을 선포해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미국은 일본의 성장을 물심앙면으로 도와주었지만 한반도에 대한 정책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해방되기 2년 전인 43년 6월, 미군은 이미 한반도에 대해 꽤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해 두고 있었다. <제니스 75>라는 제목의 기밀문서였다. 미군장교들은 당시 한반도를 향하는 배에서 바로 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왔다고 한다. 이 문서에는 한반도의 사회·정치·경제 등 전반에 대한 상세내용은 물론 한국인의 눈매·코 등 외모의 특징을 분석해 일본인과 구별하는 방법까지 담고 있다. 특히, 학교의 수와 학생 수·교사 수 등 교육관련 정보들은 더욱 자세히 분석돼 있었다.

여기다가 미군은 일본의 패망 4개월 전인 1945년 4월 ‘한국에 관한 육·해군 정보조사서’를 작성해 미군의 한반도 점령 때 필요한 국민들의 정서나 태도 등을 연구한 보고서까지 미리 작성해 주고 있었다.

이 보고서에는 김구, 장덕수, 김규식, 여운형 등의 민족지도자들의 특징까지 조목조목 정리해두었는가 하면 유억겸, 김성수 등 교육계 인사들의 이름 또한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미군은 주둔 전에 이미 일본 총독부 관료들을 통해 이들의 신상명세서를 작성해 두었던 것이다.

미군은 인천상륙 즉시 가장 먼저 점령한 곳은 다름 아닌 ‘학교’였다. 이에 대해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미군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체류 군주둔지 모두를 학교로 선택했다”며 “실제로 서울은 정상적인 교육시설의 반 이상을 미군이 차지해 아이들의 교육기회를 박탈하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미군정, 미국 유학한 친일파로 교육 틀 잡아**

미군이 주둔한 뒤 우리 교육정책은 미국 켄터기 주에서 2년여 정도 교사생활을 했던 ‘락카드’라는 이름의 대위에게 전권이 넘어갔다. 락카드 대위는 당시 교육부를 대신하던 학무국의 국장을 맡았고, 그를 도운 이는 미국 유학파 출신의 오천석이라는 인물이었다. 락카드 대위는 말이 통하는 오천석에 모든 것을 의지했다. 오천석은 그에게 역시 미국 유학파인 김활란, 김성수, 백낙준 등을 소개했다.

미군정은 곧이어 이들을 핵심으로 교육위원회와 교육심의회를 발족시켰다. 해방직후 교육계에는 숨죽이고 재기를 노리던 친일인사를 포함한 민족주의 세력과 좌파적 경향의 세력, 그리고 미국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새 교육세력들이 대립하고 있었지만 이를 통해 미국유학파가 교육행정을 통째로 장악하는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들이 주축이 된 교육위원회는 읍·면단위의 교장·교감 임명권까지 갖는 강력한 행정체제를 구축, 사태결의까지 했던 친일경력의 교사들을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다시 학교현장으로 불러들였다. 당시에 대해 김우종(74세, 문학평론가)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해방이 되자 상급생들이 주축이 돼 학교에서 친일파 선생들을 쫓아냈는데 1년 뒤 등교 길에 내 옆에 미군 짚차가 딱 서더니 일제시대 창씨개명된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봤더니 쫓겨났던 나카모토라는 영어선생이더군요. 이 선생이 왜 다시 학교로 오나 했더니 서울로 가서 군정청 문교행정의 고위간부가 돼가지고 나타난 거예요. 그는 선생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교육행정 지시를 엄하게 내린 뒤 뽐을 내며 돌아가더군요.”

이런 현상은 사실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1945년 봄 미군정 예비보고서에는 ‘우편관리, 교육부문들의 전문직종 하급 종사자들에 대해서는 기존의 친일 경력자를 그대로 두어도 크게 반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져 있었다.

이에 대해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그들은 일제시대 때 권력의 주인이었던 일본의 하위 파트너에 불과 했지만 미군정에서는 실제 명실상부한 권력의 주인으로서 등장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미국식 교육으로 ‘미국지향적’ 인재양성 노려**

조선 민중의 여론을 수습하기에 바빴던 미군정 학무국은 군정 수립 불과 수개월 만에 획기적인 교육정책들을 선언했다. 학제는 ‘6.3.3.4’의 미국식 학제로 했고, 초등교육의 의무교육화도 선언했다. 그러나 교육현장에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교육환경은 그대로인데 광복 후 학생 수는 늘었기 때문에 여건은 오히려 열악해졌다. 미국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장래 미국과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점령 이후 오랜 기간 재정적인 투자 없이 제도적으로 교육기회의 확장 부분에만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미군정은 수립 10개월 뒤 갑작스레 국립대학 건립안을 발표했다. 경성문과대학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10개의 학교를 통합해 하나의 종합대학을 만들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국립대학건립안’은 곧 ‘국대안 파동’이라는 유혈사태를 낳았다. 대학 통합을 반대하던, 특히 죄파성향의 교수와 학생들이 암살되거나 학교에서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미군정은 국대안 파동이 가라앉은 47년 6월 국립대학, 다시 말해 지금의 서울대학을 세워 교육원조금 대부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특정대학의 입시 경쟁률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그 외의 교육에서는 학부모의 부담을 가중시켜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찬조금 문제가 발생했다.

미군정이 이렇듯 편향된 투자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서울대학을 다녔던 이들은 “한국교육을 미국화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유학파들이 미국으로부터 가져온 이론들은 가감 없이 그대로 우리 교육현장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존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이론, 경험주의계의 프래그머티즘 등 이었다. 얼마 전까지 일제교육을 받던 이들에게 주입된 미국식 교육은 그렇게 ‘껍데기 민주주의’에 불과했다.

그러나 교육현장과 맞지 않는 새교육 이론의 행진은 멈추질 않았다. 새교육의 기치 아래 지금의 한국교총 전신인 조선교육연합회가 창설됐고, 미국으로부터 객관식 문제, 사지선다형 시험도 이때 처음으로 도입됐다.

미국의 일방적 종속 원조방식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한국전쟁 직후인 50년대 중반, 미국은 전후 냉전체제에서 인문교육의 진흥이 소비적이라고 판단해 실업계 고교의 육성에 집중했고 문교부는 별 근거도 없이 인문계와 실업계 고교의 비율을 3대 7로 만들어 놓았다. 미국의 교육원조는 분단과 경제난 극복을 위한 주체적 인간의 형성보다는 미국지향적인 엘리트 양성이란 결과를 낳았고, 또 그렇게 키워진 엘리트 세력은 반공·친미체제의 정착이라는 미국의 목적에 충실히 기여했다.

***미국식 주입 거부한 독일사례 돌아볼 때**

미국은 전후 독일에서도 예외 없이 자국의 이념과 이론들을 독일 교육계에 주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독일은 미국식 이념의 이식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선택한 길을 걸어왔다. 학제는 미국식이 도입됐지만 내용만은 전통 교육방식을 고집했던 것이다. 60년 전 독일에서도 교육계에서 나치부역자들을 처리하는 것은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단 이들을 전원 해고했다가 참회 뒤 포용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민주주의를 구축해 왔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교육이론을 받아들였던 일본은 마찬가지로 창의력·학력 저하 등의 부작용을 겪었다.

일제식민지와 미군정,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졌던 우리 현대사. 그 역사의 흔적은 아직도 분단의 멍에로 남아 있다. 친일 경력을 덮기 위해 미군정에 투항했던 몇몇 교육인사들에 의해 이 땅의 교육정책을 왜곡됐고, 그 결과는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로 남아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진실을 은폐한 것이었다. 그래서 무려 60년 동안이나 그 아성에 돌을 던질 수 없게 만든 바로 그것이었다.

***EBS 광복60주년 창사5주년 특별기획 5부작 한국교육사 다큐멘터리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제2부 ‘학교에 해방군이 진출하다?’는 19일 저녁 10시 EBS 채널을 통해 50분 동안 방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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