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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진시황, 소련은 흉노…중국의 미래는?"
[해방일기·끝] 21세기에도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 ③
사람 일이라는 게 어느 만큼은 사람 뜻에도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100여 년 전 망국 때, 68년 전 해방 때는 우리 선조, 선배들이 좋은 뜻을 많이 일으켜도 외세의 압력이 너무 강해서 좋은 결실을 바로 맺지 못했습니다. 그때보다는 우리 사회의 주체적 노력이 성과를 바라
"우리는 아직 '근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해방일기] 21세기에도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 ②
100년 전의 망국이 우리 민족 사회에 실제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한 번 따져보죠. 당시 사람들에게는 조선이라는 왕조의 멸망이 제일 큰일로 보였겠죠. 왕조가 수백 년 동안 국민 생활의 모든 면에 작용해온 역할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합방 당시 제일 뚜
지금, 누가 민족주의를 쓰레기통에 처박나?
[해방일기] 21세기에도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 ①
오늘날 세계 정세의 변화 추세에 비추어볼 때 근대 내셔널리즘의 경쟁적-독선적 세계관을 벗어날 필요는 분명합니다. 이 측면이 1970년대 이후 많이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근대적 개인주의를 넘어설 필요가 있으며, 민족주의와 같은 '네트워크 속의
1945+68, 대한민국은 여전히 식민지다!
[해방일기] 1948년 8월 15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지금의 민족주의자도 식민지시대와는 다른 민족주의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민족주의' 얘기를 꺼낸 거죠. 제국주의 시대 민족주의는 경쟁과 대결의 민족주의였고, 조선의 민족주의는 식민지 상태의 피해 의식 때문에 그런 경향이 특히 심했습니다. 65
이승만 지지자도 "이건 너무하다!"
[해방일기] 1948년 8월 14일
이승만 정부의 구성 내용에 대한 당시 언론의 비평 중 가장 치밀한 것이 7월 29일부터 8월 10일 사이에 우승규(1903~1985년)가 8회에 걸쳐 <경향신문>에 실은 논설이다. 7월 29일과 30일 "국무총리 임명과 조각에 붙여"란 부제를 붙인 "이 대통령에게 역이(逆耳)의 일
친일파 처단의 때, 아직도 이르다는 이승만
[해방일기] 1945년 8월 12일
8월 4일 이승만이 비운 국회의장 자리에 신익희가, 신익희가 비운 부의장 자리에 김약수가 선출되었다. 8월 5일에는 대법원장 김병로의 인준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7월 20일 정-부통령 선거와 8월 2일 이범석 국무총리 인준안의 통과에 이어 새 정부 3부의 수뇌부가 모두 짜
미군정이 물려준 최대의 유산, 경찰
[해방일기] 1948년 8월 9일
8월 9일 김동성 공보처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조치 두 가지를 발표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8월 5일에 조직되었다는 사실을 8월 6일 남조선 주둔 미국 사령관과 유엔 조선임시위원단에 정식 통고하였다는 것이다. 하지 중장에게는 8월 15일을 기하여 행정권 이양을 개시할 것을
혼란과 분열에 빠져드는 통일 건국 추진 세력
[해방일기] 1948년 8월 7일
헌법이 반포되고 대한민국 정부 조직 작업이 진행되는 한편에서 통일 건국 추진 세력도 통일독립촉진회(통촉) 조직을 진행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4월의 평양 회담을 앞두고 결성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통협)의 확대-강화를 시도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드러난 문제는
8월 4일 저녁, 부통령은 어디에 있었나?
[해방일기] 1948년 8월 5일
안호상, 전진한처럼 중량감이 떨어지거나 검증 안 된 느낌이 드는 인물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었지만, "말도 안 된다!" 하는 손가락질을 모은 것은 장택상, 윤치영, 임영신의 세 사람이었다. 장택상은 최근 터진 고문 치사 사건까지, 지난 3년 동안 너무나 악명을 떨친 사람이
이승만 요지경…경찰은 외교부, 외교관은 내무부!
[해방일기] 1948년 8월 2일
8월 2일 오전 국회 제37차 본회의에서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이 인준되었다. 재석 197인 중 찬성 110표, 반대 84표였다. 국회가 열리기 전에 이미 예상되고 있던 결과였다. "총리 문제 명일로 최후 결정 단계-무조건 승인할 기세-의원 간 양보 태도 농후" 명2일 국회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