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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조선 최초 '디벨로퍼'에 주목했는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춘원 이광수가 납북을 당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만약 그가 납북을 당하지 않았다면, 정세권 선생은 많은 이들에 의해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을지 모른다. 정세권 선생의 셋째 따님 정몽화에 따르면, 이광수는 그의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정세권의 자서전을 집필하려 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었고 이광수가 한국에 있었다면, 정세권 이야기는
"통일된 말 있어도 글 없으면 문화 민족 아니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감격의 큰사전
1957년 한글학회의 큰 사전 완성을 축하하여 정세권은 '큰 사전 완성을 축하함'이라는 글을 한글誌(한글학회 펴냄)에 실으면서 본인의 참여 동기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큰 사전 완성하는) 날을 당하여 지난 일을 돌아보면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삼십 년 전 어느 날 조선물산장려회 회의석상에서 한 선생님을 맞이하여 그 포부를 물어보았더니 그 선생이 말씀하
건축왕, 조선어학회에 발 담그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고루 이극로와의 인연
정세권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온 지식층을 많이 아꼈다. 가족들은 특히 이광수와 이극로를 기억한다. "이광수 선생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왔을 때, 거처할 곳이 없어서 쩔쩔매는 것을 보고 (아버지 소유) 북촌 한옥에 머무르게 하셨어요. 이극로 선생을 무어라 불렀는지 아세요? 고무신 박사예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어요. 아버지가 너무 아낀 분이었어요….
그가 손을 떼자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이 몰락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성공과 위기의 건축왕
1929년 조선물산장려회 활동이 재점화할 조짐을 보이자, 일제의 방해와 탄압이 시작되었다. 최태영 박사의 물산 장려 운동 강연에 대한 회고다. "(조선물산장려회) 강연하는 날이면 종로경찰서에서 조선인 사상범을 감찰하는 일본인 미와(三輪) 형사가 연단에 버티고 연사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칼자루를 잡았다 놨다, 연신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연설 내용을 감시했다
"낙원동 300번지 부순다고 사진 찍으라니…"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사라진 조선물산장려운동 총본산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총본산 낙원동 300번지에 대한 정세권 선생 가족들의 추억은 남다르다. 정세권 선생 가족들과 수차례에 걸쳐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그리고 생생히 들었던 부분은 낙원동 거주 시기의 기억이었다. "1920년대 당시에는 계단이 있는 집이 귀해서 낙원동 300번지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와서 층층다리를 오르내렸다.
100년 전 서울에 옥상 정원이 있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물산장려회관, 북촌 상권에 충격을 주다
조선 산업전(産業戰)의 진영(陣營)으로 여겼던 물산장려회관은 조선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전시하여 생산열과 구매욕을 촉발하려 하였고(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오미일 지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펴냄, 2009년), 133~134쪽), 이의 일환으로 회관에서 개최된 조선물산염매시는 대중으로부터 선풍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당시의 기사다.
부동산 디벨로퍼가 독립운동에 돈 댄 까닭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 물산 장려 운동에 뛰어든 정세권
1920년대 초반, 조선의 상공업은 불황과 불경기, 일본인 기업위주의 일제 산업정책으로 심각한 위기상황이었다.(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사상(방기중 지음, 연세대학교출판부 펴냄, 2010년), 83쪽)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1920년대 후반에서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1920년대 조선의 암울한 경제 상황에 대한 최태영 교수(서울대학교 법학대학 초대원장)의
일제가 9번 투옥한 독립운동가, 누가 그를 지웠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안재홍과 동지적 연대를 맺은 건축왕
1920년대 급격한 부를 축적한 정세권은 대(大)자본가로 성장하는 와중,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가 참여한 민족운동 관련 조직 중 공식적 기록으로 확인 된 것에는 조선물산장려회를 비롯한 양사원,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이 있다. 아래는 국가보훈처의 공식 기록이다. "1923년 1월 조만식(曺晩植)‧안재홍(安在鴻) 등을 중심으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
왕십리 토지 전쟁, 불붙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일제의 도시 개발에 저항하다
정세권의 경성 개발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920년대 개발은 공간적으로 사대문 내부 특히 청계천 이북(북촌 지역)에 집중된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4대문 외곽 지역(창신동, 서대문, 성북동 등)을 개발하였는데, 경성 외곽은 일종의 교외 지역 뉴타운/신도시 개발로 해석 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사대문 내의 빈 공간을 개발하였다. 마지막 단계인 194
일제의 견제 "서울이 정세권 것이란 말이냐!"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건양사, 경성 건설 40년의 역사
정세권은 1920년부터 한옥 집단 지구 개발을 시작하여 1950년대 중후반까지 사업을 영위하였다. 하지만, 1940년 이후의 개발은 외부적 요인(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의 혼란)으로 인하여 왕십리 인근 지역에 한정된 듯하다. 따라서 정세권의 개발 사업은 주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집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님 정남식 님의 기억이다. "아버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