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정용 누진제 축소' 주장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책 목표와 정책 수단간에도 큰 불일치가 존재하는 주장이다. 정책의 우선 순위로 봐도, 문제가 있다.
목표와 수단이 불일치하는 가정용 전기 요금 누진제 논의
우선 왜 정책 목표와 정책 수단이 불일치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 나오는 '가정용 누진제 축소'는 올 여름 폭염 때문에 나오는 주장이다. 그 전에도 주로 여름철 에어콘 사용과 관련해서 나온 주장이다. 여름철에 에어콘을 사용하면, 가정용 전기 요금 누진제 때문에 일부 사용층에서 전기 요금 부담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푸는 것을 정책 목표로 삼는다고 하면, 어떤 정책 수단을 써야 할까? 1년 내내 적용되는 가정용 전기 요금 누진제를 축소하거나 대폭 개편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에어콘 사용으로 인한 전기 요금 부담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여름철, 그것도 폭염 시기에 국한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1년 내내 적용되는 전기 요금 체계를 개편하자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개미를 잡자고 큰 칼을 휘두르는 격이다.
한시적인 문제를 푸는 데에는 한시적인 대책으로 족하다. 올해처럼 폭염이 계속되는 시기에 정말 필요하다면, 한시적으로 가정용 누진제를 완화해서 적용하면 될 문제이다. 한시적으로 완화하는 것도 정확하게 타깃을 정해서 완화해야 한다. 엄청난 전기 사용을 하는 고급 주택까지 누진제를 완화해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전기 요금은 법률에서 세세하게 정해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부 정책으로 비교적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기도 하다.
만약 지금과 같은 폭염 시기의 문제 때문에 가정용 전기 요금 누진제 자체를 대폭 축소하면, 최상위 소득 계층의 전기 요금 부담만 줄어들 뿐이다. 예를 들어, 지금 일부 정치인들, 언론들이 주장하는 대로 누진제를 축소하면, 월 전기 요금 2000만 원 이상을 낼 정도로 엄청난 전기 사용을 하는 삼성 이재용 씨의 전기 요금이 1년 내내 대폭 축소되는 것이다.
또한 누진제를 축소하게 되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전기 요금 부담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실제로 정부가 과거 누진제 축소를 검토할 때에도 전기를 상대적으로 덜 쓰는 서민층의 전기 요금 부담이 늘어나게 되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온 적도 있다. 장애인이나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해서는 전기 요금 부담을 줄이면 된다는 보완책이 얘기되지만, 복지의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것이 완벽한 대책이 될 수 있나?
그런 점에서 박주민 의원을 비롯해서 가정용 전기 요금 누진제 축소를 주장하는 일부 정치인들의 인식이 매우 아쉽다. 정책 목표와 정책 수단 간의 정합성에 대해서 고민이 부족하다.
정책의 우선 순위도 다시 세워야
더 큰 문제는 정책의 우선 순위에 대한 고민도 부족하다는데 있다. 다들 가정용 전기 요금 누진제를 비판하면서, 상대적으로 싼 산업용 전기 요금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나?
박주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보았다. 가정용 전기 요금 누진제에 대해서는, 누진 비율이 2배를 넘지 못하게 한다는 비교적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 반면, 산업용 전기 요금을 대폭 현실화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이런 식의 법안 발의는 곤란하다.
대한민국 전기 요금을 둘러싼 쟁점 중에서 우선 순위를 따지자면, 산업용 전기 요금을 대폭 현실화하는 것이 1순위이다. 산업용 전기 요금은 가정용과 같은 누진제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때 '원가 이하'로 공급되었고, 지금도 너무 싸다.
그런데 전경련을 비롯한 대기업들이 반발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올리는 것도 찔금 올려서 될 문제가 아니다. 대폭 올려야 한다.
이런 1순위 정책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구상이나 준비없이, 가정용 누진제의 문제점만 얘기하는 것은 곤란하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한시적인 누진제 완화 조치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1년 내내 적용되는 전기 요금 체계를 바꾸는 법안을 발의한 것도 신중하지 못하다.
국토의 핵발전소화와 더 심각한 기후 위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올해 여름의 경우에는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피크 전력 수요가 8370만 킬로와트까지 올라가고 있다(8월 8일 상황). 작년 여름의 7691만 킬로와트에 비해 679만 킬로와트가 증가했다. 이렇게 피크 전력 수요가 증가하면 핵발전소나 석탄 화력 발전소같은 대규모 발전소를 더 지을 수 있는 명분이 된다. 바로 전력 마피아, 핵 마피아들이 바라는 바이다.
발전소는 전력 소비가 가장 많은 시점(피크 타임)의 전력 소비량을 기준으로 건설하게 되어 있다. 봄, 가을의 전력 소비가 아무리 줄어도 여름철 폭염 시기와 겨울철 가장 추울 때의 피크 전력 소비가 늘어나면 발전소는 더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올여름 피크 타임의 전력 소비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아마 정부는 이를 명분으로 대규모 발전소 건설을 밀어붙이려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추진되고 있는 20기에 달하는 석탄 화력 발전소 추가건설에 대해서는 반대 여론이 강하다. 온실 기체(온실 가스)도 대량 배출하는데다, 미세 먼지도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는 올여름에 급증한 피크 타임 전력 소비 증가를 명분으로 이를 강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전력 소비 증가→석탄 화력 발전소 추가 건설→더 많은 온실가스 증가→더 뜨거운 폭염"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정부는 발전소 건설 명분을 쌓기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서서 피크 관리에 소흘했다. 올 여름이 되기 전까지 '절전'을 강조하는 정부의 목소리는 약했다. 대표적으로 정부는 며칠 전에야 '개문냉방(문을 열어놓고 에어콘을 돌리는 것)'에 대해 단속을 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진작에 했어야 하는 일인데, 이런 일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산업용 전기 요금을 낮게 유지해서 기업들이 사용하는 피크 전력이 올라가도록 방치한 것도 정부이다.
그래서 정부의 전력 정책은 종합적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야 한다. 전기 요금만이 아니라 피크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문제도 같이 다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용 전기 요금만 얘기하고 있는 사이에, 국토가 더 많은 핵발전소로 뒤덮이고 기후 변화와 미세 먼지도 더 심각해진다.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피크 관리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지금 봄, 가을에는 발전소가 너무 많이 남아돌아서 문제이다. 정부가 핵발전소와 석탄 화력 발전을 지을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은 여름과 겨울에 오는 전력 피크에 있다. 그래서 피크 시점의 전력 소비를 줄일 수 있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후의 논의를 위하여
이번에 전기 요금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리고 전기 요금 체계의 개편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책의 우선 순위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 산업용 전기 요금을 대폭 현실화하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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