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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단속, 체벌...군국주의는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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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두발단속, 체벌...군국주의는 현재진행형” [기획] EBS 한국교육사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미리보기③
이 땅에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이 밀려왔던 1백년전, 우리 학교의 참혹한 비극이 시작됐다. 학교는 의도적으로 가해지는 모멸감과 감히 반항할 수도 없는 두려움으로 가득한 곳이 됐다. 그렇게 일장기 아래 난무하는 폭력과 군복은 학교에 대한 기억의 첫 장이 됐다.

그리고 1945년 8월, 마침내 높이 걸려 있던 일장기가 내려졌지만 어린 가슴에 일부러 상처를 내고, 분노를 가르치던 체벌방법은 습관처럼 남아 계승됐다. 개성이나 인권보다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강조하는 교육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일제 아래 교육을 받았고, 또 한 평생을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윤한탁(교육문화공간 ‘향’ 대표) 선생. 윤 선생은 지금도 당시를 회상하면 눈물이 먼저 앞선다고 했다.

“일제 때 교육이요? 잘못을 하면 동무들끼리 서로를 때리게 했어요. 또, 서로를 감시하게도 만들었죠. 그렇지 않으면 모진 매를 가했어요. 해방 뒤에도 학교는 여전히 잔인한 곳이었죠. 그래서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교사가 돼 아이들에게로 갔죠. 하지만 회한이 많아요. 교육자로 퇴직을 했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한처럼 맺혀 있어요. 그래서 지난해에 동료 퇴직교사들과 참회 선언을 하기도 했지만…. 역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되요. 이런 걸 후세에 가르쳐 주어야 해요.”

우리는 그동안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또 무엇을 배워왔는가. 일제와 군사독재의 역사는 우리 아이들의 학교에 얼마나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가. 지금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자유롭고 행복한 곳인가.

***“정답은 국가가 정한다”**

중국대륙 침략이 본격화 되던 40년대, 일제는 황국신민교육에 열을 올린다. 내선 일체를 내세워 조선인들을 일본의 전쟁에 내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황국신민교육의 핵심은 역시 일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군국주의가 극에 달한 일본의 황국신민교육은 같은 학생사이의 서열화, 체벌과 폭력 등 학교에 군대문화를 이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애국담당’이라고 해서 마을마다 책임자를 하나씩 둬요. 그럼 동네서 밥 먹고 나오면 마을에서부터 줄서서 학교를 가야해요. 학교에 가면 일본말로 ‘강구세이’라고, 완장차고 딱 서 있다고. 서 있으면 애국반장이 보고를 해요. 줄서서 보고를 하고 군대식이죠. 심지어는 사진에도 있지만 모자도 전투모를 썼어요.” 일제식 교육을 받았던 박영식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체제를 강고히 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친구를 감시하고 경쟁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교육은 일본말인 국어와 일본역사인 국사교육이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국어 독본>이라고 쓰인 교과서는 첫 장부터 일왕과 일장기, 조선황궁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도덕과 국민윤리 과목의 시초가 된 <수신> 역시 일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절대적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학교수업이 끝난 뒤 어린 소년과 여학생들은 일상적으로 부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일제는 그렇게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착취했고, 동시에 이들이 언제든지 일본의 전쟁에 소년병이 돼 나갈 수 있도록 복종하는 식민지 인간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소학교라는 명칭을 국민학교로 바꾸고 군대와 다름없는 교육을 시켰다.

일제 말기가 되자 식민지 교육은 오로지 침략 전쟁의 미화에 집중됐다. 자폭을 위해 길러진 가미가제 특공대가 일왕의 적자로 선전되었고, 일왕을 위한 전사야말로 어린이의 아름다운 정신으로 표현됐다. 아이들은 일왕에게 죽음으로 충성을 다했다는 일본 위인들의 동상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했다.

이렇듯 지칠 줄 모르는 군국주의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학자들은 명치유신의 정신적 지주 후꾸자와 유기치의 ‘탈아론’이 그 시작인 것으로 보고 있다. 못된 친구 아시아를 버리고 유럽 강국으로 가겠다는 탈아론은 조선 식민지화와 대륙침략의 결정적인 이론이었다. 후꾸자와 유기치는 아직도 일본 지폐 최고액권의 주인공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19세기 초 서구에는 스펜스의 ‘사회진화론’이 등장한다. 다윈의 진화론처럼 인간사회에서도 적자생존·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은 나치즘과 파시즘 등 국가주의의 이념적 기반이 됐다. 그리고 그런 국가주의 사조는 일본의 군부와 만나 유럽의 나치즘보다 혹독한 일본식 군국주의의 형성을 자극했다.

19세기 중반, 미국 페리제독의 검은 선단에 의해 강제 개방조치를 당했던 일본은 그 두려움을 강한 국가 건설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 명치유신을 단행했다. 그리고 명치유신은 다른 국가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임라일본부설’과 같은 역사왜곡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특히 침략에 앞서 한반도 역사왜곡을 치밀하게 기획한 것은 바로 일본 육군성이었다.

일본 육군성은 당시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고도로 훈련된 일본 육군 장교들을 한반도에 파견해 고대부터 일본군인이 한반도에 출병을 했다고 왜곡했고, 명치 22년 도쿄대학에 사학과를 만들면서 한국사를 체계적으로 왜곡해 나갔다. 그렇게 일본군대가 주도하고 대학들이 동원돼 철저히 조작된 식민사관은 모든 일본 국민들에게 교육되거나 퍼뜨려졌고, 다시 당사자인 한국인들에게 주입됐다.

***“이승만·박정희, 독재연장 위해 교육활용”**

이러한 흐름은 해방 뒤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안호상 씨는 일제의 정신을 이어받아 ‘일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냈다. 전국의 중·고등학교 학생을 학도호국단이라는 군사조직으로 묶어 학교에 장교를 배치하고, 나아가 국가주의적인 이데올로기 또는 좌익 배척의 이데올로기 교육을 심어주는 것이 바로 ‘일민주의’였다. 이는 오로지 친미우파만을 위한 민족개념이라는 점에서 파시즘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한국전쟁 뒤 일민주의는 폐기됐지만 더욱 노골적인 반공·반북 기치가 자리 잡았다. 여기에는 ‘국부’, 다시 말해 군왕을 자처하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있었다.

박정희의 등장과 함께 일제식 교육은 보다 본격적으로 부활했다. 일본식 교육정신과 일본 명치유신 지사들의 행적에 심취해 있던 박정희는 1968년 일왕의 교육칙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했다. 이 무렵부터 학교의 모습은 마치 시대를 되돌린 듯 일제시대의 모습을 닮아갔다.

국민교육헌장은 학생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의 총화단결을 요구했다. 국가와 민족 발전을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논리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사회의식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국민교육헌장 아래 개인이나 인권은 실종됐다. 정부 정책에 대한 어떤 비판도 역적으로 몰수 있는 근거가 됐으며, 장기집권을 합리화하는 최고의 도구였다.

당시 교과서들도 이러한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도구로 활용됐다. 일제 때 국가독점 체제였던 교과서 발행은 50년대 전시교과서로, 다시 반공교과서로 고스란히 옮겨졌다. 그러다 보니 50년대 교과서엔 공산군을 때려잡는 전쟁놀이까지 등장했다. 여기다가 1972년 국사교육강화위원회가 결성된 뒤로는 유신정권이 끝날 때까지 국사를 중심으로 한 국책과목들은 국난 극복사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국가를 위한 희생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국민교육헌장의 선포를 시작으로 학교의 병영화도 진행됐다. 이듬해인 69년 고등학교 군사훈련이 의무화됐다. 대학교의 학생회장 선출권은 학도호국단 체제로 바뀌는 등 숨 막히는 행군이 이어졌다. 이어서 75년에는 전국의 학생을 군대조직화 하는 중앙학도호국단이 발단식을 갖기도 했다. 현역 군인이 학교에 상주하며 교련교육을 실시하는 등 학교는 그렇게 군대를 닮아갔다.

***“세뇌의 역사, 학교에서부터 지울 때”**

일제와 군사독재는 공통적으로 학교를 군대처럼 만들고자 했다. 그들은 왜 학교를 군대화하려 했던 것일까. <천왕의 군대>라는 책에는 과거 군국주의 시대 군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비인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군대생활을 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 군인들은 철저한 전쟁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런 특징은 정도의 차이일 뿐 군국주의의 공통점이다.

일제는 본격적인 침략전쟁 이전부터 이미 자국 학교에서 군사화를 진행했다. 또, 1933년 독일에서도 대대적인 파시즘 대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물론 청소년들이 대거 동원됐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군사훈련은 끔찍할 만큼 철저한 세뇌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강력한 국민개조 정책의 하나로 새마을 운동을 내세우기도 했다. 농촌인구가 70%에 가까웠던 시절, 농촌에 대한 개조와 통제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애초 과잉생산으로 남아돌던 시멘트의 처리를 위해 시작된 시골길 정비사업은 곧 부지런한 만큼 잘살게 된다는 대대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모자라는 곳을 지원함으로써 균형발전을 지향한다는 복지원칙을 무시했다. 오히려 정책에 잘 따르는 모범 마을에만 지원을 했다. 농촌에서도 상호 경쟁을 정책수단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어린시절 학교에서 군사문화를 닮은 규율에 익숙해지고, 다시 군대를 거쳐 사회의 군사문화를 반감 없이 받아들이는 재생산의 구조. 우리는 어쩌면 백년 동안 이름만 바뀐 군사문화 속에서 맴을 돌고 있는 지도 모른다.

박정희를 이제는 그냥 지난 역사 속 인물로만 알고 있는 아이들. 이들을 위해 기성세대들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워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오랜 세월 개인들에게 자신의 의지나 행복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것이 옳다고 배워왔다. 국가의 위기에선 희생함이 당연하고,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정권의 비리쯤은 참아야 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군대는 독재와 군사문화의 생산기지였다. 그렇다면 군대의 불합리함은 군이라는 특수성 안에서 당연한 것인가. 군대의 변화 없이 우리 사회는 변화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인터넷에 동영상 등이 올라와 논란이 되고 있는 가혹한 두발단속과 체벌 등은 많은 학생들의 동감을 얻고 있다. 이런 체벌에서 아이들은 실제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심각한 모욕감을 느낀다고 한다. 성장기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체벌은 웃으며 넘기는 것 같지만 상처로 남기도 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두발문제는 민감한 문제로 반복돼 왔다.

이제 국가가 이끌어가겠다는 독재의 역사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학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여전히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는 21세기의 식민지로 남아있어도 좋은가. 약한 자에게 가혹하고 개인의 행복과 개성을 억눌러 온 군대와 같은 학교. 60년 동안 반복돼 온 그 비극의 역사를 이제 거두어야 할 때다.

***EBS 광복60주년 특별기획 5부작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제3부 ‘정답은 국가가 정한다-군국주의와 독재에 대한 기억’은 26일 저녁 10시 EBS 채널을 통해 방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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