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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남측 인사에게 '전쟁 안 하겠다'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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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남측 인사에게 '전쟁 안 하겠다' 다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해방과 분단, 여덟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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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고 제2차 미소공위도 성과 없이 막을 내리면서 한반도는 급격히 분단으로 치달았다. 분단을 막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1948년 남북 협상이 꼽히는데, 이에 대해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서중석 : 남북 협상처럼 설왕설래 논란이 많은 부분도 없다. 남북 협상에 대해 극우 세력이 아주 심하게 중상모략을 하는 면이 많다. (그들로선) 정말 불쾌감을 금할 수 없어서 그랬겠지만, 난 저들이 남북 협상에 대해 제대로 된 사료를 가지고 쓴 것을 본 적이 없다. (저들이 쓴 걸) 많이 봤는데, 정치적 선전으로 비난하는 것 일색이다. 자료도 너무 구태의연한 옛날 것을 쓰고 있다. 새 자료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극우 반공 세력은 물론 진보 세력에서도 (1948년) 연석회의와 남북 협상을 제대로 구별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거다.


프레시안 : 연석회의와 남북 협상, 어떻게 다른가.

서중석 : 1948년 4월에 두 개의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하나는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이름도 길다. 이 연석회의가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렸다. 그다음에 회의장을 바꿔가며 26∼30일 사이에 남북 협상이 진행됐다. 4김(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회담을 중심으로 열렸는데, 어떤 때는 양김(김규식, 김일성) 회담도 열렸다. 김규식은 굉장히 철저한 사람이었고, 저쪽 실력자는 김일성 아니었나. (이것 말고) 15인 회의(15인지도자협의회)도 있었는데 그건 분위기 잡는 것이었고, 실질적으로 제일 중요한 건 그 자리(4김, 양김 회담)에서 결정된 걸로 보고 있다.

연석회의와 남북 협상은 전혀 다른 회의다. 연석회의는 북쪽 구상대로 밀고 나간 거다. 참여한 정당·사회단체가 아주 많고 명단만 보면 대단한 걸로 보이지만, 북한에서 계획한 대로 이끌고 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북한에서 연석회의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거다. (이와 달리) 남북 협상에 대해서는 북한에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남북 협상이란 말 자체가 북한엔 없는 것 같더라. 상세하게 써놓은 책에서도 본 기억이 없다.


분단을 막기 위한 최후의 노력, 남북 협상…연석회의와 전혀 다르다

프레시안 : 남북 협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열렸나.

서중석 : 남북 협상은 북한이 원해서 연 게 아니다. 연석회의에 그렇게 나오라고 했는데도, 김구는 연석회의가 열리는 19일에야 서울을 떠났다. (연석회의에는) 22일에 잠깐 나와서 짤막한 인사말을 했는데, 남한이나 북한이나 단독 선거를 해선 안 된다는 취지였다. 오로지 우리는 통일 정부를 세우는 것에만 진력해야 한다고 했다. 평소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한 것이다. 김규식은 출발도 21일에야 했다. '연석회의 같은 건 용납 안 한다'고 확실하게 한 것이다. (연석회의에) 일체 참석하지 않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2월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 달여가 지나도록 답신은 오지 않았다. 그 사이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 총선거안이 통과되고 미군정은 5월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남한 단독 선거 일정이 발표된 후, 북한은 4월에 평양에서 연석회의를 열자는 제안을 했다. 그와 별도로 김구와 김규식에게는 작은 범위의 지도자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열자고 제안했다. 김구와 김규식으로선 북한 측의 의도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편집자>)

그러고는 김규식과 김구는 '통일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 아니냐. 김두봉하고 김일성 나와라', 이렇게 했다. 북한에서도 이걸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남쪽에서 온 제일 중요한 두 사람 아닌가. 북한에서도 그렇게 선전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의 주장을 묵살할 수 없었던 거다. 더구나 김규식은 연석회의에 일체 안 나오지 않았나. 그래서 4김 회담이 열린 거다. 당시 분위기와 관련해 몇 가지 언급할 게 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남북 협상은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한 최후의 노력이다.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한국인들은 수천 년간 같은 지역에 살면서 하나의 정부를 세웠다. 그것도 중앙 집권적으로 사회와 역사를 발전시켜온 나라다. 이런 나라가 전 세계에 없다. 생각해봐라. 일본도 우리하고 다르다. (그런 역사로 인해 한국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단일성이 강하게 된 거다. 그래서 배타적 성격도 강하지만, 그만큼 '한반도엔 하나의 국가만 있어야 한다', 이게 신념처럼 된 거다. 태생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일종의 즉자적인 것이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필요 없는 식이었다. 일제도 남북을 하나의 지역으로 통치하지 않았나. 분단시키지 않았다. '평양 사람과 서울 사람이 갈라져야 한다. 다른 국가에 살면서 서로 싸워야 한다', 이건 한국인들에겐 너무나 잘못된 것이었다.

예컨대 1960년대에 박정희 정부가 조사했을 때도 90퍼센트 이상이 반드시 통일돼야 한다고 답했다. (5.16쿠데타 후 통일 운동을 탄압하고) 통일 문제를 언급도 못하게 한 박정희 정권에서도 그랬다. 1980년대까지도 80퍼센트 이상이 통일돼야 한다고 했다. 그 뒤로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하여튼 그렇게까지 통일을 열망했다.

더군다나 1945년, 1946년에는 일부 지도자만 '이게 어떻게 되는 건가' 걱정했지, 한국인 대다수가 '분단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건 어떤 사료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민중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안 나온다. 그런데 1948년 들어, 뭔가 큰일 났다는 생각을 (많이들) 하게 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야말로 이 분단을 막아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움직임도 커졌다). 또 1948년에 가면 '분단되면 전쟁이 일어날 거다', 이 이야기가 남북 대표가 만나야 한다는 주장마다 빠지지 않고 나온다. 외세를 등에 업은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 국제전이자 내전인 그런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 분단을 막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경제적으로도 하나의 국가를 이뤄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때 남한은 경제적으로 참 나빴고 북한은 경제적으로 잘돼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나. 그래서도 그런 주장이 나오고 그랬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남북 협상 공동 성명 제2항 '전쟁은 안 된다'

프레시안 : 1948년 설(2월 10일)을 맞아 김구가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울면서 고함)'은 지금도 회자된다.

서중석 : 김구는 '분단이 된다는 건 우리 몸을 두 동강 내는 것과 똑같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사실 우리가 어렸을 때뿐만 아니라 1960~1970년대에도 이런 표현을 많이 썼다. 전 세계에서 이런 표현을 쓰는 건 한국밖에 없었을 거다. 분단이 어떻게 신체를 두 동강 내는 것과 같은 것이겠나. 그런데도 한국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만큼 '분단은 안 된다. 하나의 몸, 통일 국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김구는 그러면서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했다. 죽을지언정 어떻게 분단되는 걸 눈뜨고 볼 수 있느냐, 이런 식으로 얘기했을 때 한국인들 누구나 정말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정서, 분위기가 있었다. 그게 옳은가 그른가는, 나는 그건 떠난 문제인 것 같다. 그런 걸 이해는 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당시 '분단을 막기 위해 두 분 선생이 나가시라. 협상을 해라', 이렇게 문화인까지 성명서를 내고 그랬다. '이것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당위와 부당위,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의 문제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 이건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논리를 폈다. 그래서 평생을 독립 운동에 몸담았던 백범(김구)과 우사(김규식), 이 두 분이 중심이 돼서 남북 협상을 하게 된다.

프레시안 :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당위와 부당위의 문제라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서중석 : 백범도 그렇지만 특히 우사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굉장히 많이 생각했다. 미군정 자료에 많이 나온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오고 100번 실패하더라도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한 노력은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남한과 북한의 극단 세력한테 이용당해선 안 된다는 얘기를 강하게 한다. 그래서 김규식을 주석으로 한 민족자주연맹에서는 북한 측에서 '두 분 선생 다 오시라'고 하면서 열렬히 환영한다고 했을 때 조건을 내세운다. '민주적인 정부를 세운다' 등 5개 조건이었는데, 북한에서 다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하여튼 김규식은 '북한에 가서도 절대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 방안을 고심했다). 김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연석회의에 대해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이다.

프레시안 : 남북 협상 결과는 어땠나. 북한에 이용만 당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4월 30일에 공동 성명이 나온다. 이 성명을 보면 제1항은 '미국과 소련 양군은 철수하라'인데, 이건 당시 많은 사람이 주장했던 것이다. 거기에 김구와 김규식이 동의해줬다고 볼 수 있다. 제2항이 아주 중요하다. 북한이 동의하지 않으려 한 부분이다. '(외국 군대 철수 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 이것이었다. 노골적으로 쓰진 않았지만 '너희들, 전쟁 일으켜선 안 된다'는 다짐을 북한한테 받은 것이다.

북한이 더 싫어한 것이 있다. 김일성이 기자들을 만나서도 일체 이야기를 안 한 부분이다. 통일 정부를 세우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3항에 써놓고 있는데,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그런 다음에 총선거를 실시해 국회를 열고 통일 헌법을 만들어 통일 정부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려 했다. 남쪽에 이어서 자기들도 (분단)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제3항에 동의했다가 나중에 분단 정부를 세우면) 어쨌든 욕을 얻어먹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랬는데 김규식이 '이걸 꼭 집어넣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니,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4항이 '5.10 단독 선거 반대'인데, 이건 김구가 이미 연석회의에서도 얘기한 거다. '어떤 선거건 단독 선거는 반대한다'와 같은 뜻으로 해석하면 된다. 이것을 가지고 '북한에 이용당했다'고 말하면, 뭔가 많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남북 협상과 5.10선거, 김규식 '불참가 불반대'에 담긴 뜻

프레시안 : 분단 2년 만에 한국전쟁이 터진 걸 생각하면, 제2항이 실현되지 않은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와 별개로, 다른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5.10선거 참여 문제, 어떻게 보나.

서중석 : 난 그것(남북 협상)과 동시에 5.10선거에 대한 참여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점이 지금까지 내가 많은 진보 세력하고 의견을 달리한 대목이다. 당시 독립 운동 세력의 대다수는 분단을 초래한 5.10선거를 반대했다. (그 후) 진보 세력도 그런저런 영향 때문에 5.10선거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난 1945∼1947년에 이승만처럼 단정 운동을 편 건 아주 잘못된 것이라 본다. 그렇지만 1948년이 되면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이 확연히,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한국은 국제 문제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인데, (1948년이 되면) 남북이 단독으로 통일 정부를 세울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던 건 현실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프레시안 : 남북 협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5.10선거 참여를 인정하는 것은 뭔가 어색하다는 의견도 있을 것 같다.

서중석 : 그렇지 않다. 독립 운동에 매진했던 두 거두와 독립 운동을 한 분들 중 상당수가 분단되기 전에 최후의 보루, 최후의 노력으로서 남북 협상을 한 것은 상당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온 민족이 그렇게 바라던 일 아닌가.

사실 그때까지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 정치 세력들이 구체적으로 노력한 게 있는가. 없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논란 당시) 1946년 1월 7일 (좌우 주요 세력의) 4당 합의(코뮈니케)가 나오긴 했지만, 한민당이 즉각 반발하고 국민당도 (중경) 임시정부 쪽에서 '이럴 수 있느냐'는 식으로 나오니까 '동의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태도를 바꿔버렸다. 그러면서 파투가 났다. 좌우 합작 운동도 그렇게 많은 노력을 했지만, 실제로는 남한에서도 좌우 합작이 안됐다. 남북한 좌우 합작을 지향했는데, 그것도 안됐다. 만일 남북 협상마저 없었다고 한다면, 정말 우리가 통일을 위해 뭘 했다고 말할 수 있나. '온 국민이 그렇게 분단을 반대했는데 민족 지도자들이 그것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하는 말이 나올 때 할 말이 없지 않았겠나.

우리는 1950년대부터 오랫동안, 어쩌면 지금도 '한국을 분단시킨 건 미국과 소련이다', 이런 식으로 분단 책임을 강대국한테 돌리고 있지만 (정말 그것뿐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자. 그렇기 때문에도 남북 협상은 (분단을 막기 위한) 시도로서 두 사람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한 분들 중 상당수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조봉암이나 독립 운동을 한 사람 중 일부는 5.10선거에 참여해 극우 세력의 진출을 막고,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다. 좋은 헌법을 만들고, 친일파 처단을 위한 법도 만들고, 농민을 위한 법도 만들고 그러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활동을 적극 펴기 위해서도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거운 마음이더라도 5.10선거에 참여한 것은 그것대로 충분한 의미가 있다.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사실 김규식도 이 문제를 굉장히 깊이 생각했다.

프레시안 : 김규식은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5.10선거가 결정될 때 김규식은 아주 묘한 반응을 보였다. '불참가 불반대', 난 참가하지 않지만 참가에 반대하진 않겠다는 거였다. 참 의미심장한 말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섰을 때에도 김규식은 '좋은 정부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UN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결정이 나올 때 'UN 결의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고 하면서 다시 통일 운동을 해나가겠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에 나는 음미할 게 많이 있다고 본다.

1949년에 들어가면 정초부터 3영수 합작설이라는 게 나온다. 예전의 우익 3영수(이승만, 김구, 김규식)가 다시 합작한다는 설이다. 난 이건 김규식 쪽에서 퍼뜨린 이야기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해 5~6월에 가면, 민족 진영을 강화하겠다는 식의 움직임을 보였다. 남북 협상에 참여한 세력이 이듬해(1950년)에 치러질 선거에 참여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승만 정권으로선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면서 김구가 6월 26일 암살당한다.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김구 암살 문제에 대해선 구체적인 사료를 가지고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한다. 국회에서 1952년에 다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헌법에 돼 있지 않았나. 이승만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누가 봐도 김구였다. 김구는 이승만을 대신해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남북 협상에 참여했던 세력의 움직임은 김구가 죽은 다음인 7월부터 아주 구체화된다. 김규식을 주석으로 해서 민족진영강화위원회가 만들어지는데, 한때 상당히 많은 사람이 가세하고 그랬다.

프레시안 : 이승만 대통령이 적잖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서중석 : 이승만 정부가 (1948년) 4.3사건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나. 그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며 극단적인 반공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같은 해) 여순사건 때도 그 많은 피를 흘리면서 이른바 빨갱이 사냥을 폈다. (그 결과) 1949년이 되면 감옥소는 만원이 됐다. 그러면서 1949년 6월에는 6.6 반민특위 습격 사건, 6월 20일부터 본격적인 국회의원 체포, 6월 26일에는 김구 암살 사건 등 이승만 정권의 '6월 공세'라고 하는 게 일어난다.

(이에 더해) 1950년 5.30선거 때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전국을 순회하면서 '중도파 찍지 마라. 불온한 세력이다', 이렇게 경고했는데도 최초의 선거 바람이 중도파, 남북 협상에 참여했던 세력을 중심으로 분다. 정부가 '성시백 간첩단 사건'이란 걸 터뜨리면서 마치 중도파가 연루된 것처럼 엄청나게 보도하고 그랬는데도, (중도파가) 약진했다. 조소앙은 (조병옥을 누르고) 전국 1위로, 장건상은 감옥소에 있었는데도 전국 4위로 당선됐고, 조봉암도 당선됐다. 이승만 정부를 경악시켰다. (그와 달리)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과 이승만 추종 세력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서 각각 24석밖에 못 얻었다. 이는 당시 민심이 어땠는지는 물론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스물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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