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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때문? 박정희 경제 파탄이 항쟁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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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영삼 때문? 박정희 경제 파탄이 항쟁 불렀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2> 유신의 몰락, 열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항쟁에 불붙인 학생들, 김영삼 제명보다 YH사건에 더 큰 관심 보였다

프레시안 : 부마항쟁 원인을 살폈으면 한다.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발생한 건 김영삼 제명 때문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 부분, 어떻게 생각하나.

서중석 : 많은 사람이 부마항쟁은 김영삼 제명 때문에 일어났다고 얘기하고 있다. 부산과 마산이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이 된 지역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김영삼 제명이 부마항쟁에 영향을 끼친 건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느냐 하는 건 좀 더 생각해봐야 한다.

예컨대 학생들의 경우 부산대 교정에서 있었던 시위에서도, 시내에 나왔을 때에도 김영삼 제명을 거론한 구호는 안 나왔다. 부마항쟁에 대한 글을 쓴 김하기는 "김영삼을 연호하는 구호가 나온 것은 10월 16일 오후 6시 이후 시청 앞 시위가 처음이다"라고 썼다. 시위 군중 속에 김영삼 지지자가 있을 수 있었고, 또 김영삼을 지지해서라기보다는 박정희의 김영삼 제명에 분노해서 항쟁에 참여한 시민도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 제명을 계기로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한 불만이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부마항쟁의 기본적 성격을 더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민주화운동사 2>에 따르면, 10월 16일 밤 10시쯤 부산 광복동 시위 군중 속에서 "김영삼"을 연이어 외치는 목소리가 나오자 다른 한쪽에서 "여기서 김영삼이가 왜 나와? 우리가 김영삼이 위해 시위하나?"라는 반론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조갑제도 <유고>에서 "부산 민중 봉기가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에 큰 자극을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데모대가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은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한 한 번뿐이었다"고 밝혔다. '편집자')

프레시안 : 전에 YH사건을 다룰 때 학생들이 부마항쟁을 일으킨 중요한 계기가 바로 YH사건이었다고 얘기했다. YH사건과 부마항쟁의 관련성, 어떤 식으로 나타났나.

서중석 : 부마항쟁은 YH 문제와도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10월 15일 시위가 불발로 끝나긴 했지만 그날 부산대 학생들이 뿌린 민주 투쟁 선언문을 보면 "모든 경제적 모순과 실정을 근로자의 불순으로 뒤집어씌우고 협박, 공포, 폭력으로 짓눌러왔음을 YH사건에서 단적으로 보여주고"라고 해서 YH사건이 큰 계기가 됐다는 것을 시사했다. 또한 학생들은 이 선언문에서 저임금 노동자 문제를 상당히 큰 비중으로 언급했다.

부산대 학생들은 10월 16일에 뿌린 선언문에서 1894년 동학혁명 때처럼 폐정 개혁안이라는 것을 제시했는데, 거기에 "YH사건의 당사자 같은 반윤리적 기업주 엄단"을 명시해서 요구했다. 두 선언문 어디에서도 김영삼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경남대 시위를 일으키는 데 앞장선 정인권은 증언에서 첫 번째 분노와 자극은 YH사건이었고 그다음이 정치적 음모와 파괴 공작이었다고 밝혔다. 김영삼 사건이 그다음이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YH사건과, 빈부 격차 속에서 노동자들이 너무나 심하게 당하고 저임금으로 고생하는 문제에 대해 더 큰 관심을 보여줬다는 것을 이 선언문들이나 여러 증언은 얘기하고 있다.

▲ 부마항쟁은 YH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진은 신민당사에서 끌려나와 닭장차에 실려 울부짖는 YH 여성 노동자의 모습(동아일보 1979년 8월 11일 자 7면). ⓒ동아일보


"우리가 돼지 새끼냐"…'유신 대학' 오명 딛고 떨쳐나서다

프레시안 : 18년에 걸친 장기 집권, 특히 1972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유신 체제라는 기괴한 1인 독재를 구축한 것 또한 항쟁 원인에서 빼놓을 수 없지 않나.

서중석 : 부마항쟁이 일어난 데에는 유신 체제 반대가 아주 큰 요인이 됐다. 10월 15일 부산대 학생들이 뿌린 민주 선언문, 여기서는 유신 헌법을 "악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날 같이 살포된 민주 투쟁 선언문에서는 박정희와 유신과 긴급 조치 등을 "불의의 날조와 악의 표본"이라고 규정했다. 부산대에서 16일에 살포된 선언문, 그러니까 상대 2학년 정광민이 중심이 돼서 뿌린 그 선언문에서는 유신 헌법을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라고 규정하면서 유신 체제 타도의 선봉에 서자고 촉구했다.

시위에 나선 시민, 학생들의 압도적인 구호가 "유신 철폐", "독재 타도"였다. 10월 16일 점차 어둠이 깔리면서 학생 시위대가 이젠 민중 시위대로 변했고 시위형 투쟁이 항쟁형 투쟁으로 변모해갔는데, 거대한 조수처럼 밀려드는 5만여 인파의 시위 행렬은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프레시안 : 그런데 유신 쿠데타 이후 부산과 마산은 유신 반대 시위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지역 아닌가. 그런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항쟁이 일어났다는 점도 눈에 들어온다.

서중석 : 광주항쟁에서도 조금 나타나고 다른 시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시위에는 학생들의 자괴감이라고 할까 미안함 같은 것도 작용했다. 시위가 일어날 무렵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서울의 모모 여대에서 가위를 보냈다느니, 남성의 그것을 자르라는 뜻일 텐데, 면도칼을 보냈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10월 16일 부산대 시위에 참여한 한 학생은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로부터 시위 소식을 접할 때마다 '유신 대학'이라는 오명에 대한 강한 모멸감과 자괴심을 금할 수 없었다. 대다수 학생들이 느끼고 있었던 공통된 감정이었다. 이러한 심리적 요인들이 10·16 시위에서 학생들의 힘을 결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고 증언했다.

10월 18일 경남대 도서관 앞에서 정인권도 "우리 경남대학이 이게 뭐냐. 돼지 새끼만 모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고 해가면서 학생들을 분발시켰다. 3·15의거탑에 모였을 때 학생들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탑 앞에서 "선배님, 못난 후배를 꾸짖어주십시오. 우린 전국 대학생들이 유신 헌법 철폐 시위를 벌일 때 학교 당국의 농간으로", 박종규가 인수해 사실상 교주 역할을 한 것과 뗄 수 없는 대목일 터인데, "유신 찬성 데모를 해버린 못난 후배들입니다"라고 묵념을 올리고 그 자리에서 "독재 타도", "박 정권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처럼 학생들은 자신의 지역과 대학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졌는데도 유신 체제에서는 반독재 투쟁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괴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부마항쟁에서 상당히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유신 경제 파탄이 항쟁 불렀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 특히 하층민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이 부마항쟁의 중요한 특징으로 보인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한 것인가.

서중석 : 앞에서 말한 여러 요인도 항쟁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시민들이 그렇게 많이 가담한 것, 저녁만 되면 학생들이 아니라 시민들이라고 할까 군중 또는 민중이 중심이 된 시위로 항쟁이 전개되는 모습을 띠게 된 것은 유신 경제의 실패, 파탄, 그리고 그것의 귀결로서 나타난 민중의 소외와 불만이 그대로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0월 16일 부산대에 살포된 선언문에는 이렇게 돼 있다. "특히 고도성장 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수없는 부조리, 그중에서도 재벌 그룹에 대한 특혜 금융이 기업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특수 권력층과 결탁하여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막대한 독점 이윤을 거두어 다수의 서민 대중의 가계를 피폐케 했다. 터무니없이 낮은 생계비 미달의 지불, 극심한 소득 분배의 불균형 때문에 야기된 사회적 부조리를 상기해보라."

1978년 12·12총선 결과에 대한 청와대 비서진의 분석에서건 중앙정보부 분석에서건 경제 문제가 큰 사안이었다. 부가가치세, 물가고, 노풍 피해 같은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고 특히 "공화 위에 재벌 있다"는 야당 공세에 속수무책이었다고 그쪽에서 털어놓지 않았나. 이 시기에 재벌 편향 정책과 맞물려 빈부 격차가 극심했다. 이건 유신 말기로 올수록 더욱더 극심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으로 인해 소외된 실업자, 노동자 같은 사람들의 강한 반발이 시위에서 드러났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중화학 공업화가 진전되는 것에 비례해 해마다 커져갔다. 그리하여 1979년의 경우 전체 제조업 출하액에서 상위 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16.3퍼센트, 10대 재벌의 경우 22.7퍼센트, 2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30.3퍼센트였다. 이런 재벌과 특권층의 결탁,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문제가 너무나 심각했다. 그래서 상류층은 물도 따로 사서 마시고 심지어 혼인도 자기들끼리만 하는 식으로 계층 간 위화감이 극심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 당시 지적되고 그랬다.

물가도 서민들, 노동자들을 굉장히 힘들게 하는 요소였다. 그렇잖아도 물가고가 심각했는데, 제2차 석유 파동까지 가세하면서 1979년에는 1978년보다 물가가 더 심하게 뛰었다. 부가세가 1977년에 도입된 것도 중소 상공인, 특히 영세 상공인들한테는 큰 부담이 됐다. 조세 부담률도 계속 높아졌다. 1975년에 15.4퍼센트였던 것이 1978년에 16.9퍼센트로 높아졌고 1979년에는 17.2퍼센트가 됐다.

그리고 주택 부족으로 저임금 노동자들의 셋방살이도 힘들어졌다. 그런 속에서 서민들이나 실업자들, 노동자들의 큰 불만을 산 것이 197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투기였다. 투기 광풍이 빈부 격차를 더욱 실감 나게 했다. 1978년에는 전국의 토지 가격 등귀율이 무려 49퍼센트나 됐다.

곤두박질친 경제…유신 경제의 전체적인 구조가 문제였다

프레시안 : 유신 말기에는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중복 투자 문제도 심각하지 않았나.

서중석 : 중화학 공업은 유신 체제를 상징하는 대표적 산업으로서 우리나라 산업 구조까지 바꿔놓기는 했지만, 1970년대 말에 가서는 유신 체제의 발목을 잡아버렸다. 재벌 판도는 정경유착과 관련돼 있었는데, 정부 보증으로 얼마나 큰 규모의 중화학 설비 차관을 도입하느냐에 의해 판가름 났다. 대재벌들은 충분한 자기자본 없이 무리하게 차입했다. 그러면서 중화학 공업에 뛰어든 기업들의 평균 자기자본 비율이 20퍼센트 수준에 그쳤다. 중복 과다 투자로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 공업 총 투자 규모의 30퍼센트나 투자 보류 또는 중지시킨 후 투자 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도 1979년 5월에 가서야 했다.

그런데 이때 중화학 공업이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그리고 그것이 마산 같은 곳에 바로 영향을 끼친 건 조업이 제대로 안됐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수출 가능성 같은 걸 제대로 따졌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거대한 차관을 도입해 막 공장을 지은 것이다. 1979년 12월을 기준으로 가동률을 보면 기계류는 60.1퍼센트, 비철 금속은 69.6퍼센트, 전기 기계는 69.4퍼센트, 운송 장비는 35.3퍼센트였다. 창원 기계 공단의 경우 평균 가동률이 1979년 12월 현재 50퍼센트 미만이었다. 부마항쟁 때 잔업을 마친 창원 공단의 현대양행 노동자들이 퇴근하다가 시위에 가담하게 된다고 지난번에 얘기하지 않았나. 현대양행도 임금 체불이 오랫동안 계속된 곳으로 꼽혔다. 나도 여기 가봤지만, 엄청 큰 공장이었는데 가동이 멈춰서 세계 최대의 창고가 돼버렸다는 말을 1980년경에 듣게 된다. 이때도 제대로 가동되지는 않았다. (유신 말기 경제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았는가를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가 임금 체불 현황이다. 노동청이 1979년 6월 20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79년 5월말까지 임금 체불액은 136억 300여만 원(296개 업체)으로 1978년 같은 기간의 체불액 19억 5100여만 원(240개 업체)의 무려 7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늘어난 건수에 비해 금액의 증가폭이 엄청나게 높다는 사실은 올 들어 대기업 도산 등으로 인한 대형 체불이 급격히 증가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외채 문제도 심각하지 않았나.

서중석 : 이렇게 중화학 공업 부문이 불황에 허덕이면서 경기가 곤두박질쳤는데, 그에 더해 외채 문제도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 외채를 갚기 위해 새로운 외채를 계속 도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단기 외채를 대량으로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래서 외채 망국론이 이 무렵 등장하게 된다.

그러면서 경제 성장률이 1976년 14.1퍼센트, 1977년 12.7퍼센트로 굉장히 높았던 것이 1978년에는 9.7퍼센트로 대폭 낮아졌다. 지금으로 봐서는 상당히 높은 수치로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대폭 낮아진 수치였다. 특히 1978년 하반기, 말경으로 가면 더 나빠진다. 그게 12·12선거 결과에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1979년에는 6.5퍼센트로 더 낮아진다.

1980년에는 -5.2퍼센트를 기록했다. -5.2퍼센트 부분은 다른 자료의 경우 –5.7퍼센트로 나오기도 하는 등 자료마다 수치가 조금씩 다르긴 하다. 하여튼 한국이 마이너스 성장을 한 건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4월혁명이 일어난 1960년, 굉장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그해에도 플러스 성장을 했다. 그런데 1980년에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는 건, 성장률로만 보면 경제 상황이 그때보다도 훨씬 더 나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건 1970년대 말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만큼 한국 경제가 유신 말기에 나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1976년, 1977년에는 유례없는 경제 호황이 있었고 그래서 수출 100억 달러 목표를 조기에 달성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그러한 것들은 중동 특수에 크게 힘입은 중화학 공업 건설과 수출이 많이 작용했다는 점이다. 이때 수출 증가 역시 중동 특수에 크게 힘입었다. 그런데 사실 중동 특수는 1978년, 1979년, 1980년에도 괜찮았다. 그런데도 경제가 그렇게 나빠진 것이다. 그리고 오일 쇼크가 물가고나 불황에 크게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지만, 되짚어보면 제1차 오일 쇼크로 산유국이 돈을 많이 벌면서 우리가 중동 특수라는 굉장히 유리한 경제적인 조건을 갖추게 된 것 아닌가. 또 제2차 오일 쇼크가 있으면서 산유국이 다시 거대한 오일 달러 보유국이 된 것 아닌가. 그래서 중동 특수가 계속 있게 된 것이다.

내 얘기는 이 시기에 경제가 이렇게 나빠진 것은 유신 체제 경제의 전반적인 구조에서 그 문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제2차 오일 쇼크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일 쇼크와 중동 특수 같은 것을 같이 봐야 하는 것이다. 중동 특수는 계속 괜찮았는데도 한국 경제는 왜 이 시기에 나빴는가 하는 부분을 유신 체제와 연결해 깊이 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 동아일보 1979년 7월 17일 자 6면과 7면. 6면에는 한동안 사라졌던 물레방아가 다시 등장하고 어선은 경비를 줄이려 돛을 달고 출항하는 등 오일 쇼크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완화해보려는 각지의 움직임을 담은 기사가 실려 있다. 그 옆 7면에는 공단에 감원 바람이 불고 조업을 중단하는 업체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담겨 있다. 이래저래 서민들은 하루하루 버티기가 쉽지 않은 때였다. ⓒ동아일보


유신 붕괴의 직접적 요인이 된 부마항쟁

프레시안 : 부산, 마산 지역의 경제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부산, 마산 지역의 경제가 이 시기에 다른 지역보다 더 나빴던 것으로 나타나는 지표가 몇 가지 있다. 예컨대 부도율도 높아서 1979년 부산은 전국의 2.4배, 서울의 3.0배로 나와 있다. 부산 경제는 수출에 많이 의존했는데, 1979년 수출 증가율이 10.2퍼센트로 전국 수출 증가율 18.4퍼센트보다 훨씬 낮았다. 저임금을 토대로 하고 있었던 마산의 수출 공업 단지에서도 휴업, 폐업을 하는 업체가 늘어났다. 1979년 9월 현재 마산에서 24개 업체가 휴·폐업에 들어갔고 6000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최대 규모의 중화학 공업 단지 중 하나인 창원 공업 단지도 불황에 시달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현대양행의 경우 가동이 제대로 안됐다. 그리고 조갑제 책을 보면 부산 지역 상인들한테 부가세가 엄청 많이 부과된 걸로 나온다.

이런 것들이 부마항쟁에 불을 지르는 데 영향을 끼쳤다. 시위 상황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부산민주운동사>에는 10월 16일 어둠이 깔리면서 시위 주도권이 시민들한테 넘어갔다고 기술돼 있는데 그때 노동자, 상인, 접객업소 종업원, 교복을 입은 고교생들이 혼연일체로 구호를 외치고 투쟁했다고 쓰여 있다.

마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마산 항쟁에 참여한 사람 중 한 명의 증언을 들어보자. 21세였던 이 사람은 창원 공단에서 일했다. 그 회사에서 12시간 간격으로 맞교대를 했는데, 월급은 고작 7만 원에서 8만 5000원 정도였다. 회사 내부에서는 서로 실업자가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 사람은 이런 상태에 있다가 퇴사한 지 1개월이 됐을 때 항쟁에 참여하게 된다. 저임금, 나쁜 작업 환경과 억압당한 노동자 권리 같은 것이 불만을 크게 키웠고, 밑바닥 실업자들이 증가 일로였으며 노동자, 농민, 소시민들이 아주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퇴폐 향락 산업, 비리, 부조리가 판을 쳐서 시위에 나서게 됐다고 이 사람은 증언했다. 경찰 자료로 보이는 마산 지방 대학생 소요 사건에 관한 보고서 중 검거 학생 분석 부분을 보더라도 부산과 마산에서 나온 여러 기술, 각종 증언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마항쟁에서 시민들이 학생 시위를 적극 성원하고 옹호했으며, 학생과 더불어 싸웠고, 나중에는 시위대의 주류를 이룬 것이다. 상황이 이러했을 뿐만 아니라 공권력에 대한 야유와 욕설이 쏟아져서 경찰이 대응하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경찰 작전 차량에 불길이 솟자 경찰 간부가 그 차량을 구하기 위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는데도 경찰이 따르지 않는 사태도 벌어졌다.

부산 시위와 마산 시위 참여층은 대체로 영세 상인, 영세 기업 노동자들과 반실업 상태의 자유노동자,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등 접객업소 종사자, 상점 종업원, 그리고 도시 룸펜 부랑아로 불린 사람들이나 무직자였다.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기에 회사원 등 중간층 시민들도 상당수 호응해 비조직적 민중 항쟁 양상을 보였다.

이 사람들은 중화학 공업화 과정에서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엄청나게 몸집을 불린 재벌, 정경유착, YH사건에서도 잘 드러난 기업가의 비윤리적 행태, 돈과 권력 있는 자들의 부동산 투기, 각종 특혜 스캔들 같은 것에 대해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고물가, 경제 불황, 과다한 세금,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 환경, 실업, 셋방살이 등도 이들이 시위에 뛰어들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런 것들로 인한 좌절과 체념, 무력감, 앞길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생활 같은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또한 자신들의 고향인 농촌 문제, 이건 마산에서 이런 일이 많았다고 하는데, 즉 피폐한 농촌 상황도 이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이 시기에 농촌이 아주 피폐하지 않았나.

이처럼 박정희 유신 체제와 연결된 극심한 빈부 격차, 권력형 비리, 부패와 억압, 장기 영구 집권, 그리고 김영삼 제명이 보여주는 정치적 폭주 같은 것이 항쟁의 큰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프레시안 : 이른바 공권력 확립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쪽에서는 '시위 양상을 보면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사실 폭동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서중석 : 부마민중항쟁은 김재규가 말한 대로 민란이나 봉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난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시위대가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게 무엇인지를 잘 볼 필요가 있다.

시위 참여자들은 우선 유신 독재의 주구라고 본 치안 기관, 공화당사, 그 밖의 공공 기관을 공격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MBC, KBS 등의 언론 기관을 공격했다. 또한 그런 곳들과 관련된 차량 등을 공격하고 파출소에 있던 박정희 사진을 떼어버렸다. 마산에서는 상류층과 관련 있는 자가용이나 고급스러운 건물을 파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파출소를 점거해도 무기고는 그대로 놔뒀다. 흉기도 지니지 않았다. 병원 같은 공공시설은 손대지 않았다. 상점에서 물건을 약탈하지도 않았다.

부마항쟁은 유신 체제의 실상, 유신 경제 정책의 성격이 잘 드러난 가운데 유신 체제와 사회,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들고나온 학생들과 서민, 하층민들의 불만이 화산처럼 폭발하면서 터져 나온 것이다. 김재규가 거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게 바로 이 부마항쟁이다. 그런 점에서 부마항쟁은 유신 붕괴의 직접적 요인이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여든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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