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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15년, 남북관계의 '잃어버린 세월'
[김기협의 냉전 이후] <71·끝> 2000년, 대한민국은 '거의' 주권국가였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때, 미국도 한국도 민주당 정권이었다. 한국의 한나라당과 미국의 공화당에 비해 양쪽 다 북한에 대해 포용적 정책 기조를 가진 정권이었다. 그래서 남북정상회담도 가능한 것이었고, 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국의 대북정책도 빠른 변화를 일으켰다. 몇 달 사이에 조명록 특사를 정중하게 맞이하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한
통일 과업의 출발점으로서 2000년 정상회담
[김기협의 냉전 이후] <70> 남한의 '연합제'와 북한의 '연방제'
2000년 6월14일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김대중-김정일 회담의 내용을 배석자 중 하나였던 임동원은 피스메이커 88~121쪽에 소상히 기록했다. 남측에서 치밀하게 준비한 의제를 내놓고 김정일이 그에 응대하는 식으로 그려져 있다.사실 그대로인 것 같다. 김정일은 기본 원칙만 정상회담에서 확인하고 세부사항은 이후의 실무회담에서 다루기를
정상회담의 시작, 북한이 주도권 쥔 이유는?
[김기협의 냉전 이후] <69> 상호주의와 햇볕정책, 진짜 이익은…
2000년 6월 13일 9시반경 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태우고 서울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한 시간 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환영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북한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진 '최고 지도자'를 일반 국가원수와 다른 특별한 권위를 가진 존재로 받들어 왔다.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못마땅한
중국의 역할은 무엇인가?
[김기협의 냉전 이후] <68>남북관계란 '변수', 북중관계 '상수' 맞춰 조율?
김일성이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은 1991년 11월의 일이었고 김정일이 권력승계 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은 2000년 5월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불편한 상태를 많이 겪었다. 북한은 1992년 8월의 한-중 수교와 1995년 장쩌민 주석의 남한 방문에 분노했고, 아시안게임의 타이완 개최를 지지하는 등 타이완에 접근하는 움직임
친일파의 속성으로 미국 섬기는 사람들
[김기협의 냉전 이후] <67> 남북 '불리한 대결' 유지하려는 대결주의자들의 논리
남북관계란 원론적으로는 남한과 북한 사이의 1대1 관계다. 이것은 양쪽 체제가 국가로서 주권을 확립한 상태를 전제로 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전시작전권 문제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남한의 주권에는 제한이 있다. 그래서 미국의 입장이 남북관계에 작용하는 것이다.관계 정상화를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미국의 도움 없이는 정상적 대북관계가 불가능하다는
손 맞잡은 남북정상, 신뢰 회복 시작되다
[김기협의 냉전 이후] <66> 북한의 김일성 묘소 참배 요구는 '짜고 치는 고스톱'?
아직도 남한사회에는 북한의 실상이 잘 알려져 있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감추려 드는 문제도 있겠지만, 더 앞서는 문제는 남한정부의 정보 차단 정책이다. '재미동포 아줌마'가 나름대로 북한 실상을 알리려고 애쓰는 것을 '종북 콘서트'로 몰아붙이는 데서 이 정책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신은미 씨가 허위정보를 퍼뜨리는 것이라면 사실과 대조해서 그 거짓을 밝혀야 할
미군에 대한 북한의 입장 변화…이유는?
[김기협의 냉전 이후] <65> "평화가 오더라도 미군을 쫓아내지 않겠다!"
정상회담을 열흘 앞두고 회담 준비의 마무리를 위해 임동원이 특사 자격으로 김정일을 찾아갔을 때 김정일이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토로했다고 한다."우리 조선반도는 주변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지역이며 주변국들은 사실 조선반도의 분단이 지속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조선반도 문제는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
김일성 사후 '유훈 통치'…'때'를 기다린 김정일
[김기협의 냉전 이후] <64> 준비된 대화 상대 김정일
돈 오버도퍼는 1997년에 낸 두 개의 한국 개정판을 2001년에 내면서 "후기"에 그 동안 자신의 관점 변화를 이렇게 적었다.97년 이 책 초판의 집필을 끝냈을 때 필자는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북한 정권이 오랫동안 버티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그와 같은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노무현의 '대북 특검' 수용은 직무유기
[김기협의 냉전 이후] <63> 盧 정부, 대북송금 특검으로 잃은 것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주체는 물론 남한과 북한 정부였지만, 제3의 주체로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끌던 현대그룹을 또한 꼽아야 할 것이다. 정부의 정책결정과 활동 내용에 비해 기업의 역할은 공개되지 않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그룹과 북한 정부의 방대한 협력사업계획이나 소떼방북, 금강산관광 같은 엄청난 여론 조성 작업 등 겉으로 나타난 지표만 보
북측이 튕기고 남측이 매달린 '정상회담'
[김기협의 냉전 이후] <62> '퍼주기 논란'과 盧 정부의 대북송금특검
임동원은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 출범 때부터 외교안보수석보좌관으로 일하다가 1999년 5월말 통일부장관으로 취임했다. 대통령의 그늘에서 정책을 기획, 입안하던 위치에서 집행하는 위치로 나온 것이다. 그 동안 햇볕정책의 구체적 추진방향도 세워져 있었고 미국 등 주요 관계국과의 정책 조율도 어느 정도 이뤄져 있었다.그런데 임동원은 불과 7개월 후인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