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북적대는 야스쿠니, 썰렁한 전몰자묘원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북적대는 야스쿠니, 썰렁한 전몰자묘원 [조선학교 이야기②]귀화해서 편하게 살라고?
지난 25일 일본 도쿄의 민족학교인 '도쿄 조선제2초급학교'(에다가와 조선학교)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에다가와 조선학교는 도쿄도 정부의 운동장 부지반환 소송에 맞서 싸운 결과 운동장을 싯가의 1/10인 1억7000만 엔(약 14억 원)에 사기로 했는데, 남측에서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모금활동을 펼쳐 2개월 동안 1억여 원이라는 금액을 전달한 것이다.

사실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련계 학교'라는 등, 일본 정부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는 등의 짧은 해설로는 부족하다. 이 학교에는 재일조선인 사회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다. 또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는 모국인 남과 북의 역사와도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편집자>

재일조선인 밀집 거주 지역에 쏟아진 미군 '불' 폭탄

▲ 도쿄 대공습 당시 화염에 휩싸인 도쿄시내.

에다가와 조선학교가 자리 잡은 곳은 일본 도쿄 남동쪽의 고토(江東)구 에다가와(枝川). 1940년 일본이 올림픽을 추진하면서 도쿄도 정부는 조선인들을 이 곳으로 내몰았다. 당시 이 지역은 허허벌판 황무지에 쓰레기 매립장이 있던 곳이다. 또 고토구와 바로 옆의 주오(中央)구는 일본 군함을 만들고 수리하던 조선소와 군수기지가 밀집해 있던 곳으로 일본에 징용돼 온 조선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특히 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의 최대 피해지이기도 하다. 이일만(63) 도쿄 조선인강제연행 진상조사단 사무국장은 "도쿄 대공습 당시 조선인이 적게는 3000명, 많게는 1만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설명했다. 대공습 당시 사망자는 10만여 명인 것으로 집계되는데, 조선인이 1/10이나 죽었다는 것이다. 인구대비로 봤을 때 엄청난 피해이다.

이 국장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엄청나게 희생된 이유는 지리와 기후적 조건 두 가지다. 지리적으로 미군의 공습의 최대 목표가 조선소와 군수공장들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많이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최대 피해자일 수밖에 없었다.

기후적으로 미군은 도쿄의 풍향을 정확히 분석해 남동쪽에서 '춘풍'(春風)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3월 10일을 디데이(D-DAY)로 잡아 남동쪽의 고토구와 주오구 등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
▲ 도쿄지도. 조선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고토구와 주오구는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립지였고, 조선소와 군수시설이 밀집해 있었다. ⓒ프레시안

3월 10일 새벽 B-29 폭격기 344대로 이뤄진 미군의 대대적인 도쿄 대공습이 시작됐다. 도쿄 대공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못지않게 전사(戰史)에서도 손꼽히는 효과적 공습이자, 잔혹한 공습. 폭탄도 일반 폭발성 폭탄이 아닌 가솔린과 글리세린 등을 혼합해 엄청난 열을 내며 불을 지르게 하는 소이탄을 집중적으로 쏟아 부었다. 일본 건축물이 대부분 목조건물임을 노린 것이다. 땅에 떨어진 소이탄의 화염은 엄청난 속도로 사람이며 건물이며 닥치는대로 태우며 바람을 타고 번져나갔고, 순식간에 도쿄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길 곳곳에는 타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다. 불길이 어찌나 뜨겁던지 불 옆에만 지나가도 머리에서 횃불처럼 머리카락이 타올랐다고 한다. 몸에 불이 붙은 많은 사람들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다 속에 뛰어든 많은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또렷한 '조선말'이 더 많았다고 한다. "엄니, 나 타죽어요. 너무 뜨거워요. 나 좀 살려줘요!"

1923년 일어난 관동대지진의 사망자가 10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공습은 지진에 버금가는 위력이었다. 심지어 강 위에도 불이 붙을 정도였고, 길바닥이 뜨거워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던 일본인이나 조선인이나 도망도 못 가고 길 위에 그대로 쓰러져 타 죽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폭탄을 투하하고 돌아가는 B-29 조종사들이 시체 타는 냄새를 맡을 정도였다고 한다.

도쿄 대공습 추모비에는
▲ 도쿄 위령당에 위치한 도쿄 대공습 추모비. 가운데 통로가 유골이 담긴 납골당으로 통하는 문이다.ⓒ프레시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 대공습 추모비에는 조선인들의 피해상이 한 마디도 언급이 돼 있지 않다. 도쿄 스미다(墨田)구에 위치한 도쿄 위령당. 이 곳은 관동대지진 당시 사망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당이 설치된 곳으로 한 쪽에는 도쿄 대공습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평화를 기원하고자 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꽃으로 가득한 이 비에 대한 설명판에는 조선인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다. 이 설명판은 '평화를 기원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패전(敗戰)'이라는 표기 대신 '종전(終戰)'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도쿄 대공습의 조선인 피해자에 대한 무관심은 60여 년 동안 계속되다 지난 3월 비로소 재일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공식 추도회가 열리며 영혼을 위로할 기회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식적인 재일조선인 희생자 수는 '수십명' 수준. 도쿄 위령당에 안치된 대공습 희생자 납골 4000여 기를 조사한 결과 조선인 이름의 납골을 거의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희생자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이름을 남긴 희생자도 창씨개명 등으로 인해 이름으로 출신을 확인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도쿄 대공습 연구의 권위자 사오토네 가츠모토(73) 씨. 그는 일본인 공습 피해에 대해 평생을 연구해왔지만 조선인 피해에 대해서는 한 번도 연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최근 이일만 국장에게 편지를 보내 "내 연구에서 조선인을 배척한 것이 한스럽다"며 "앞으로는 내가 죽을 때까지 조선인 피해에 대해 연구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적북적 야스쿠니, 한산한 전몰자묘원
▲ 참배객과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야스쿠니 신사. ⓒ프레시안

'침략사'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고이즈미-아베로 이어지는 우익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며 과거사에 대한 뻔뻔함이 더욱 노골화되고 있어 재일동포들은 더 불안하다. 그 대표적 예가 고이즈미 전 총리와 아베 현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야스쿠니 신사는 과거 일본 어느 동네에나 있는 조그만 신사였지만, 1970년대 전범 유골 합사가 이뤄지며 중건됐다.

지난 24일 일요일 오전. 휴일을 맞아 야스쿠니 신사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북적였다. 보이스카우트 학생들, 주변에 사는 사람들, 관광버스를 타고 도쿄 관광을 하러 지방에서 온 나이 든 일본인들 등 많은 일본인들이 야스쿠니에 들러 두 손을 모아 절을 하고 갔다.

같은 시각 야스쿠니 신사에서 차로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전몰자묘원'은 한산했다. 30여 분 동안 보이는 사람은 산책 나온 주민 두 사람 뿐이었다. 이 곳은 2차 대전 당시 희생된 이들 중 신원을 알 수 없는 이들의 유골을 안치하고 전쟁에 의해 희생된 아시아인들을 추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 묘원 안내판에는 일본 본토를 제외한 아시아 각국에서 희생된 이들의 숫자를 표기해두고 있다. 총 240만 명.
▲ 한산한 전몰자묘원. ⓒ프레시안

희생자 숫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최소한 일본이 과거 전쟁에 대해 반성을 하고 있다면 총리들이 참배해야 할 곳은 야스쿠니 신사가 아니라 전몰자묘원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다. 이일만 국장은 "그래도 고이즈미는 눈치가 보였던지 야스쿠니 갔다가 전몰자묘원을 들렀다 갔는데, 아베는 그조차도 하지 않고 있다"며 혀를 끌끌 찼다.

창씨개명 요구하는 한국정부

일본 식민시 시대에 대부분 강제로 징용돼 끌려간 재일동포들 숫자만 적게는 120만, 많게는 250만 명으로 추산된다. 해방 후 이들은 뱃삯이 없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배가 없어, 조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일본에 정착하게 됐다. 1세들은 이제 거의 숨지고 2~4세가 재일동포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승전국 국민'으로서 귀향하는 날을 꿈꾸던 것도 잠깐. 6.25 전쟁으로 모국은 남과 북이 갈려 쑥대밭이 됐는데 쑥쑥 성장하는 일본의 모습을 보며 억울함에 땅을 쳐야 했고, 성장하는 일본사회에서 다시 차별의 늪으로 빠져야 했다. 재일동포들에겐 아직까지 투표권이 없고, 1999년까지만 해도 외국인 지문날인이라는 치욕을 당하며 살아야 했다.
▲ 전몰자묘역에 있는 안내판. 일본을 제외한 지역에서 희생된 이름모를 군인과 시민들의 숫자를 표시하고 있다. 여기에 표시된 희생자 수는 남한에서 1만8900명, 북한에서 3만1600명, 중국에서 46만5700명, 만주에서 24만5400명 등 아시아 전역에 걸쳐 240만 명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프레시안

이 속에서 에다가와 조선학교는 꿋꿋히 재일조선인들의 뿌리 역할을 해왔다. 해방 직후 '고국에 돌아가려면 조선말을 알아야 한다'며 만든 국어강습소를 1946년 학교로 개편해 개교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총련)이 생긴 해가 1955년. 사실 총련보다 조선학교가 먼저였고, 재일동포들에게는 이념보다는 '일본인'들에 맞서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60여 년이 흘러 2007년. 그런데 이들에게 한국은 너무나도 야속한 존재다. 모국에서의 투표권을 요구하는 재일동포들에게 한국 정부는 "영주권자에게는 현지화, 즉 귀화유도에 지장이 있을 뿐 아니라 이 권리를 얻음으로써 과대한 요구가 예상되니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한 마디로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이상, 한국에 돌아올 것이 아니라면 일본에 귀화해 잘 적응해 살아라"는 것이다. '조센징'이라는 차별과 억압을 받으며 도쿄에서, 교토에서 태어난 2세, 3세, 4세들에게 "너희들의 고향은 '경상도 양산', '제주도 대성리'"라고 가르치며 '일본에 동화될 수 없다'며 조선학교를 지어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며 살고 있는 재일 조선인들에게는 "모국은 당신들을 버렸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연로한 한 재일동포 2세는 "일제시대 일본놈들이 창씨개명하라는 것처럼 한국정부가 재일동포들에게 창씨개명하라는 것 아니냐"며 화를 냈다.

재일동포 단체 관계자는 "이승만 정권 시절 나라 사정조차 추스르지 못하는 처지에 재일동포들이 아예 관심 밖이었다는 것은 그렇다 쳐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며 재일동포들은 공식적으로 버림을 받았다"고 말했다.
"1년에 재일동포 1만여 명씩 일본에 귀화"
▲ 에다가와 조선학교 송현진 교장. ⓒ프레시안

'그래도 일본에서 따돌림과 차별을 받으며 사는 것보다 현지에 적응해 동화돼 사는 것이 편한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 질문에 에다가와 조선학교 송현진 교장은 "우리는 재미동포 등과 같이 일본에 오고 싶어 온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우리를 강제로 데려왔으면 일본 정부가 상응한 보상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송 교장은 경남 진해에 살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와 낳은 재일조선인 2세이다.

송 교장은 "재일조선인으로 사는 것보다 더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1년에 1만여 명 씩 재일동포들이 이름을 바꾸고 일본으로 귀화하고 있다"며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돕기는커녕, "귀화해서 잘 살아라"고 부추긴 덕일까. 현재 한국이름을 쓰는 재일동포는 약 60여 만 명이지만, 귀화한 동포들까지 합하면 재일동포가 1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재외동포 단체 관계자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이민 간 미국, 자치구를 인정받아 공동체를 유지해 온 중국,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뿔뿔이 흩어진 구 소련 지역, 주로 징용자들이 귀향하지 못해 생긴 일본의 동포사회는 생성 과정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며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정책에 대해 비판했다.

일본에서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고 우길 때, 총리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할 때, 극우 정치인이 "정신대는 자발적이었다"는 망언을 늘어놓을 때, 한국 정부와 언론 모두 힘을 합해 요란법석을 떨며 일본 정부를 비난한다.

그러나 극우들에게 테러 위협을 받으며, 세금은 내지만 투표권은 보장받지 못하는 등 일상적인 차별 속에 사는 재일조선인들에게는 "알아서 잘 살아라"라며 침묵하는 대한민국.

온갖 홀대에도 불구하고 재일조선인들은 모국 사람들보다 더 남과 북이 통일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모국이 강성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다. 모국이 강해야 일본 사회에서 일본인들에게 차별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에다가와 조선학교 학부모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꿋꿋이 이름과 말과 글을 지키며 살아왔고, 차별 속에서도 끊임없이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워 온 저력이 있다"며 "조국에 먹고 살게 해달라고 바라지 않으니,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배워야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조국이 자랑스러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