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철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가 다양한 논란을 낳고 있다. 주요 언론은 삼성 관련 칼럼 게재를 거부하는가 하면, 심지어 김 변호사의 책 광고까지 거부했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삼성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1등 기업 삼성은 왜 공포의 대상이 됐을까. <프레시안>은 독자들로부터 삼성에 관한 다양한 생각을 듣는 기획을 마련했다. <삼성을 생각한다> 독후감을 포함해, 삼성과 이건희 전 회장이 우리 사회에 남긴 숙제에 관한 내용이라면 누구의 글이건 소개할 계획이다.독자들이 삼성을 생각하는 글은, 이 메일 주소[email protected]로 보내면 된다. <편집자> |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나는 다시 아파 눕게 됐다. 3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불가피하게 정치적 활동을 그만두어야 했고, 지금은 책이나 보고 가끔 글이나 쓰며 산다. 지금도 정치투쟁의 일선에서 고군분투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은 거대한 세력과 목숨 걸고 싸우는데, 나는 무얼 하는 것인가? 그래서 황급히 <프레시안>에 글을 쓴 것이다.
권순욱 씨의 반론은 반갑기도 하지만 솔직히 몹시 당혹스럽다. 애초 논쟁을 의식하고 쓴 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를 피하고 싶지는않다. 지식인으로서 정당하지 못한 문필을 휘둘렀다면 당연 바지를 걷어 올리고 회초리를 맞아야지.
"고작 문틈으로 보이는 조그만 꼬리 하나를 보고서는 자기 마음대로 어떤 동물인지 장담해서는 안된다. 지성인의 자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확한 논거와 사실, 증거를 소중하게 여겨야한다." (권순욱의 반박에서)
의도확대해석의 오류를 저지르면 안 된다는 거다. 타당한 논거와 합리적 논리를 앞세워 주장을 전개해야지 어거지를 피우면 어떡하나? 권순욱 씨의 충고는 지당하다.
권순욱 씨가 나의 글에 제기한 문제점은 세 가지다. 첫 번째 문제제기는 동북아물류중심국가론의 시원을 둘러싼 대목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등장한 동북아물류중심국가론, 나는 그 입론의 시원이 삼성경제연구소라고 알고 있었는데, 권순욱 씨의 반론에 의하면 동북아물류중심국가론의 시원은 김영삼 정부란다. 설령 김영삼 정부가 아니라 하더라도 삼성경제연구소의 창안품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이 권순욱 씨가 제기한 이론의 골자였다.
나는 권순욱 씨의 지적을 고맙게 수용한다. 내가 몰랐던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바지까지 걷어 올리며 회초리를 맞아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권순욱 씨가 강조하는 '사실의 인과관계'만큼이나, '논리의 전개' 역시 소중하다. 권순욱 씨는 남의 글을 읽으면서 좀 더 치밀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만일 내가 노교수의 책상 위에서 목격한 삼성경제연구소 발 초청장 한 장을 가지고 '삼성과 대학의 총체적 유착'을 포착한 것처럼 '떠들고 다녔다면', 권순욱 씨의 반박은 정당하다. 만일 내가 대통령의 취임사에 섞여 나오는 단어 한 개를 증거로 '청와대와 삼성경제연구소의 내밀한 유착'을 장담한다며 '공언하고 다녔다면', 권순욱 씨의 충고는 지당하다.
나는 '삼성이 대한민국을 체계적으로 말아 먹고 있음'을 직감했지만, 섣불리 공언할 수 없었다. 노무현과 그의 사람들이 삼성에 의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음을 입증할 '증거'가 내게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상의 사적인 견해를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고, 글로 공개하지도 않았다.
다음으로 권순욱 씨가 나에게 요구한 것은 노무현 정권과 삼성의 특수관계에 관한 사실증명이다. 나는 오랫동안 노무현과 이건희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의아해왔다. 그러던 중,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이학수라는 연결고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지난 글에서 썼다. 그런데 권순욱씨는 나에게 노무현 정권과 이학수의 특수관계를 사실로 증명하라고 나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학수로부터 불법적 거래를 한 것이 있으면 그 증거를 대라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 역시 내겐 무척 곤혹스럽다. 나는 검사도, 기자도 아니다. 내가 거주하는 곳은 시골이어서 구중궁궐에서 흘러나오는 루머하고도 거리가 먼 곳이다. 어떡하란 말이냐? 차제에 관련된 분들을 만나 몇가지 들은 이야기가 있지만, 굳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예를 손상하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권순욱 씨가 요구한 사실증거의 구체성에는 미흡해도 양해해주길 바란다.
나는 참여정부와 삼성의 특수관계에 대해 그 사실 증거를 요구하는 권순욱 씨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다.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상식을 권순욱은 모르고 있단 말인가? 이미 대통령 당신의 입으로 '이회창의 1/10'은 받았다고 자백하지 않았던가?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어 보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들이 즐비한데, 굳이 '이학수와 참여정부'의 특수관계를 입증하라니?
"대법관에게 150만 원짜리 굴비 선물세트를 보낸 일도 있다. 당시 이학수는 내가 직접 전달하라고 했다. 그게 예의라는 게다. 그러나 나는 운전 기사를 대신 보냈다. 속으로는 '대법관이 설마 삼성이 보낸 굴비를 받겠느냐'라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기사에게 들으니, 굴비 잘 먹겠다고 감사 인사를 하면서 받았다고 한다."(<삼성을 생각한다> 중 172쪽)
"그래서 장 교수가 "변칙 증여"라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1.2.3심 법원은 삼성의 손을 들어왔다. 당시 2심 재판을 앞두고 이학수는 내게 판사한테 30억 원쯤 주면 어떻게느냐고 말했다. 하도 터무니없는 제안이어서, 나는 거부했다."(<삼성을 생각한다> 중 191쪽)
사법부는 행정부가 아니라고 또 권순욱은 내게 반박할 것이다. 하여 나는 권순욱 씨의 까다로운 입맛에 딱 들어맞을 '사실'만 제기하겠다. 국세청과 국정원에 관련된 일이다. 김용철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2007년 11월 12일 사제단의 3차 기자회견이 열렸다....양심고백 뒤, 청와대 관계자가 내게 국세청장 후보자 세 명의 명단을 제시하며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삼성이 국세청을 상대로 한 로비에 대해서는 검찰에 대한 것만큼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당시 후보자 세 명이 모두 낯익은 이름이었다. 모두 삼성이 관리해 온 국세청 간부들이었다."(<삼성을 생각한다> 중 44쪽)
"안기부 'X파일'이 논란이 될 때는 안기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에서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자리에 아예 삼성 임원이 기용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5년 7월 이언오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를 국정원 최고정보책임자로 임명했다. 삼성과 노무현 정부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삼성을 생각한다> 중 61쪽)
다음 세 번째 문제제기는 이렇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표현 속에 깃든 노무현 대통령의 진의를 내가 왜곡하여 이해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시장은 자본 일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속좁은 황광우는 자본 일반을 굳이 특수 자본 삼성으로 편협하게 해석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이나, 권력이 자본으로 넘어갔다는 말이나, 권력이 삼성에게 넘어갔다는 말이나 다 같은 뜻이다. 내게는 '50보 100보'다. 초록이 동색인데 왜 이게 시비거리가 되는 것인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노 전 대통령이 말한 것은 대한민국의 객관적 현실을 국민들에게 고지한 것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며 권순욱 씨는 중계하고 있다. 사실 명제이니 당위 명제로 확대해석하지 말라는 거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나는 대통령의 말을 핑계라고 본다.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발언의 시점에 따라 다 다르다. 정치학자가 "권력의 시장 이동설"을 제기했다면 나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력이 별건가? 재벌들의 공동 업무를 뒤치다꺼리하는 위원회지?
또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운동 중에 이런 학설을 공언하였다면 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재벌들에게 넘어간 주권을 탈환하겠다고?
하지만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꿈을 이루기 위하여 집권에 성공한 대통령이 취임 이후의 시점에서 권력의 시장이동설을 제기하는 것은 다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주권(主權)의 큰 칼을 뽑아 보지도 않고, "이 칼은 너무 무거워요. 나의 힘으론 뽑을 수 없어요. 이 칼을 뽑을 수 있는 검객은 시장에 있어요"라고 칼 앞에서 벌벌 떨고 있으면, 칼을 뽑아 시대의 부패를 썰어보라고 칼을 맡겨준 국민은 어쩌란 말이냐? 내가 보기에 참여정부가 떠든 권력이동설은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의 변명과 아무 다를 것이 없었다.
"학생의 노력에 의해 성적이 좌우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성적은 부모의 재산에 의해 결정된다."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왜 시험을 보는 것이냐? 시험을 거부해야지. 고려대를 거부한 예슬이처럼 말이야.
황광우 작가의 글과 그 반론 ☞노무현 대통령 취임사의 비밀은? ☞"황광우 씨의 글을 반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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