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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원에게 처자식 신변까지 위협하던 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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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원에게 처자식 신변까지 위협하던 이들이…" [자동차로 흘러들어온 사람들]<6·끝> 현대자동차 서인호 조합원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가 송전탑 고공농성에 들어간 지 200일 넘었다.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도 노숙농성이 진행 중이다. 그 또한 한 달 째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화'. 길게는 이 문제로 10년을 싸웠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그들의 요구가 현실적인지 아닌지, 그들이 이기적인 집단인지 아닌지를 떠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해온 개개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들이 왜 싸우는지, 대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인지, 아니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들이기에 이러는지.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제각기 걸어온 길을 따라가는 이 글은, 총 6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필자 주>

"어떤 업체였나면요, 직원 대부분이 업체 사장의 조카, 소장의 지인, 반장의 동향 사람, 뭐 이런 식인 거예요. 쉽게 말해서 업체에서 집안의 누가 결혼식이 있다 그러면 그날 연차 쓰는 사람이 다수가 발생해요. 서로 다 얽혀 있기 때문에. 그런 곳에 절 넣었어요."

해고 1년 9개월 만에 현대자동차로 돌아왔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해고가 되었다. 사장 멱살을 잡았다며 업체는 그를 징계 해고했다.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억울했다. 그를 포함해 업체에서 해고된 이가 4명. 이들은 모두 조합원이었다.

"그땐 순수했죠. 해고됐을 때도 다 밝혀질 줄 알았어요. 같은 회사 사람들도 다 사실을 알고 그러니까, 억울한 거 다 밝혀질 줄 알았는데. 또 다들 사는 게 바쁘고 하니까 안 되더라고요."

25살의 그는 순진했다. 그래서 2004년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는 노동부의 판결 앞에 희망을 봤다.

"우리 노동조합 처음에 아는 것 없이 시작했지만, 2004년 불법 파견 판정이 나고 그래도 법으로 판정이 내렸으니, 우리가 거짓말한 게 아니지 않느냐. 뭐가 바뀌지 않겠냐."

희망 때문에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긴 해고 생활이었다. 마침 아내가 첫 아이를 뱃속에 가진 참이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컸다. 장애인 형이 어렵게 번 돈으로 들어간 대학을 차마 다니지 못하고 1학년 때 그만두고 나와 돈을 벌었다. 볼 것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사람 하나 보고 자신을 택했다. 그런 아내가 걱정이 넘쳐 가만있다가도 눈물을 주룩 흘렸다.

그도 노동조합 모르고 일만 하던 때가 있었다. 성실하게 일하며 그 대가가 언젠가는 온다고 생각했다. 사내하청 직원 중 일부를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신규채용 공고가 뜨면 늘 도전을 했다. 최종 면접까지 올랐지만, 3번이나 떨어졌다. 일하다 다친 산재 경험 때문인가 싶었다. 뒤늦게 처가댁으로부터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회사 관리자가 3000만 원을 준비하라고 했단다. 그럴 돈도 없고, 그렇게 해서까지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는 사회가 아니었다. 그는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젊은 사람이 앞에 서야 한다고 하여 대의원 자리를 맡았다. 그 덕에 해고됐다. 그래도 노동조합이 있어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 기존 업체가 아닌 다른 업체로의 재입사였다. 그와 같이 복직한 두 사람도 뿔뿔이 흩어졌다. 새로 배정된 업체에서 조합원은 그 혼자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사람을 왕따 시키기 참 좋은 그런" 업체였다. 150명 가까이 일하는 하청업체에 관리자 포함 정규 직원은 4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임시 단기직 이었다. 그들은 몇 달 일하고 사라졌다. 정규직원인 40명은 관리자들과 동문, 동향, 친척 등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서로의 이해가 얽혀 있고, 소개와 보증으로 들어온 것이니 행동거지가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회사에서 인호 씨는 왕따를 당했다. 나중에 전해 들은 바로는, 그가 입사하기 전부터 관리자가 조회 때마다 주의를 주었단다. 아주 악질이 들어온다고. '빨갱이'인데다가 '싸가지'도 없다고. 악질 빨갱이인 그와 말 섞는 사람은 없었다. 인사조차 받지 않았다.

ⓒ프레시안(최형락)

악질 '빨갱이' 조합원

"제자리만 지키고, 물 한 모금 먹고 싶어도 정수기가 있는 휴게실에는 비조합원들이 쉬고 있기 때문에 못 갔어요. 점심이면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 노동조합을 찾아가서 밥 먹고 오고. 그러고 3년을 살았어요."

오가는 말이 있다면 욕설과 시비였다. 다른 직원들은 그에게 화를 냈다. 너 때문에 회사 이미지가 실추된다. 너 때문에 회사가 되는 일이 없다. 위장도급한 불법업체에 더 이상 실추될 이미지가 무엇이 있을까 했지만, 그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회사가 바라는 것은 싸움이었다. 싸움이 그를 더 외톨이로 만들 거고, 결국 회사에서 버티지 못할 게였다.

업체 사람들은 때로 그를 설득했다.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노동조합에서 그만 나오라고. 가입 안 해도 어차피 임금은 다 같이 오르는 거 아니냐고. 그는 그 말이 제일 듣기 싫었다.

2500원도 안 되게 시작한 사내하청 시급. 초창기에는 성과급이나 다른 수당들조차 붙지 않는 업체들도 많았다. 사람을 헐값에 부렸다. 돈이 안 되니 사람들이 오래 있지 않았다. 현대차 원청도 안 되겠는지 조금씩 돈을 인상했다. 월급이 오른 것은 노동조합 덕분이기도 했다. 회사는 노동조합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 야금야금 돈을 올려주었다. 다만 노동조합과 협상을 통해 올리는 것은, 단 돈 십 원일지라도 싫어했다. 노동조합의 힘이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일방적인 인상안을 정규직 단체협약 때 같이 통과시켰다. 그러면 사내하청 노동조합은 이에 반대해 싸웠다.

그러자 하청업체들은 조합원이 있는 사업장만 단체협약 타결 성과급 지급을 늦췄다. 노동조합 때문에 임금 문제가 해결 안 되어 못 준다고 했다. 다른 업체 사람들은 성과급을 받았는데, 우리 업체는 조합원들 때문에 돈이 나오지 않는다. 비조합원들의 불만이 커졌다. 심지어 인호 씨가 있는 업체는 조합원이 달랑 하나였다. 대부분 단기직이었기에 계약 만료 기간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성과급은 나오지 않았다. 계약이 먼저 끝나면, 그 돈을 못 받고 나가야 하는 걸까. 초초한 사람들은 인호 씨를 들볶았다.

"그분들이 쉬는 시간마다 조를 짜서 오셨어요. 엄청나게 뭐라 하셨어요. 나가서 한 판 붙자고도 하고.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제가 뭐라 말도 못하겠고."

업체에서의 개별 싸움은 끝이 나지 않았다. 회사는 계속 분란 거리를 만들었다. 싸움을 일어날 것 같으면 관리자들이 숨어 지켜봤다. 꼬투리를 잡아 징계 해고를 시키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그래서 참았다. 욱하는 성격이지만, 참고 참았다.

그러나 도저히 참지 못한 날도 있었다. 싸움을 걸어오던 직원이 말했다.

"네 집 아니까, 네 각시랑 자식 가서 다 죽여버릴 거다."

그 이야기 듣는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참지 못하고 싸웠다.

"막 싸우고, 관리자들 불렀어요. 어떻게 해결할 거냐. 관리자들은 그 사람 편만 들죠. 이야기가 안 통하는 거예요. 내 편들어줄 사람이 업체에 단 한 명이 없는 거예요. 그 길로 옷 갈아입고 나와서 노동조합에 갔어요. 가니까 당시 김형우 지회장이 계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자세히는 안 했는데, 그 앞에 엄청나게 울었어요.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기에, 나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욕을 먹고 살아야 하냐."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기 때문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왕따를 당하고 있지 않을 거다. 언젠가 저 사람들도 노동조합이 필요하게 될 거다. 저 사람들도 변할 거다. 두고 보자."

어쩌면 희망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2004년 노동부의 불법파견으로 시작한 소송이 2010년 대법원에서 인정된 것이다.

"환하고 사람 많은 곳에서 술 한 잔 먹어 봅시다"

불법파견을 했으니,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한다는 판결이 났다. 공장이 다 술렁거렸지만, 그의 업체만은 조용해 보였다. 한 날, 그는 통근버스를 기다리는 업체 사람 하나에 은근슬쩍 물었다. 우리 업체는 왜 이렇게 잠잠합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내일 술 한잔할 수 있습니까.

드디어 술을 먹는 건가. 예전에 한 번 회사 젊은 사람들이 그에게 술자리를 권했다가 관리자들에게 불러간 적이 있었다. 그 후 처음이었다.

"군대기업이라고 할 정도로 통제가 심한 업체였어요. 제가 안타까운 게 사람들이 일 끝나고 맥주 한 잔도 생각날 거 아니에요.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술을 먹으려면 반장이나 조장을 한 명을 동행해서 먹어야 하고 아니면 어디 가서 뭘 먹었는지 보고라도 해야 했어요."

그들이 모인 장소도 회사와 멀리 떨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관리자들이 한 명도 살지 않은 낯선 동네로 숨어들어 갔다. 맥주 한 잔 마시기 위해 그리 멀리 갔다. 술자리에 4명이 왔다.

"그 4명이 내일 노동조합에 가입하겠다 하더라고요."

그의 바람이 현실이 됐다. 그를 찾는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조합 가입자가 14명으로 늘었다.

"그 사람들하고 술을 다시 먹었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숨어서 먹지 말고 환하고 사람 많은 곳에서 술 한 잔 먹어봅시다 했어요. 형님 한 분이 술을 먹다 우시더라고요. 고맙다고. 회사를 10년 가까이 다녔는데, 참 병신 같이 살았다. 그래서 제가 형님, 앞으로는 관리자들 모여 사는 지역에 가서 술 먹어 봅시다 그랬죠."

다른 조합원들조차 그가 버티는 것을 보고 "저 새끼는 진짜 대단한 놈 아니면 '또라이' 새끼다"라고 하던 시절들이 보상되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당해온 3년의 고통이 새로운 조합원들에게 가해졌다.

"관리자들이 집까지 찾아가서 탈퇴를 종용하는 거예요. 출근 시간에 조합원 집에 가서 탈퇴서 내밀면서 안 쓸 거면 출근하지 마라, 이러고. 사람들이 깨달았던 거 같아요. 탄압을 받으면서 '아, 이거구나. 내 권리를 주장했을 뿐인데 무조건 안 좋게 생각하고. 노동조합에서 탈퇴를 시키기 위해 거짓말에 협박에 가리지 않고. 이런 세상이구나'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탈퇴하지 않았다. 극심한 탄압에도 탈퇴서를 보내온 이는 3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현대자동차는 대법원 판결에도 모르쇠로 버티었고, 조합원들을 파업으로 맞섰다. 그 파업의 책임을 물어 회사는 그를 해고했다.

두 번째 해고였고, 그의 아내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해고 사실을 말 못 했다.

"나중에 집 사람이 눈치를 채더라고요. 물어보더라고요. 더는 숨길 게 뭐가 있겠어요. 미안하다. 그 말 하는데… 진짜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너무나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집사람도 처가댁에 바로 이야기를 못 하고 1년 정도 있다가 한 거예요."

아내도 아내지만, 딸 고생하는 것을 보는 장모님께 죄송했다. 평소에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는 사위였다.

"잘난 사위 모습을 지금껏 못 보였지만 반드시 자랑스러운 사위가 되도록 하겠다 했는데, 길어지다 보니까…."

그때 빚을 내서라도 3000만 원을 만들었으면 이리 고생을 안 할 텐데. 지나가는 말로 한탄을 한다는 처가댁에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그는 "내가 옳았다 보여주고 싶어서 여기서 포기할 수가 없다" 한다.

또 오기를 부린다. 옳은 것은 뒷돈을 드려 안정된 자리를 얻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자기 대신 해고가 되고 왕따를 당하고 눈물을 훔치고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는 이기고 싶다. 옳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솔직히 저는 저 살려고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또 제가 살려고 동지들 조직하고, 혼자 힘이 미약하니까… 그랬지만. 거짓말이라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싸우길 잘했구나, 이게 옳구나 해요. 후회도 한 번씩 하지만, 잘했구나 생각이 들어요."

성실하고 평범했던 그가 두 번의 해고를 거치며 성장하는 사이, 그의 아이도 커갔다. 9살이 된 첫 아이는 요사이 아빠의 직장이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에서 '금속노조'로 바뀐 줄 안단다. 그가 작업복 대신, 금속노조라 쓰인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작업복을 입지 못한 지 2년이 넘었다.

불법파견 문제는 해고자들과 농성 철탑에만 있지 않다는 것

며칠 전, 인호 씨와 해고자들은 현대 본사 앞 농성을 해단하고 각자의 공장으로 돌아갔다. 여름 장맛비를 고스란히 맞고 땡볕에 버텨가며 지켜온 현대본사 앞 농성은 끝났지만, 여전히 현장은 싸움터이다.

인호 씨가 돌아간 전주공장은 지난 4일 트럭부에 주간 2교대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트럭부는 원래 주간근무만 하는 공정이었다. 2급 발암물질인 야간 노동을 없애겠다며, 주간연속 2교대를 주장한 현대차 노동조합이 트럭부에 야간 노동 도입을 합의한 것이다.

노동시간이 늘어났으니, 회사는 이로써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 하지만, 실제는 노동부조차 불법파견이라 판정내린 하청업체의 노동자들이 트럭부에 투입될 예정이다. 사내하청 노동조합은 250일 넘게 고공농성을 지키며 현대차가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하청업체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새롭게 야간노동이 도입될 전주공장 트럭부에서는 불법파견이 또다시 용인되고,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직접생산 공정에 투입된다.

촉탁직은 목을 매고, 야간노동 철폐는 공허한 소리가 되고, 불법파견은 언제든 확대될 조짐을 보인다. 그래서 공장 안은 늘 싸움이다. 불법파견 문제가 해고자들과 농성 철탑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 작업 현장 곳곳에서 만들어지는 싸움으로 보인다.

다시 현장에서 싸움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해고자들은 현대본사 앞을 떠났다. 75일간 천막 하나 없이 버티며 옳다 믿는 것을 지켜낸 이들의 농성이 끝이 났다. 현대차 송전탑 고공농성은 오늘(8일)로 265일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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