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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눈에 안 보이는 유령이다, 지금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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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들은 눈에 안 보이는 유령이다, 지금 나처럼…" [인터뷰]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 단식 중인 김진숙
입술이 거칠었다. 무릎을 마주대고 앉을 수밖에 없는 좁은 텐트 안. 마른 그의 목소리는 자주 끊겼다. 텐트 문을 열면 한 발짝 뒤에 뻥 뚫려 있는 왕복 6차선 도로, 쌩쌩 달리는 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간이 외려 낯설만큼 작은 천막은 요란한 세상의 한 복판에 있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처녀 용접공'으로 옛 대한조선공사, 지금의 한진중공업에 들어가 민주노조운동을 하며 보낸 "참 사는 것 같았던" 시절은 짧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랜 24년 간을 '해고자'로 살았던 김진숙(51)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그가 지난 13일부터 밥을 굶고 있다.

오랫동안 유일한 꿈이었던 '복직'을 위해서가 아니다. "24년을 기다린 복직의 꿈이 이뤄지려던 찰나"에 나온 한진중공업의 1000여 명 정리해고 때문이다.

"여기, 이곳에 앉아서야 비로소 이 큰 세상을 민낯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는 그를 지난 21일 부산에서 만났다. 단식 9일째였다.

"10만 원 더 받기 위해 사라지는 아저씨들, 힘도 없는 내가 어떻게…"

▲ 김진숙(51)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그가 지난 13일부터 밥을 굶고 있다.ⓒ매일노동뉴스
곡기를 끊고 이미 열흘 가까이 흐른 시간, 그는 "생각보다 괜찮다"고 했다. "내가 징역살 때 징벌방에서 단식 이틀 만에 몰래 죽을 먹었던 사람인데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그러지도 못하겠는데, 그때보다 견딜 만 하다"며 외려 웃었다. 혹 몸보다는 마음이 더 무겁고 아픈 탓에, 몸의 고통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지난 13일 단식을 시작하면서 김진숙 지도위원은 "이것 밖에 할 게 없어 죄송하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여러 차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고 말했다. 1000명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김 지도위원은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미 1000명의 하청 노동자가 사라졌는데 확인조차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그 사실을 출근시위를 하면서 깨달았다. 지난해 11월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그는 명예회복과 부당해고 결정을 받았다. 신청한 지 10년, 해고된 지 24년 만에 나온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난 12월부터 아침 7시면 공장 정문 옆에 피켓을 들고 섰다.

"어제 보이던 아저씨가 오늘은 안 보인다. 사실 정규직 1000명을 자르겠다는데, 4000명의 비정규직은 다 잘린다고 봐야 된다. 너무 거대한 일이어서 아무도 입조차 떼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비정규직은 눈에 안 보이는 유령이다, 지금의 나처럼…."

실제 영도조선소 안팎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한진중공업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가 대체 몇 명인지 그 규모조차 정확히 파악하는 이가 없었다. 조선소의 하청 노동자가 원체 한진중공업에서, 현대미포조선으로, 삼성중공업으로 떠돌아다니며 일하는 이들이다 보니, '해고'에 대한 감각도 별로 없다고 김 지도위원은 말했다. "조선소 사내하청에게 해고는 일상"인 것이다.

"여기서 잘린다고 비정규직이 좌절하고 그러지도 않는다. 체념한 것이다. 이들을 조직화해서 싸우려면 스스로의 분노가 있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해도, 안 되니까 자기 체념만 쌓여간다."

"죽거나 병신돼 가며 평생을 조선소에서 일했던" 이들이 자신이 하루아침에 내쫓기는 것에 대해 분노하기 보다는, '무엇이 더 나을까' 계산기를 두드려 보는 것이 현실이다. 김 지도위원이 출근시위를 하며 만난 한 늙은 노동자의 얘기는 단적인 예였다. 나이 60이 넘어, '회사에서 나가라는데 사표 쓰고 나가서 퇴직금을 받는 게 나을까, 버티다 잘려서 실업수당을 챙기는 게 나을까'를 며칠 동안 고민하던 그 노동자는 끝내 스스로 사표를 썼다. 이유는 간단했다.

"계산해보니까 실업수당보다 퇴직금이 10만 원이 더 많더라는 거다. 사나흘을 아침마다 같은 질문을 하던 그 아저씨는 그래서 사표를 썼다. '잘릴 때 잘리더라도 그동안 쌓인 거 큰소리라도 한 번 쳐보게 사표 쓰지 마시라'고 할 때, '알겠다'면서 주먹까지 쥐고 간 할아버지가…."

"경영상 해고? 6년간 절치부심하던 회사의 노조 죽이기다"

▲한진중공업은 지난 2003년에도 정리해고를 둘러싸고 극단적인 갈등을 겼었다. ⓒ프레시안
한진중공업은 지난 2003년에도 정리해고를 둘러싸고 극단적인 갈등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김주익 지회장이 35m 크레인 위에서 129일 간 농성을 하다 스스로 목을 맸고, 뒤이어 곽재규 씨가 도크로 뛰어내려 사망했다. 산재사고가 워낙 많은 조선소라지만, 순식간에 두 명의 동료를 잃었던 기억은 김진숙 지도위원에게도, 한진중공업 노동자에게도 여전히 아픔이다.

"2003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의 눈가는 순식간에 젖었다.

"그 일을 겪고 회사가 불안할 정도로 잘해줬다. 김진숙 복직만 빼고는 다 해줬다. 공장 앞에 열사들의 추모 공원까지 알아서 만들어줬다. 그 자리에 있던 식당을 웃돈 얹어 내보내고. 5층 짜리 노조 건물도 지어줬다. 30억을 들여 식당도 만들어줬다. 작업복도 새로 줬다. 조합원들이 '불안하게 이 사람들이 왜 이러냐'고 할 정도였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1000여 명의 구조조정이 경영조건 때문은 절대 아니"라고 얘기하는 이유였다. 김 지도위원은 "사실 조선업은 원래 10년이 호황이면 다음 10년은 불황"이라고 했다. 배의 수명이 10년이기 때문이다. 그는 "목적은 노조"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는 "지난 6년 간 노조 때문에 절치부심했던 회사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당장 명단을 발표하진 않을 것이다. 진을 빼겠지. 현장에서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게 만들고 진을 다 뺀 다음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정리해고자 명단이 나올 것이다. 아니면 어차피 정년이 1~2년 밖에 안 남은 사람들한테 희망퇴직 받아서 정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면 현장의 구조조정은 대세가 될 것이다."

그를 만나기 하루 전날, 한진중공업 노사는 정식 교섭도 아닌 노사 대화를 통해 "성실한 대화가 이뤄지는 동안은 정리해고자 명단을 발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일단 26일 발표는 연기된 셈이다. 그날 밤, 현장 노동자들이 김 지도위원의 천막을 찾아왔다고 했다.

"지회장이 '명단 발표는 미뤄졌다'고 하니까, '이제 이겼으니 단식을 풀라'고 하려고 술 먹고 찾아온 거다. 한 친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자기는 아침밥을 굶어본 적이 없는데 내가 단식을 시작한 지 3일 째부터 아침을 못 먹고 있다고 했다. '누나가 그렇게 있는데 밥이 안 넘어가더라'면서. 그런데, 아침을 안 먹고 일 하려니까 자기가 너무 힘들단다. '내가 힘들어 죽겠으니, 누나도 단식 그만하라'고 엎드려 울더라."

그런데도 그가 고개를 저은 이유는 회사의 진짜 목적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명단 나오면 사실 끝"이라고 했다. 2003년 경험이 알려준 것이었다.

"그해 600명 정리해고자 명단이 발표되자 현장이 좍 갈라졌다. 3분의 1이 잘리게 됐는데, 나머지 3분의 2가 요지부동이다. 아무리 꽹과리를 치고 집회 나오라고 현장을 돌아도 고작 100명밖에 안 모였다. 곽재규가 그래서 죽었지만…."

35m 크레인 위에서 김주익 지회장이 129일 동안 농성을 하는 동안, 회사도 노조를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산 자'들도 도망다니기 바빴다. 곽재규도 '산 자'였다. 김주익이 결국 하늘에서 목을 맨 다음에야, 곽재규는 파업에 나왔다.

그리고 '내가 김주익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도크 아래로 몸을 던졌다. 2년을 끌었던 싸움은 그러고 나서야 끝이 났다. "35m 크레인에서 김주익의 관이 내려오고, 10m 아래 도크에서 곽재규의 관이 올라오는 기막힌 풍경"과 함께.

"노동에서 소외됐던 노동자,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돼 버렸다"

▲ 그는 "여기 앉아서 보니까 노동자들이 고립돼 있다"고 했다. "옛날에는 노동자가 노동의 과정에서 소외됐었다지만, 요즘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돼 버렸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김진숙 지도위원은 "단식 6일째가 되던 날 밤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주익과 박종태는 우리가, 내가 죽였구나'라는. 지난해 여름 대한통운 택배기사 73명의 해고로 촉발된 '외로웠던' 싸움은 박종태가 죽고 나서야 세상의 관심을 끌었다. 지회장이었던 박종태는 체포영장이 떨어졌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봄 날 고작 40여 명이 대전 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집회를 하는 모습을 근처 야산에서 지켜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체포영장이 떨어졌고, 싸우는 숫자는 늘지도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고…. '여보 너무 무섭다'고 쓰고 목을 맸다. 그 심정을 내가 다는 모르지만, 여기 앉아 있으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노동운동 한답시고 다니면서도, 쌍용차나 어디나 다 '남의 일'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죄 받는구나 싶은 생각이 다 든다, 요즘…."

그의 목소리는 다시 젖었다.

그는 "여기 앉아서 보니까 노동자들이 고립돼 있다"고 했다. "옛날에는 노동자가 노동의 과정에서 소외됐었다지만, 요즘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돼 버렸다"는 것이다.

마산에서, 진해에서 아침 7시까지 공장에 오려면 새벽 5~6시 쯤 통근버스를 타야한다. 불꽃이 튀고 철근이 떠다니는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 다시 통근버스를 타고 집에 간다. 예전엔 다 영도에 살았던 조선소 노동자들은 자꾸만 부산 외각으로, 인근의 시로 밀려났다. 사는 곳이 다 다르니 "공유할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사라졌다." 당연히 "삶도 서로 공유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삶이 철저히 쪼개져 있다. 신문 볼 틈도 없다. 시야가 줄어든다. 자기 집과 공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용산에서 사람 6명이 죽었다는 건 안다. 그런데 그 분노가 집단화되고, 다 같이 달려가질 않는 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이 확장되질 못하고 자기 앞만 본다. 용산 참사가 타결됐다고 하면, '보상금이 얼마인지, 한 집에 얼마씩 돌아가는지'만 본다. 액수가 많으면 이긴 거고, 적으면 진 게 된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민주노조운동이 24년이라지만, 허송세월했다"고 토로하는 이유다.

"고인 채 썩어간 지난 10년, 우리만 그걸 몰랐다"

그는 인터뷰 가운데 오랜 시간에 걸쳐 부산의 노보텔 노동조합에 대해 설명했다. 거의 모든 조합원들이 노래패, 산악회, 봉사활동, 책읽기 등 소모임에 가입돼 있는 노동조합. 자기 사업장 해고자도 아닌데, 매일 아침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출근시위에 함께 하러 와서 "조용히 서 있다 조용히 사라진다"는 조합원들.

"노동조합 본연의 목적에 가장 충실한 노조다. 조합원들 눈이 정말 반짝반짝 거린다. 거기서는 되는데, 왜 다른 곳에서는 그게 안 될까."

그는 "지난 10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고여 있었다"고 했다. "고인 것은 썩는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것을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우리가 지금 썩은 물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위기의 본질"이었다.

"언제 적이 강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노무현 정권은 우리를 너무 잘 알아서, 김대중 정권은 운동권들이 다 정부로 들어가서 전선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위기였다. 진짜 위기는 정작 우리다. 아무리 연대를 외쳐도, 암에 걸린 다른 사람의 아픔보다 내 손가락에 박힌 작은 가시가 더 큰 것이 현실이다. 이 자리에 앉아서 나는 지금 그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는 "지역 중심"을 강조했다. 현재의 흐름으로 굳어버린 업종별 산별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산별의 정신은 연대다. 연대를 하려면 가까워야 한다. 한진중공업에서 일이 터졌다면 부산일보노조도 달려오고, 기독병원노조도 달려오고, 노보텔노조도 와야 한다. 30분 안에 달려갈 수 있어야 연대를 하지, 서울에서 부산까지 어떻게 오나. 그런 집회? 아무리 절박해도 한 번 이상은 못 한다."

그는 "전노협이 숫자는 지금의 10분의 1도 안 됐지만 지역 중심이었기에 더 강할 수 있었다"고 했다. 같은 산별노조의 조합원이 '정리해고' 때문에 싸우고 있어 멀리서 한 번 찾아와도, 대회사, 투쟁사, 결의문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집회 내내 땅만 쳐다보고 있다가 돌아가는 지금의 민주노총의 연대. 당연히 노점상, 철거민의 아픔까지 같이 하긴 벅차다.

"내 공장 안의 비정규직과의 연대도 안 되는데, 노점상과 연대를? 어휴. 1년 내내 교육해도 안 된다."

"민들레가 죽어가는 땅에서는 어떤 나무도 살 수 없다"

▲ 비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날릴 것 같은 작은 천막 안에서 그의 마음은 자꾸 더 무거워진다고 했다.ⓒ매일노동뉴스
비바람이 부니 금방이라도 날릴 것 같이 들썩이는 작은 천막 안에서 그의 마음은 자꾸 더 무거워진다고 했다. 정규직 정리해고야, 어찌 어찌 하면 해결될지도 모른다지만, 이미 소리 소문 없이 잘려 나가고 있는 비정규직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2007년 낸 책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 펴냄)에서 그는 "꽁꽁 언 땅을 저 혼자 힘으로 헤집고 나와야 하는 민들레에게 너희도 시험 쳐서 소나무가 되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숨 쉬고 씨앗 흩날릴 영토와 햇볕을 나눠줘야 한다"고 했다.

그가 24년 동안 "언제든 훌훌 털고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 흔한 민주노총의 '장' 자리 하나 맡지 않고 복직을 기다린 이유는 어쩌면 그 민들레들에게 가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그의 단식 역시 아픔에 무감각해 진 세상에게 "민들레가 죽어가는 땅에서는 어떤 나무도 살 수 없다"는 진실을 알려주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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