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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마음은 갈대? 조선·동아도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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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 마음은 갈대? 조선·동아도 분노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8> 제3공화국의 탄생, 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일곱 번째 이야기 주제는 제3공화국의 탄생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5.16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5.16쿠데타, 열 번째 마당] 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5.16쿠데타, 열한 번째 마당] '박통'의 특별한 선배, 왜 간첩으로 죽어야 했나

[5.16쿠데타, 열두 번째 마당] '장면 맹비난' 박정희, 사실은 대부분 따라 했다

[제3공화국, 첫 번째 마당] '가만있어라' 강조한 '박통', 은밀히 뒤통수쳤다

[제3공화국, 두 번째 마당] '구악 쇼' 박정희, '적폐 쇼' 박근혜…닮은꼴 부녀

[제3공화국, 네 번째 마당] 박정희, 휘하 장군들에게 무릎 꿇을 뻔한 사연

프레시안 : 1963년 초, 일부 군인들이 박정희에게 '혁명 공약'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정치적 중립을 선언했다. 군인으로서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원칙에 이들 모두 충실하고자 한 것인지, 그게 아니라 눈엣가시로 여기던 김종필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더 강했던 것인지 의문이 든다.

서중석 : 몇 가지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누구나 여론에 흔들리기 마련이고 이건 군부도 마찬가지인데, 무엇보다도 당시 여론은 '군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하고 다시는 쿠데타가 일어나선 안 되며 박정희 등 쿠데타 주동자들이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또는 헌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원리·원칙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등장한 게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이었다. 드골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 알다시피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나치에게 어이없게 대패하고 종속됐다. 이때 자유 프랑스군을 이끈 드골은 파리를 되찾을 때도 프랑스 군대가 되찾은 모양새를 만들었다. 더 나아가 프랑스는 독일을 네 나라가 분할 점령하는 데 참여했고, 유엔을 만들 때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 다섯 나라에 들어갔다. 드골은 승리의 프랑스, 위대한 프랑스로 프랑스를 살려놓은 인물로 꼽힌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프랑스에서 제일 존경받는 인물로 돼 있지 않나. 1990년대 이후에 보면,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샤를마뉴 대제보다 인기가 더 좋더라.

어쨌건 그러고 나서 알제리 사태가 일어났다. 1954년에 출범한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이 엄청난 공세를 펴면서 프랑스가 양분되다시피 했다. 알제리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세력과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알제리 현지의 프랑스 세력 및 군부로 나뉘지 않나. 도무지 해결할 길이 안 보이고 그야말로 프랑스가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위기 상황에서 1958년 의회와 내각, 군, 대통령이 결국 재야에 있던 드골을 불러 전권을 부여하지 않나. 드골은 당당히 알제리를 독립시켰다(1962년). 그래서 드골을 죽이려는 암살대도 파리에 오지 않나.

난 드골이 알제리 독립을 인정한 건 잘한 일이라고 본다. 그때 드골이 세계적인 영웅이 됐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민족주의 하면 드골이었다. 그래서 드골을 본받자고 했는데, 여기에 딱 맞으니까 또 드골을 들고나온 것이다. 드골을 귀감으로 삼자는 이야기였다.

프레시안 : 쿠데타 주도 세력이 권력을 잡은 후 보인 모습도 많은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서중석 : 그런 원리·원칙이 주장되고 여론이 강렬했는데, 그것에 더해 5.16쿠데타 세력의 행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민주공화당을 사전 조직한 것이나, 그렇지 않아도 경제가 안 좋은데 4대 의혹 사건 등을 일으켜 엄청난 정치 자금을 끌어모은 데서 보더라도 '이 군인들이 권력에 눈멀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상궤에서 너무나 벗어나 개탄할 만한 행태를 보여줬다', 이런 여론이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군은 '혁명 공약' 제6항대로 본연의 임무에 복귀해야 한다는 강한 분위기가 나왔다고 본다.

그뿐만 아니라 5.16쿠데타 이후에 쿠데타 주동자들에게서 청신한 기풍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나?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는 말이 당시 유행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은 누가 봐도 가난뱅이 군인들이었는데, 갑자기 호화 주택에 살면서 특권층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더란 말이다. 부정부패가 또 굉장히 심했다. 이건 채명신 회고록에도 잘 나오지 않나. 군인들이 너무 심한 짓을 많이 하는 것이 자세히 나온다. 그중 제일 큰 게 4대 의혹 사건이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와 김종필이 너무나 무시무시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느냐', 이런 점을 일반인들도 많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자들이 정치에 나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여론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여론이 미국이나 군부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박정희를 민정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 건 여러 가지로 나눠서 봐야 한다. 김홍일, 박병권, 유양수처럼 군부에서 신뢰가 두터운 온건파는 국가의 장래를 생각해 그런 여론을 이끌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김재춘이나 김동하, 그리고 여러 최고위원들은 이원 조직에 대한 불만이 강했고 전부터 '김종필은 타도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게 분위기가 딱 맞으니까 이 기회에 몰아붙여야 한다고 한 것이 박정희의 민정 불참 선언으로까지 몰고 간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인다.

해군과 공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 이런 사람들은 특별한 의식은 없는 상태에서 박병권 국방부 장관이나 김종오 육군 참모총장, 김재춘 같은 사람들을 그냥 따라다닌 것 같다. 김종오와 김재춘 같은 경우 미국 대사관이 어떻게 나오는지, 미국이 박정희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등을 그쪽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알고 있었던 것도 크게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미국의 태도도 분명히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2.18 성명과 2.27 선서…"흐뭇하고 엄숙한 순간" 환영한 여론

프레시안 : 여론은 박정희의 민정 불참 발표에 호의적이었다.

서중석 : 박정희의 2.18 성명에 대해 그야말로 온 국민이 환영의 뜻을 표했다. 이제 우리나라가 정상적인 국가와 사회로 가는가 보다 하면서 다들 열렬히 환영했다. 2월 20일에는 송요찬이 군부 중립에 더해 민주공화당 해체까지 주장하면서, 박정희가 민정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강력하게 펴고 그랬다. 박정희의 민정 참여 포기는 2월 21일 김재춘을 제3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하는 것에 의해 더 확실한 것처럼 보였다. 중앙정보부장이라는 그 막강한 자리에 김용순을 대신해 김재춘이 오른 것이다. 이틀 후 김재춘은 중앙정보부 간부를 막 갈아치우면서 드디어 4대 의혹 사건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2월 25일 김종필은 드디어 김포공항을 떠나게 된다. 일본, 동남아, 중동 등 여러 지역의 특명 전권 순회 대사로 약 50일간 가 있도록 한다고 돼 있었다. 기자들이 '스스로 원한 것이냐'고 물어보니까 김종필은 "반반"이라고 답했다. 이게 유명한 자의 반 타의 반이다. 이 시기에 상당히 오랫동안 유행한 말이다. 물론 자의 반은 없었다. 완전히 타의에 의해 간 것이다. 나중에 김종필이 그렇게 털어놓는다. 하여튼 이때는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유행어가 나왔다.

프레시안 : 김종필의 언어 구사 방식에 눈길이 갈 때가 있다. 자의 반 타의 반 외에도 1990년대 후반 몽니라는 말을 널리 퍼뜨리는 등 독특한 언어 감각을 선보였다. 다시 돌아오면, 2.18 성명에 이어 2월 27일 주목할 만한 선서가 나온다.

서중석 : 반김종필 투쟁이 승리를 거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종필이 떠난 다음 날 민주공화당은 창당 대회를 열었다. 당 총재는 정구영, 의장은 김정열이었다. 쿠데타 나고 처음으로 만들어진 당이었다. 그다음 날 유명한 2.27 선서라는 게 나온다. 정치 지도자 27명이 참가하고 국방부 장관과 3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이 참석한 자리에서 그야말로 엄숙한 선언이 있었다. 박정희의 2.18 성명을 수락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새로운 사회를 맞는 것 같았다. 어떤 신문은 사설 제목을 '민족과 역사에의 거룩한 서약'이라고 거창하게 붙이고는 "이로써 조국은 새로운 역사의 기점에 들어섰다. 이로써 민족 앞에 힘찬 비약의 장이 열렸다. 욕된 역사를 과거의 어둠 속에 영구히 파묻고 오직 영광과 희망만을 기약하는 흐뭇하고 엄숙한 순간이다", 이렇게 찬양하는 사설을 썼다.

그렇지만 박정희가 그때 한 이야기가 있다. "혁명 정부가 당초 기도했던 세대의 교체라는 정치 목표에 있어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음을 솔직히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 정부의 노력은 대다수 정치인들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쳐 일대 정치적 난국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오늘 이와 같이 정부 계획의 대폭적인 후퇴와 양보로써 이 정국을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말했다. 구태의연한 정치인들 때문에 자기가 할 수 없이 물러섰다는 아주 이상한 이야기였다.

어쨌건 박병권 장관은 이를 굳히기 위해 3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과 오후에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2.27 선서를 찬양하고 반드시 이걸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밀고 갔다. 그리고 군 수뇌부의 저녁 만찬에서 박 장관은 박 의장한테 군에 복귀해 군을 지도·육성해줄 것을 건의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박정희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좀 더 시간을 두고 연구해보겠다', 이렇게 나왔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박병권을 비롯해 군에서 영향력이 있던 유양수, 박태준 등은 박정희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돼 있다. 일부에서는 '이거 이상하지 않냐'고 했지만, 다들 들떠 있었고 '이제 우리나라는 민주 사회로 가는 것 아니냐'고 여기고 있었다. 박병권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 1963년 2월 27일, 민정 불출마를 선언한 박정희의 2.18 성명을 수락하는 '정국 수습을 위한 선서식' 장면. 선서식에는 정치인들과 국방부 장관, 3군 참모총장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태도 바꾼 박정희의 반격 카드, 군정 연장 계획

프레시안 : 박정희는 3월 들어 태도를 바꾼다. 3월 7일 박정희는 정계가 혼란해지면 방관하지 않겠다며, 2.18 성명을 뒤집을 조짐을 보였다. 얼마 후, 박정희 측이 연이어 공세를 편다.

서중석 : 3월 11일 신문에서 쿠데타 음모 사건을 알렸다. 김재춘이 이끄는 중앙정보부에서 수사했다고 하면서 김동하, 박창암, 박임항, 이규광 등 19명을 체포했다고 했다. 나중에 김윤근 등도 여기에 포함되지 않나. '알래스카 토벌 작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쿠데타 음모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 대사관에서는 조작으로 봤다. 하여튼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김종필 쪽을 제일 강하게 몰아붙인 김동하가 구속된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가장 강력한 반김종필 세력을 거세한 것이다. 그러니 김재춘의 자해 행위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박정희로선 김재춘을 이용해 반김종필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고 나서 박정희가 김재춘, 박병권 등을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에 대한 기록이 김재춘 회고, 또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형욱 회고록, 이 두 가지에 조금 다르게 나온다. 김재춘 회고에는 3월 12일 아침에 자신들에다가 김종오, 그리고 최고회의 수뇌들도 불렀다고 돼 있다. 김형욱 회고록에는 이 자리에서 박정희가 직접 계엄을 선포하겠다고 한 것으로 돼 있다. 그렇지만 김재춘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난 김재춘 말이 더 맞다고 보는데, 김재춘 회고에는 육사 8기인 홍종철 최고위원이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으로 돼 있다. 그랬더니만, 그건 김형욱 회고록도 똑같은데, 박병권이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고 돼 있다. 2.27 선서를 한 지 며칠이나 됐느냐고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박병권이 전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홍종철은 한 술 더 떠서 군정을 4년 연장해야 한다고 했다. 박병권은 '그건 더 안 될 일이다', 이렇게 나왔다.

이건 박병권 물러나라는 이야기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박정희였던 것이다. 박병권은 1963년 3월 12일, 군의 정치적 중립을 선언한 지 10여 일 만에 쿠데타 사건 같은 게 난 것을 심히 부끄럽게 생각한다면서 사의를 표명했다.

유례없는 군인 데모, 기다렸다는 듯 군정 연장 시도한 박정희

프레시안 : 그 직후, 유례없는 군인 데모가 일어난다.

서중석 : 15일에는 쿠데타 사건 때문이라고 하면서 내각이 총사퇴를 선언했다. 박병권이 물러나는 것을 더 확실히 한 것이다. 바로 이날, 이상한 군인들의 시위 사건이 일어났다. 낮 12시가 조금 지나서 최고회의 청사 앞에서 약 50명의 장교를 비롯해 80명 정도 되는 군인이 시위를 했다고 하는데, 숫자는 자료마다 조금 다르게 나온다.

이들은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을 연장하라고 외쳤다. 자기들은 혁명동지회 소속이라면서, "반역 도당들의 완전 색출 시까지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태를 수습하되 이를 반대하는 장관의 진의가 의심스러우므로 즉시 해임 조치하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거론된 장관이 누군지는 뻔한 것 아닌가. 이들은 또 "(민생고를 해결한다는) 혁명 공약 제4항은 아직도 실천되지 못했으며 혁명 공약 제6항은 현재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으므로 군정을 연장하든지 박 의장 자신이 민정에 참여해서라도 기필코 실천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군정 연장 등을 요구하는 "우리 젊은 장교들의 우국충정이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부득이 최후적인 수단을 강구할 것을 선언한다", 이렇게 나왔다. 여기에는 수도방위사령부 장교들도 몇몇 끼어 있었다고 한다.

박병권 장군이 현장에 나갔더니만 "박 국방은 물러가라", "계엄령을 선포하라", "군정을 연장하라"고 외치는 통에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고 한다. 김진위 수도방위사령관이 가서 막 호령하는데도 먹혀들지 않아서 헌병을 풀어 이자들을 일단 구속한 걸로 돼 있다.

그런데 박정희 의장은 묘한 소리를 했다. 이들을 엄격히 군법으로 다스리도록 지시하면서, 아울러 그 동기가 애국적이든 애족적이든 간에 군인이 데모를 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시위를 애국적, 애족적으로 본다는 걸 은연중에 깐 것이다. (이 데모를 한 장교들은 박정희가 4.8 성명을 낸 후 모두 풀려났다. <편집자>)

프레시안 : 3.15 군정 연장 요구 데모는 현역 군인들이 대낮에 집단적으로, 더욱이 일부는 무기까지 휴대한 채 벌인 시위다. 그런데도,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최고회의 소속 헌병이나 경호원들은 아무도 이를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고 돼 있다. 이 시위의 배후가 박정희 의장의 경호 책임자이던 '피스톨 박' 박종규라는 이야기도 있다.

서중석 : 최고회의 의장 경호실 사람들이 이걸 주도한 걸로 알려져 있다. 각본대로 나온 거라고 본다. 난 이 데모를 보면서 1936년 일본의 황도파 소장 장교들이 일으킨 2.26쿠데타가 생각나더라. 그때 일부 육군 원로들은 처음에는 이것에 대해 애국적인 행동이라는 식으로 반응했다. 적극적으로 진압하려 하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조금씩 태도가 바뀐다. 특히 히로히토 천황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나오면서 확 바뀌는 건데, 하여튼 처음에는 그랬다. 그 생각이 나더라.

이 군인 데모에 대해 한 신문은 특별히 글자를 크게 박아서 '일부 군인들의 탈선 행동에 경고한다'는 사설을 썼다. "5.16혁명으로 군이 통치를 하고 있는 이 마당에 그 혁명 정부의 예하에 있는 젊은 장교들이 떼를 지어 통수 계통을 문란케 하고 정치적 행동을 내걸어 행동한다는 것도 하극상의 기풍이 그 극에 달했다고 해도 잘못이 아니요, 군율을 무시함이 이에 더할 바 없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외람하게도 '이 나라 정치 정세를 좌시·방관할 수 없어 전 국민의 이름으로' 운운하야 국민의 의사를 참칭했다."

신문 사설에서 이렇게 얘기하지만 박정희는 이미 주한 미국 대사 등 미국 고위층과 바로 밤에 다섯 시간이나 되는 긴 회담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다 준비해서 순서를 밟은 것이다. 박정희는 군정을 연장하겠다는 자신의 의도를 전한 것이고, 미국은 박정희가 이제까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소리를 한다면서 펄펄 뛰었을 것이다.

프레시안 : 이상한 군인 데모가 벌어진 바로 다음 날, 박정희는 민정 이양 염원을 저버리고 군정 기간을 대폭 늘리고자 무리수를 둔다.

서중석 : 3월 16일, 박정희는 그 유명한 3.16 성명을 발표한다. "정권 인수의 태세를 갖추지 못한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것은 너무나 국가 장래가 염려되고 일방 우리 스스로 혁명 당국의 무책임성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따라서 본인은 앞으로 약 4년간 군정 기간의 연장에 대하여 그 가부를 국민 투표에 부쳐 국민 의사를 묻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완전히 뒤집어놓은 것이다.

그러고는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 조치법을 공포해서 정당 활동을 정지시켰다. 물론 언론 활동도 다시 제한했다. 이날 국방부 장관에 드디어 박병권 후임으로 김성은 전 해병대 사령관을 임명했다.

엿새 후인 3월 22일 오전 국방부에서 160명의 군 지휘관이 박정희 의장을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고, 김성은 국방부 장관을 선두로 97대의 지프차에 분승해 청와대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을 지프차 데모 또는 별판 데모라고 한다. 여기엔 3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이 다 들어가 있다. 똑같은 사람이 또, 이번엔 다른 국방부 장관을 따라간 것이다.

▲ 1963년 3월 15일, 군정 연장을 요구하며 최고회의 청사 앞에서 시위하는 군인들. ⓒ연합뉴스


터져 나온 반대 시위, 사설 중단한 언론, 압박하는 미국

프레시안 : 군정 연장 시도는 커다란 저항에 부딪힌다.

서중석 : 이때 분위기는 박정희 측의 바람과 많이 달랐다. 미국 대사관은 격앙했다. 그래서 미국 측은 3.16 성명 다음 날부터 한국으로 향해 가고 있던 미 공법 480호(PL 480, 미국의 농업 수출 진흥 및 원조법)에 따른 잉여 농산물 수송을 즉각 취소하고 가까운 귀항지에 대기하도록 시달했다고 그런다.

또 각계각층이 막 반대하고 일어섰다. 6월항쟁이 있던 1987년의 호헌 철폐 투쟁 비슷하게 여러 군데에서 들고일어났다. 3월 20일에 윤보선은 서울시청 부근에서 을지로 입구 쪽으로, 허정은 무교동에서 시청 쪽으로 걸어갔다. 약 20분 간격으로 윤보선이 먼저 출발했다. 이들이 걸은 지역이 미국 대사관이 있던 반도호텔 쪽이어서 박정희 쪽에선 이걸 대사관 시위라고 한다. (세간에서는 이를 '산책 데모'라고 불렀다. <편집자>) 윤보선과 허정이 그쪽으로 걸어갈 때 경찰차가 와서 실어갔다고 한다. 윤보선, 허정 시위는 우리나라 1인 시위의 효시 격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너무 뜸하다가 근래에 와서 1인 시위를 많이 한다.

3월 22일엔 윤보선, 변영태 이런 사람들이 민주 구국 선언 대회를 열고 시위를 벌였다. 서울제일변호사회도 '2.27로 돌아가라'고 했고 3월 23일에는 전국4월혁명상이동지회 등 4월혁명 단체 9개가 모여 '3.16 성명을 철회하라'고 나왔다. 3월 29일에는 4월혁명 관련 단체 여럿이 모인 4월혁명단이라는 데에서 군정 연장 결사반대 성명을 냈다. 이건 나중에 '음모를 꾸몄다'고 걸려 들어가더라. 학생들도 시위에 나선다. 3월 29일 서울대 시위가 있었고, 다른 대학에서도 시위가 벌어진다.

그런데 사실 3.16 성명이 나왔을 때 제일 강경하게 나온 건 언론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대구매일신문>, <경향신문> 이런 데에서 3.16 성명에 대한 반발로 사설을 아예 싣지 않았다. 사설을 공란으로 하는 식으로 신문을 한동안 냈다. 그러다 <경향신문>은 3월 21일부터 사설을 썼고, 제일 마지막까지 버틴 게 <동아일보> 같다. 4개 신문이 다 이렇게 나온다. 이때 <조선일보>에 최석채 주필이 있었는데, <조선일보>가 이때까지는 괜찮았다. 1965년경부터 변한다는 얘기를 한다. <경향신문>도 그 무렵 중앙정보부한테 뺏기는 것이고. 하여튼 신문이 대단히 강하게 나왔다. (<경향신문>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내세워 1965∼1966년에 <경향신문> 사장을 구속한 상태에서 강제로 공매 처분했다. <편집자>)

또 미국 측은 여전히 민간 정치인에게 박 의장이 권력을 넘길 것을 촉구하고 3군 총사령관 같은 실권을 차지하라는 의사를 전했다고 <뉴욕타임스>에 기사가 나오고 그랬다.

▲ 박정희 의장의 군정 연장 계획은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사진은 1963년 3월 22일, 군정 결사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재야 정치인들. ⓒ연합뉴스


박정희, 군정 연장 철회한 대신 민정 불참 성명 뒤집기 성공

프레시안 : 안팎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박정희는 다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다. 군정 연장 시도를 철회하는 대신 자신의 민정 참여는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서중석 : 4월 8일, 또 하나의 번복 성명이 나온다. 이날 박 의장은 또 번의를 해가지고, 정치 활동을 다시 허용하고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 조치법은 폐기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3.16 성명에서 제안한 국민 투표는 보류한다면서, 민정 이양을 하겠다는 쪽으로 또 갔다. 그러면서 민정 참여 문제를 놓고 1962년 말부터 있었던 엄청난 정치적 폭풍은 여기서 일단락되는 것 아닌가. 이날 이후락 공보실장은 박 의장의 출마를 시사했고, 다음 날인 4월 9일에 김현철 내각 수반은 그걸 더 강력하게 시사했다. 그리고 5월 6일, 김종필에 이어서 이제 두 번째로 박병권 전 장관이 동남아, 중근동 등으로 외유를 떠난다.

4월 10일, 박정희 의장은 파동을 일으키는 얘기를 또 한다. 범국민 정당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김재춘한테 그걸 맡겼다. 전에 미국이 박정희한테 '신당에 폭넓게 참여하게 해야 한다'고 몇 번 얘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걸 박정희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범국민 정당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세력, 말하자면 김종필 반대 세력을 무마하는 차원에서도 범국민 정당을 만들어보자고 얘기한 것이다.

박 의장의 4.8 조치와 범국민 정당 제안이 발표되면서 미국이 다시 박 정권한테 원조 조치를 하는 걸 볼 수가 있다. 미국은 원조 자금 340만 달러를 다시 사용하게 하고 총 15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추가 원조를 5월말까지 배정해준다.

박 의장의 4.10 선언에 한때 민주공화당은 정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놀랐다. '이제 우리 당을 해체해야 한다'면서 해체 결의까지 했다. 그러다가 '그건 너무하다' 해가지고 다시 '대폭 축소하자', 이런 쪽으로 가게 된다.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자리가 워낙 좋은 자리이기 때문에 정당 하나는 뚝딱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해볼 수 있지만, 이게 참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상당수가 공화당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당은 야당대로 이 시기에 계속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빼내서 범국민 정당을 만든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군부라는 게 여러 세력으로 이합집산을 밥 먹듯이 하는 세력이니까 한때는 반김종필로 연합했지만, 이제는 또 김재춘에 대해 육사 8기 등이 고운 눈으로만 볼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김재춘으로선 죽을 노릇이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쉰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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